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정주영은 어떻게 쌀가게를 인수하게 되었나?

닥터 양 2021. 2. 28. 03:09

정주영은 어떻게 쌀가게를 인수하게 되었나?

 

목 차

1. 공부로 성공하고자 했던 호학소년 정주영

2. 성실과 근면으로 얻은 신용이 가져온 사업가의 길

3. 사업가로의 변신이 가져온 엄청난 효과 도전적 사업가의 탄생

4. ‘운도 실력정주영의 성공을 도와준 행운

5. 불우한 환경이 성공에는 호조건임을 보여준 정주영의 도전

6. 가진 게 없기에 성공했다. ’이봐! 해 봤어?‘ 정신

7 도전의 날개를 꺾여 버린 시대 고학력, 잘못된 교육, 풍요로움과 과보호

8. 약점이 강점이 되어 태어난 위대한 인물 정주영

 

1. 공부로 성공하고자 했던 호학소년 정주영

  정주영은 애당초 사업가의 꿈을 가지지 않았다. 그의 자서전이나 전기를 읽어 보면 원래 그의 꿈은 교사, 변호사와 같이 공부하여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가지 것은 공부하기 싫어서가 아니였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공부를 좋아하였고 다만 여건이 안 되어 공부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부기학원의 속성과에 늦게 들어가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자 선생님들을 괴롭힐 정도로 질문을 하면서 만회하였고 집에 돌아가서도 부기학원 공부와 함께 책을 많이 읽었음에서도 그의 호학적 성향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모습은 막노동을 할 때도 또 쌀집에서 일할 때도 변함없이 보여진다.

  이는 의도적으로 사업가로 인생을 출발한 이병철과 대조적이다. 이병철은 공부가 싫어 사업을 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호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졸업장이 하나도 없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심지어 대학 중에서 끝까지 학업을 마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면 이러한 것이 불가능할지 모르나(물론 검정고시를 보면 가능은 하다) 그만큼 그 당시에는 제도가 허술했다고 할 수 있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집안도 학자의 가문이었지만 그는 그 가문에서 이런 자식이 나오다니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학문과 거리가 멀었다. 사업을 한 것도 배움에 대한 열정이 없고 독립운동을 하자니 용기가 없기에 (그러기에는 가진 게 너무 많았다) 오랜 방황 끝에 내린 결론일 뿐이다. 부자님 도련님의 치기라 할까?

