십자가의 정신은 희생과 헌신의 정신
‘옥합을 깨는 정성’ 아마 들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성은 예수님에 의해 일곱 귀신에게서 놓임 받고 자유로워진 것에 감격하여 예수님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성매매여성으로서 세상의 비난을 받던 처지에 있었으나 “창녀와 세리가 먼저 구원을 받는다”는 죄사함의 법칙에 따라 더욱 신실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죄가 깊은 곳에 은혜도 깊다”는 말의 주인공이 된 셈이죠. 탕자가 그 죄 때문에 아버지를 더욱 사랑한 것처럼 그녀도 자신의 삶이 주는 아픔 때문에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 그녀이기에 예수님 앞에서 아낄 것도 망설일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문둥병자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막달라 마리아는 그녀의 소중한 옥합을 깨고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이는 시몬이 예수님께 발 씻을 물을 내주지 않은 무례에 대한 간접적 비판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주인은 정작 대접을 소홀히 했는데 객이라 할 마리아가 대신 그 역할을 한 셈이니까요. 마치 예수께서 이 땅에서 제대로 성자 하나님으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가운데 죄인인 마리아만이 그를 알아보고 제대로 된 대우를 해 드렸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앞선자가 뒤처지고 뒤에 있는 자가 앞선다는 성경의 원리가 잘 보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하여 나중에 예수를 팔아 먹은 가롯 유다는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지요.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마땅하다”라고.”고. 물론 가롯 유다가 진실로 가난한 사람들을 아껴서 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와 제자들의 회계책임자인데 공금의 일부를 횡령할 정도로 탐욕스러운 자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죠.
예수님은 마리아의 정성에 감동하셨고 그 행위를 칭송하셨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마음을 높이 사신 것입니다. 어쩌면 그녀만이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본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만일 재림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집이라도 팔아서 대접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영생을 보장해 주실 분인데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그가 구세주임을 인정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성경에 정통했지만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인정할 수 없었기에 그를 푸대접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우리는 예수님 자신이 인류 구원의 희생물이 되신 것 자체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인 아들 예수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어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창조주에게 능치 못할 것이 없을 터이니 쉽게 구원을 베풀어도 될 터인데 굳이 독생자를 내어주어 구원을 하신 것은 아마도 당신께서 인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보임으로써 우리에게도 헌신과 희생의 자세를 가지도록 가르치시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도록 말입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말씀을 몸소 실천하도록 예수님을 내어 주신 것이죠.
오늘의 필자는 늦둥이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의 위대함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자식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식들을 내준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새삼 하나님이 예수님을 희생시켜 인류를 구원한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임을 실감하게 된 것입니다. 남아도는 것을 또는 아깝지 않은 것을 아무리 내놓는다고 해도 그것은 참다운 희생과 헌신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드릴 마음을 갖고 있을까요?
교회학교 교사를 오래 하다 보면 성도들의 신앙의 실체가 보입니다. 평소에는 ‘주여 믿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칩니다 “라고“ 잘도 말하던 성도들이 자신의 자녀에 관해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주여! 다 드려도 내 자식만은 안 됩니다. 차라리 저를 데려가세요 “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합니다. 명백한 이율배반이고 위선입니다. ”다 바칩니다 “에“ 자식은 왜 포함되지 않는가요? 그것이야말로 마리아가 깨뜨린 옥합에 해당되는 것인데 말이죠. 고통이 없다면 그것은 참다운 헌신과 희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시라 우리의 희생과 헌신을 그저 받기만 하시지 않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자식이라도 아낌없이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희생되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을 믿기에 그분은 아낌없이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자식을 바치면 하나님은 결코 그대로 두지 않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그럼에도 ’자식은 예외‘라고 하는 것은 그 마음에 불신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다 못해 병원의 의사에 주는 믿음만큼도 믿음이 없다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병원에서 자식에게 수술을 해야 한다고 진단할 때도 ’’ 자식은 예외‘라며 ”차라리 나를 수술해 주세요 “라고“ 하실 겁니까? 아마 그런 미친 부모는 없을 겁니다. 그것은 의사에 대한 믿음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에 대하여는 그만한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까?
헌신과 희생에 예외는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를 내주는 것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예외를 둘 수 있단 말입니까? 그분이 능력이 없어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셨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인류 구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미션을 위해서는 그 정도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다며 입버릇처럼 떠드시는 분들이 예외를 두시다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들도 가롯 유다가 되고 싶습니까?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를 비난한 탐욕의 화신 가롯 유다! 부모의 자식 사랑을 빙자한 위선적 태도가 가롯 유다의 그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에게 변명의 여지를 없애고 있습니다. 더 이상 도망 다니지 마십시오. 부모의 사랑을 방패막이 삼아 자신들의 위선을 합리화시키지 마십시오. 옥합을 아낌없이 깨고 향유를 붓고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린 마리아의 모습에서 진정한 믿음을 봅니다. 우리는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의 피값으로 구원을 얻고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특권을 손에 넣었는데 이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무엇인들 못 드리겠습니까? 변명과 합리화 대신에 회개와 반성 그리고 믿음에 대한 간절함을 가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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