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가르치라 -신앙의 전승의 비밀
어느 소년이 대학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멋진 제복과 모습에 반해 군인이 되고자 했고 그래서 택한 학교가 공군사관학교였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이기에 당연히 열심히 기도를 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전도왕이 될 정도로 신앙이 좋은 분이기에 그를 위해 엄청나게 기도를 하였기에 당연히 합격할 것이라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합격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불합격! 그것도 최초의 신체검사에서 탈락하는 ‘문전박대’적 불합격이었습니다. 필기시험은 아예 보지도 못했습니다. 좌절감에 빠진 그는 교회에 달려가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교회의 전도사님과 여러 성도들이 그를 위로했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런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교회에 전화를 하였는데 그때 어머니가 한 말이 그에게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너 왜 교회에 가 있니?” “어머니까 그러셨잖아요. 잘 되도 못 돼도 하나님의 뜻이니 순종하고 따르라고.. 그래서..”..그래서..” “그건 너 좋으라고 한 소리고” “???..” 외형적인 열심히 믿음의 깊이가 아님을 그의 어머니는 스스로 고백하고 말았습니다.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자신이 여전히 쥐고 있는 어머니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에 소년은 큰 충격을 받고 그로부터 신앙적인 방황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신앙적 방황을 하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겉보기에는 어머니의 이율배반적 언행이지만 그것은 계기에 불과합니다. 소년은 어머니가 자신의 가족에게 취하는 태도에 늘 불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늘 집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 여쭤 보면 “교회 갔다 온다”라고” 하셨습니다. 가족들에게 주어지는 식사는 늘 소박(?) 하기(?) 이를 데 없었고 국은 늘 곰국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소년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참된 신앙인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추구한 것은 신앙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수단을 통해 얻고자 하는 자기만족이 아니었을까요? 가정주부로서 살면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이 교회라는 곳에서 신앙을 과시하면서 인정받게 된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친 듯이 교회에 집중하도록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 성경의 가르침 예수님의 마음이 자리잡지는 못했고 그것이 바로 그 이율배반적인 언행을 하게 한 것이 아닐까요?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넘쳐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느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남녀의 사랑 부모 자식 간의 사랑 같은 좁은 의미의 사랑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박애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누구에게 차별 없이 느끼게 해 주는 사랑이야말로 믿는 자가 보여줘야 할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을 바탕으로 가족 사랑 이성애 등이 실현되어야 참다운 신앙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그러한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였고 그것이 소년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준 것이 어머니의 이율배반적 태도로 인해 폭발하게 되었다 할 것입니다.
오늘의 필자는 조부모님의 사랑을 통해 신앙을 전승받게 됩니다. 물론 조부모는 특히 할머니는 그들에게 신앙에 대한 많은 것을 가르치신 것 같습니다. 그것도 중요합니다. 마냥 사랑만 베풀어서는 신앙이 자라지 않겠지요. 하지만 소년의 어머니처럼 종교적 행위에만 몰두한다고 또 가르친다고 신앙이 전승될 수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조부모의 사랑이 자식이나 손주에게 느껴지고 그것이 바로 믿음에 의한 것임을 느낄 때 그들은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필자는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말을 들어도 누구에게 듣느냐에 따라 감동을 받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하는 설교는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이 한 것을 한 주 뒤에 그대로 하는 것인데 왜 교인들이 은혜를 별로 받지 못할까요?” 그것은 바로 설교자의 모습이 은혜를 끼칠 수 없게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설교를 듣는 사람이 설교자에 대하여 신뢰와 사랑을 느낀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이것도 지나치면 이단이나 사이비가 되겠지만)은혜를 받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속된 말로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더러운 컵에 담긴 물을 마시고 싶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처음 예수님의 교회에 찾아갔을 때의 일입니다. 천국을 14번이나 다녀오신 분이니 얼마나 대단하신 분일까 하는 마음으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모습은 장애를 가진 평범한 중년 여성의 그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조금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괜히 왔나 하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상담을 하면서 그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서숙희라는 분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 같은 감동이 밀려들었습니다. 그 후로도 목사님의 설교를 영상으로 많이 접했는데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내용이지만 크게 은혜가 된 것은 바로 그러한 믿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전혀 보이지 않고 진심이 와닿으니 감동이 느껴지는 것이죠.