  하지만 정주영은 사업가는 물론 배움으로 얻는 직업조차 사치였다.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니 사업가로 출발할 여력이 있을 리가 없다. ‘조반석죽의 삶에서 사업가란 언감생심의 꿈이고 그저 배부르게 먹고 사는 것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일 것이다. 그래서 머리 하나로 성공할 수 있는 꿈을 가졌다. 많은 불우한 사람들이 공부로 성공의 길을 걸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법고시를 공부해 그의 인생을 바꿨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범학교에서 무상교육을 받을 수 있어 성공의 길을 가게 된다. 링컨 대통령도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것이 무학의 그를 일약 대통령의 자리로 앉게 하였다. 정주영도 그런 공부 신데렐라를 꿈꿨던 것은 자본 없이 성공할 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박정희도 노무현도 링컨도 그렇듯이 호학적 성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정주영과 가장 처지가 비슷했던 링컨도 정주영처럼 일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지만 정주영에게는 그조차 어려웠다. 링컨이나 노무현 박정희는 비록 어려운 가정 출신이나 정주영보다는 나은 형편이었다. 필자의 어머니는 거의 무학이지만 아버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고졸이다. 두 분 다 넉넉한 가정의 출신은 아니나 아버지 가정은 고학을 하더라도(심지어 미군 부대 보초 알바까지 하셨다) 공부를 할 여유는 있었지만 어머니에게는 그런 여유조차 없었다. 정주영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무능한 할아버지와 자립능력이 없는 아버지 형제자매들까지 떠안아야 하였으니 공부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니 초등학교를 2등으로 졸업해도 박정희처럼 사범학교를 가거나 노무현처럼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서 소박한 꿈이라도 펼칠 수도 없었다. 부모님에게 그는 가족을 지탱할 노동력이니 미래를 위한 투자는 어려웠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저출산의 문제를 안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과거에 자녀는 노동력이었다. “식탁에 둘러앉은 자녀들은 활통의 화살 같다고 성경은 말한다. 자녀가 많으면 다복하다는 말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거나 고리타분한 생각이 아니다. 지금처럼 교육이 당연시되던 시대가 아니었으니 자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집안의 노동력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런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지만 아주 예전에는 7,8살짜리 아이가 아기를 등에 업고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런 어린아이라도 아기라도 업고 있는 것으로 부모님을 도운 것이다. 조금 더 크면 가사나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아이가 노동력은커녕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대상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어린아이는 물론이지만 예전 같으면 훌륭한 노동력이 될 사춘기 아이들 거기에 20살이 넘은 청년까지 자식은 부모에게 부담을 주는 짐일 뿐이다. 취업을 하면 끝인가? 이젠 집 사달 라 혼수 보태달라 하며 더 큰 부담을 안겨주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애를 많이 낳기가 어려울 수 밖에. 게다가 부모 자신도 그런 대접을 받고 자란 세대들이 늘어나니 아이를 위한 노동을 쓸데없는 희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실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다자녀 가정이 아예 없지는 않기는 하다. 필자의 가정도 3자녀를 가졌으니 요즘 수준에서는 다자녀 가정이라 할 수 있기는 한데 전혀 후회되지 않는 것은 다자녀가 주는 행복이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론이지 원래는 큰 딸을 낳고 끝내려고 했던 점에서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머지 두 아이는 실수로 생긴 아이들인데 지금 생각하면 행운의 실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키워보면 안다! 왜 옛날 사람들이 자식을 그렇게 많이 낳았는지. 셋을 낳으니 10을 낳아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음만은. 하지만 하나만 낳았을 때는 둘도 꺼려졌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실감 나는 이야기가 아닐까?

2. 성실과 근면으로 얻은 신용이 가져온 사업가의 길

  하지만 정주영이 사업가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바로 쌀가게 주인에게 가게를 인수하라는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그의 자서전 전기 어디에도 그가 그런 행운을 기대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농사짓는 마음으로 농사일에 비하면 일도 아닌쌀 가게 일을 성실하게 하고 나아가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찾아서 하였다. 재고정리, 장부 정리 등이 그것이다. 마치 사장처럼 일을 한 셈이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 대가족을 책임지려고 한 소년은 청년사업가로 변신하게 되었다. 퇴근하고 돌아가 술과 오락을 멀리하고 오로지 책과 씨름하면서 여전히 공부로 성공하려고 했던 정주영의 삶은 사업가라는 생각지도 않을 길로 방향전환을 하게 되었다. 그는 현대그룹 회장으로 대한민국 1등 사업가가 되고서도 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면 기업은 안 하고 싶고 변호사가 돼서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강연을 할 정도로 공부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다. 그의 롤모델은 허숭이라는 소설 속의 변호사였다. 소설을 실제 상황이라고 믿었던 그는 허숭은 영웅이며 닮고 싶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주인의 제안이 없었다면 우리는 법률가 정주영 또는 정치가 정주영을 기억할지 모른다.

3. 사업가로의 변신이 가져온 엄처난 효과 도전적 사업가의 탄생

  정주영의 사업가로의 변신이 의도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그가 성실과 신용을 소중히 여기게 된 것이다. 무일푼인 그에게 믿을 것은 건강한 몸과 튼튼한 체력 그리고 성실함을 바탕으로한 신용이었다. 그것이 가게 인수라는 큰 선물을 안겨준 것이니 정주영이 이러한 미덕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가 커진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이병철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덕목이 정주영에게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는 성공에 가장 필요한 것은 건강, 성실 근면함과 신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자본과 기술과 같은 객관적 조건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신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정주영은 건강에 대한 집착이 조금 보이는데 (건강을 중요하 행복의 조건으로 꼼았다) 바로 몸이 튼튼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토록 남들이 무모하다고 생각한 사업에 도전할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이것이었다. 자본과 기술이 없어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를 모험적 도전자로 만들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채 사업가가 되었지만 성공을 거둠으로써 그의 도전정신이 더욱 확고해진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만일 자금을 모아 계획대로 사업가가 되었다면 그렇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것이 이병철과의 차이이다. 이병철은 돌다리도 두드려본다는 태도로 사업을 시작하고 성공했다. 그러기에 그의 사업은 비교적 무난한 국내 소비재시장에 집중된 것이다. 하지만 정주영은 사업가가 된 것 자체가 무모한도전일 수 있었는데 그것을 훌륭히 해 냈으니 도전을 두려워할 마음이 약화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쌀가게를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고 바로 자동차 수리사업을 시작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쌀가게는 그래도 이미 하던 일이지만 자동차 수리사업은 완전히 모르는 분야이다. 하지만 자본과 기술보다 성실 근면함과 그에 따른 신용 건강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학습효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업을 위해 찾아간 오윤근에게 거금 3,000원을 얻은 것도 또 나중에 3,500원을 다시 얻은 것도 신용의 힘이었기에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사업자금을 빌려달라고 한 사람에게 이러한 사실을 주지시켰다고 한다. “당신은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신용이 없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돈이 제일 많은 사람이 아니라 신용이 가장 좋은 사람이니 성공한 것이다.”라고 했다. 무일푼 맨몸의 출발이지만 성실 근면과 신용으로 자본도 사람도 얻고 기술도 따라오니 그가 도전에 대하여 두려울 이유가 없을 것이다. 건설업 해외 진출, 자동차 산업, 조선업에의 진출, 중동건설사업에의 진출 등 그가 이룬 도전들이 바로 젊었을 때의 경험이 준 교훈에 기초했다고 할 수 있다.

4. ‘운도 실력정주영의 성공을 도와준 행운

  그의 성공에는 어느 정도 행운도 곁들어졌다. 가게를 이어받아야 할 외아들이 난봉꾼이어서 도저히 물려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가 착실했거나 또는 착실한 다른 아들이 있었다면 가게를 인수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사업자 정주영을 가져온 천운이었을까 아니면 하늘이 우리 민족에게 정주영이라는 선물을 주기 위해 준비된 행운이었을까?

  또 다른 행운이 그를 큰 성공으로 이끌었다. ‘전화위복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그가 만일 쌀가게를 계속 가지고 있었다면 자동차 수리소를 일제에 의해 빼앗기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가 아는 정주영이 탄생했을까? 두 번이나 (+ 광물운반사업까지 포함하면 세 번)타의에 의해 사업을 포기해야 했던 것은 그에게 좌절과 새로운 도전이라는 선물을 안겨준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한 곳에 머물지 않는같은 삶을 사는 것은 죽은 삶이라는 신념을 심어주지 않았을까? 일종의 강제성장이라 할 것이다. 그것이 두세 번 거듭되니 겁이 없어지고 자신이 넘치게 되어 도전의 드라마가 이어져 갔던 것은 아닌가? 거짓말도 한 두 번 하면 겁나지만 계속하면 습관이 되는 것처럼 그의 불행이 도전을 습관성(?)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필자는 제법 다양한 일을 경험했는데 그것을 통해 한 곳에 오랫동안 붙박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나태와 안일함을 여러 번 보았다. 그들은 성실을 가장한 게으름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었다. 아니 게으르니까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다른 삶을 찾아간다는 것 자체가 절대 무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한 곳에 있으면 이른바 텃세도 생기니 더욱 편해지지 않겠는가? 기업으로서는 유능한 사람은 나가려고 하고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은 남아 있으려는 것이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정주영이 그런 삶을 살았을거라는 생각은 하기 어렵지만 원래 목표인 가족을 부양하겠다는 책임감을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면 대사업가 정주영은 태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5. 불우한 환경이 성공에는 호조건임을 보여준 정주영의 도전