대망 교회 홍예숙 사모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분도 서숙희 목사님과 비슷한 장애를 가지셨습니다. 말도 어눌하고 행동도 조금은 특이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에게 느껴지는 진정성은 저를 감동시킵니다. 그 어떤 위대한 설교도 주지 못할 마음의 변화를 주는 것 같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께서 쓰시고 계신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그런 점도 없지 않겠지만 서 목사님께 느낀 것과 비슷한 것을 느끼게 해 줍니다. ‘하나님이 사모님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이요.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바로 사랑 그리스도인의 사랑이었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도 느낄 수 있는 그 사랑이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어 은혜를 받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나라는 사람에 대한 특정인을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주고자 하는 사랑이었고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신앙의 전승을 하기 위한 사랑을 마음속 깊이 품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교리나 가르치고 성경이나 읽게 하는 식의 율법주의적 신앙에 갇혀 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것도 삶과 신앙이 따로 움직이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말이죠. 예수님이 가장 강조하고 계신 사랑을 자녀들에게 깊이 느끼도록 살고 계십니까?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삶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계십니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서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의 열심히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일 것입니다. 그 모습에 반해 ‘아! 나도 예수라는 분을 믿고 따를 거야’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무엇을 가르친 들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자녀들에게 실천하고 그 마음에 각인시키십시오. 그렇다면 나머지는 알아서 따라 올 것입니다.
애스더 왕비의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그녀가 유대인들을 위기에서 건지고자 왕에게 나아갈 때 삼 일간의 금식과 기도로 준비하여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왕에게 보였기에 왕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내가 자녀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는지. 물론 그것은 화장을 하고 머리를 가꾸고 좋은 옷을 입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아빠)에게 예수의 향기가 난다’고 하게 하는 바로 그런 아름다움입니다.
제가 지금의 직장에 들어가서 겪었던 일입니다. 평생 머리만 쓰던 제가 몸을 쓰게 되니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게다가 체육점수 최하위의 몸치인 저로서는 더욱 어려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수수수나 최소 우인데 체육은 양이나 가였습니다. 그래서 양가입니다. 양씨라고 해서 그런 것일까요? 제 등수 깎아내리는 원망스러운 과목이 체육이라 지독하게 싫어했습니다. 체육시간 있는 날 비가 오면 좋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났다’라는 일본속담대로 저는 그런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의 외모는 누가 봐도 평범하고 심지어 다소 추하기조차(?)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처음에는. 하지만 저를 살펴주시고 배려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거의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저를 비난하고 손가락질을 할 때 그분은 전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려운 일은 제게 맡기고 쉬운 일만 자신이 하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쉬운 일을 제게 맡기고 자신은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지 뭡니까?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그분의 외모는 미스코리아처럼 어여뻐 보이게 되었고 빛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가슴이 설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예수를 믿는 분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그렇게 은혜를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배려와 따듯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지금도 가끔 마주치면 (그 후 저는 다른 부서로 옮겨졌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자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존재로 비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든 형통할 것입니다. 특히 전도를 하는 입장이라면 그렇겠지요. 저는 그 분의 영향도 있고 또 다른 고마운 분들의 배려로 그와 같은 모습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남에게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인기를 얻는 것과는 다릅니다. 인기란 상대의 기분에 영합하는 것에 의해 얻지만 이러한 존재감은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갈 때 생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그러한 모습으로 바뀐다면 신앙의 전승은 물론 전도에도 큰 힘을 가질 것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이 그런 빛나는 모습으로 거듭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육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의 조건은 하나 그것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 (0) | 2021.10.26 |
---|---|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역이다. (0) | 2021.10.24 |
십자가의 정신은 희생과 헌신의 정신 (0) | 2021.10.21 |
돌 하나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시는 하나님! 택하심의 법칙 (0) | 2021.10.20 |
누구를 위한 물질인가?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하여! (0) | 2021.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