  정주영에게 고향 탈출은 그의 첫 번째이자 가장 큰 도전이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오늘의 정주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3번이나 붙잡혀 갔지만 4번째에 성공했다. ’34라 하겠다. 만일 아버지가 그를 처음부터 보냈다면 오히려 그의 삶에 마이너스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는 거기서 불굴의 도전정신을 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로운 도시생활에 적응할 준비를 더욱 충실히 하여 정착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도전이 주는 보상을 확실히 알게 된다. 그것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덤으로 깨달으면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생각은 이미 이 시절에 탄생한 셈이다. “도전은 쓰나 열매는 달다라고 해야 할까? 부기학원 안내문을 놓고 나온 실수를 반성하는 모습에서 도전이란 치밀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실패해도 자신이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도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라는 신념도 가출의 실패와 성공 그리고 도시에서의 정착이 가져다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성공에 있어 좋은 조건이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쌀가게 아들의 경우처럼 난봉꾼이 된다면 말할 것도 없지만 정주영이 좀 더 잘 사는 집 아들이라면 변호사나 교사가 되었을 텐데 할아버지가 유능해서 최소한 그의 아버지가 동생들까지 책임지지 않았다면 형제가 적어서 자신의 부담이 가벼웠다면 아버지가 개방적인 사고라 그의 상경을 그대로 허용했다면 그에게 자본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등등...그가 가진 최악의 조건이 도리어 성공을 가져온 조건이 되었음을 그가 쌀가게를 인수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서 알 수 있었다.

  정주영 전기 작가들은 입을 모아 어려움을 이기고”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무일푼으로라고 평하지만 사실은 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카네기 록펠러 링컨 노무현 등등 우리는 낮은 학력 가난한 가정출신의 성공인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다. 스티브 잡스나 빌게이츠 주커버그 등은 대학을 중퇴하고 성공의 길을 걸었으니 수준은 달라도 비슷한 점을 갖고 있다.

  예전에 영화에 대한 강의를 듣다가 우리나라 명감독은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다. 그러니 학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강사의 말에 그건 반대이다. 학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좋은 학력을 가질 정도로 머리가 좋았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반론을 제기한 적이 있다. 실제로 최고의 명장이라 할 임권택감독은 무학에 가까운 사람이기도 하다. 정주영이 초등학교를 2등으로 졸업할 때 1등을 한 친구는 교도관 시험에 합격하여 교도관이 되었다.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나 그가 2등한 정주영보다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는 없었으니 좋은 성적이나 학력이 사람을 현실에 안주하게 만든 사례가 아닐까 싶다.

6. 가진 게 없기에 성공했다. ’이봐! 해 봤어?‘ 정신

  안산에 있는 어느 교회를 다니면서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 교회에는 국졸 중졸부터 대졸 그리고 나 같은 유학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교회처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곳은 드물 것 같다. 하지만 교회내에서는 그런 차이를 문제시하지도 할 수도 없으니 모두가 일단 대등한 위치에 있게 된다.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학력이 도리어 사람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학력이 높은 사람들은 직장에서 급여생활자이니 사는 게 뻔하지만 낮은 사람들은 극과 극이었다.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제법 잘 사는 사람들 역시 저학력자들이었다. 그들은 학력이 낮으니 좋은 직장은 언감생심이었기에 자신의 힘으로 사업을 하여 성공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고학력자들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학력은 일정 수준의 삶은 보장하지만 그 이상을 이루기에는 도리어 장애가 될 수 있음을 느꼈다. 요즘 고학력 성공자가 많은 것은 더 이상 고학력이 일부만의 특징이 아닌 시대이기 때문이지 그 학력이 성공을 가져온 것인가는 의문이다.

  필자는 자신이 대학의 정식교수가 되지 못한 것을 감사하고 싶을 때가 있다. 교수가 된 선배나 후배 중에 부러울 만한 삶을 사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철밥통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니 눈빛은 흐려있고 정신은 태만해져 있으며 대화의 수준도 그다지 높지 않다. 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실속이 별로 없어 보이기조차 한다.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나 노블리스오블리주에 대한 개념도 거의 없고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누리는 데 급급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전공이라는 세계에 갇혀 사고의 폭도 너무 좁아진 전문가 바보가 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도 교수가 되었다면 저런 사람들이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부럽다면 금전적 안정인데 그 안정이 사람을 형편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니 그리 부러울 것은 아닌 듯 하다.

  정주영도 그런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배운 사람 학자 전문가는 상식에 얽매여 도리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고. 그는 불가능하다는 전문가의 의견을 반박하는 성공을 여러 번 거두었다. ’정주영 공법은 그중 하나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봐! 해 봤어라는 말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이다. 이병철이 정주영에게 추월당한 것은 그에게는 그런 무모한 도전을 가질 경험도 용기도 없었는데 그는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출발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진 것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 쉽게 모험을 하기는 어렵다. 요즘 잘나가는 김범수 이해진 등이 부자 아빠에게 돈을 받아 사업을 한 사람들은 아니지 않나? 반면 이재용은 여러분 사업을 말아먹고 아버지 회사에서 겨우 자리를 잡았다.

  정주영의 첫출발은 범상하지 않았다. 그는 가출과 쌀가게 인수라는 것을 통해 생을 지배하는 신념을 얻었던 것이다. 성실하고 근면하고 건강하면 신용을 얻고 그것이 큰 재산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일푼에 낮은 학력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믿는다.

  오늘날의 청년들이 그의 삶에서 가져와야 할 가장 큰 교훈이 바로 이것이라고 본다. “이봐 해 봤어정신이다. 성실 근면 + 신용+ 건강 = 성공이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라 는 그의 신념을 이봐!! 해 봤어라는 말은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도전정신이라 할 수 있다.

7. 도전의 날개를 꺾여 버린 시대 고학력, 잘못된 교육, 풍요로움과 과보호

  하지만 우리 청년들은 그러한 도전정신을 가지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다. 정주영처럼 무학에 가난한 삶은 우리와 거리가 멀다. 필자가 고등학교 재학시절만 해도 고등학교조차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는 모두가 갈 수 있는 학교는 아니었다. 특히 여성의 경우 더욱 그랬고 대학은 웬만큼 잘 사는 집 딸이 아니면 가기 어려웠다. 그래서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와 취업을 했다가 자신의 수입으로 대학에 가는 여성들이 필자의 주변에 제법 많았다. 당장 내 아내조차 그런 경우인데 아내의 경우 직장을 그만둘 가정 형편이 안 되기 때문에 주경야독을 하였다.

  하지만 요즘은 속된 말로 개나 소나다 대학가는 세상 아닌가? 경제사정이 좋아져 대학진학희망자가 급증하여 재수생이 넘쳐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친 듯이 대학설립허가를 남발한 결과이다. 예전에 미국의 대학진학률이 50%라고 해서 엄청나게 부러웠는데 이제 우리는 세계제일의 대학진학국가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졌으니 정주영의 성공조건인 저학력과 빈곤이라는 호조건(?)이 사라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을 위해 아이들이 받는 교육이나 준비과정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대학입시는 지금처럼 체계화된 준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속된 말로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정석을 죽어라 파면 명문대 입학도 꿈이 아니었고 내신제가 없으니 철 좀 늦게 들어도 얼마든지 만회가 되었다. (물론 쉽지 않지만) 게다가 입시를 준비하는 연령도 지금보다 훨씬 높았고 사교육도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아 개인기가 충분히 통하던 시대였다. 요즘은 공무원시험이나 고시도 사교육에 의존하는 시대이니 대학입시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 과정을 거치는 아이들에게는 도전정신이 남아 있기 어렵다. 공부는 공부 자체도 어렵지만 공부하는 방법 내용의 결정도 어렵다. 그런데 그러한 중대한 문제를 남에게 맡기고 학습 자체제만 매달린다면 훨씬 수월해 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큰 성장을 하게 되어 있다.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본 사람은 안다. 인생이란 선택의 연속이라는 것을. 정주영이 시골집을 뛰쳐나간 것도 엄청난 선택이었고 쌀가게를 한 것도 거기에 자동차 수리업에 뛰어든 것도 그렇다. 스스로 한 선택이 들어맞고 그로 인해 성공을 거둘 때마다 그는 자신감에 충만해져 새로우 도전을 계속한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필자의 아내의 도전기를 소개한다. 아내는 원래 주경야독을 하며 살 정도로 성실하고 도전정신도 충만했는데 결혼 후 가정주부를 하면서 그런 것과 거리가 멀어졌다. 물론 유학 시절에는 슈퍼나 사무실에서 파트타임 일을 하면서 가계에 보탬이 되었지만 귀국 후엔 거의 사회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계가 어려워지자 여러 가지 일을 하기 시작했다.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일하기도 하고 학습지 교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필자가 하다 그만둔 일본어 교습소를 이어받으면서 삶이 180도 바뀌었다. 가르치는데 소질이 없다고 해서 학습지도 그만 둔 사람이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수입은 필자를 압도할 정도로 들어와 사무실을 다시 구하고 또 확장까지 했다. 전에 그렇게 해 보라고 해도 자신이 없다고 고사하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필자가 교습소를 하다가 큰 외국어 학원의 스카우팅 제의가 와서 대신 맡아달라고 했을 때 펄펄 뛰며 난 못해 자신 없어했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그때 아내가 동의 했다면 필자는 스타강사는 몰라도 제법 잘 나가는 강사가 되었을 것 같다. 개인 교습보다 대단위 강의에 능한 필자의 특징을 고려하면 그렇다.

  인간은 해봐야안다. 도전정신은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아내의 변신은 도전이 가져온 성과였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의 어머니가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아서 열어서 먹어보지 않으면 맛을 모른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 보자. 해 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은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죽이는 행위이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와 같다. 기차의 운전사가 자동차 운전사보다 훨씬 수월하다는 것은 무사고 기록의 차이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은 정해진 길만 가면 되니 게다가 다른 차와의 충돌 위험도 훨씬 적으니 인간적인 성장도 덜 될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도 그렇지만 외국에서도 철도회사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 아이들이 어른들이 깔아놓은 레일 위만 달리며 어른이 된다면 그들에게 도전정신을 요구한다는 것이 무리일 것이다. 필자가 사교육에 종사하면서 이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학부모들이 이제는 아이들을 사교육기관에 맡겨버리고 모든 것을 다 책임지게 하는 풍토가 일반화되고 있음을. 부모와 자식이 하나가 되어 학습을 진행하는 것조차 이제는 그리 일반화되지 않을 정도이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넌 공부만 해 다른 건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하니 아이에겐 생각조차 사치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가 충분히 잘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정주영이 모험을 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가정의 절망적 빈곤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흉년이 되면 조반석죽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하고 거기에 봄이 되면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잃을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으니 이판사판이라는 마음으로 도전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정주영의 아버지처럼 고통을 감수하고 그대로 머무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그러니까 가난하고 무학인 사람이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가난한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고 자포자기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는 가난이 일반적이니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다르다. 게다가 사회복지가 과거에 비해 잘 되어 있어 어떻게든 입에 풀칠은 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그들의 성공을 방해하는 마이너스효과를 가져온다. 사회복지가 멀쩡한 사람을 타락시키는 비극적인 사례는 생각보다 많다.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으니 술과 도박 등에 빠져 인간 자체를 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메스를 댈 필요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부모들의 과잉보호이다. “우리 딸 꽃길만 걷게 하고 싶었는데이 말은 30이 넘은 딸에게 한 엄마의 말이다. 30이 넘으면 장년이라 과거에는 엄연한 어른이었다. 그런데 마치 미성년자에게 하듯이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품 안에 자식이라 했는데 이제는 자식을 품 안에언제까지나 두려는 것이 요즘 부모들의 과보호의 민낯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게 가능할까? 그렇게 해서 아이가 성장하지 못하는 것에서 생긴 문제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과거처럼 아이들이 부모에게 든든한 노동력은 되지 못할지언정 평생의 짐덩어리가 된다면 그것은 부모나 자식이나 모두를 힘들게 할 것이다.

  우리는 한마디로 자식을 잘못 키웠다고 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하나하나 다 챙겨주고 성인이 되어도 품 안에 두면서 자립을 방해하여 도전도 모험도 못하는 온실 속의 화초가 되도록 아이들을 키운 책임은 실로 무겁다. 아무리 악의가 아니라도 반성은 필요하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되는 부모가 그것을 인정할까?

8. 약점이 강점이 되어 태어난 위대한 인물 정주영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이라는 찬양에서 약할 때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이 강함이 되다니 이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지만 이 말을 정주영에게 대입시켜 보면 금방 느낌이 올 것이다. 그의 약함은 곧 강함이 되었다. 낮은 학력, 가난한 가정이라는 약점은 그의 강점이 된 것이다. 아무것도 없으니 성실과 근면은 필수이고 신용도 필요했다. ‘신용대출을 받는 사람에게는 담보로 할 것이 없으니 결국 신용을 담보로 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신용은 자신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큰 자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돈과 사람 기술을 모을 기반이 되어 그의 사업의 성공의 기반이 되었다. 자기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면 도리어 이 모든 것을 얻기가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뿐인가? 그의 놀라운 창의력도 약함때문에 생긴 보물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충분한 자본과 사람 기술이 있었다면 그런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외국에서 투자를 할 때는 반드시 그곳 사람들의 투자를 받습니다. 그래야 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죠. 우리 돈 가지고 하면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이러한 생각은 그가 남의 돈을 신용으로 끌어들여 성공한 경험의 학습효과가 없었다면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소 지을 돈이 없으니 당신이 내게 배를 주문하면 그 돈으로 조선소를 지어서 당신 배를 만들어 드리죠라는 봉이 김선달 뺨칠 소리를 과연 할 수 있었을까? 돈과 사람 기술이 충분한데. (그나마 성공하니까 사람은 모으기 쉬워졌다) 그에겐 정말 약함이 강함이었다 할 수 있다.

  약함이 주는 효과는 더 있다. 그는 자신을 부유한 노동자라고 하였다. 과도한 겸손이거나 위선적 포장이라고 할 수 있으나 객관적으로는 그럴 수 있어도 자신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그가 보여준 삶은 재벌의 화려함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낡은 구두 허름한 옷 소박한 식사 등등 그의 삶은 부유한 노동자라는 이름에 맞게 보인다. 심지어 엄청난 재산을 기부하는데도 앞장섰지만 필요없는 곳에는 10원도 아끼는 천하의 짠돌이었다.

  그것은 그가 사업가로서의 출발이 너무나 열악하였기 때문에 몸 배인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돈과 사람 기술이 부족하니 그는 현장에서 몸소 지휘를 하는 현장의 사나이였다. 현장에는 화려함이 필요없으니 그의 삶은 소박해질 수 밖에 없다. 노가다라 불리는 사나이들과 어울리니 그의 소박함은 아무런 불편도 부끄러움도 주지 못했다. 일본의 사무라이가 그랬듯이.

  훗날 그의 사업이 번창해서 더 이상 현장에 붙박이처럼 있을 필요도 소박한 삶을 살 필요가 없어졌어도 오랜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기 마련이다. 여전히 그는 검소한 삶 그가 말하는 중산층의 삶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의 집에 갔다 온 사람은 재벌그룹 회장의 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고 하나같이 증언했다.

  그런 삶을 살았기에 그가 민족의 지도자로서 성장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심지어 대선에 출마할 때 가족들에게 우거지국 먹고 살 생각해라” “맨몸으로 왔다 맨몸으로 가는 인생이니 각오하라는 식의 결의를 보인 것도 그의 삶이 자신이 가진 지위를 아까워하며 몸을 사릴 정도로 화려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입버릇처럼 사업은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를 위한 것이다라고 한 것은 결코 허언은 아니었다. 그에겐 부와 그것에 의한 화려함이 익숙하지 않았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다. 일하는 것에 행복을 느끼고 그래서 평생 새로운 도전을 거듭한 그이기에 그로 인한 부가가치인 부와 화려함을 외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이병철의 삶은 재벌회장다운 화려함을 가졌다. 모든 것이 최고이어야 직성이 풀렸던 이병철은 삶의 수준도 그랬다. 최고급 제품을 주변에 놓고 행복해했다. 그것은 그가 부잣집 막내로 충분한 자본을 받아 출발했고 (두 번이나 실패했지만 아버지의 지원은 이어졌다)또 집안 자체도 그러니 소박한 삶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하는 사업도 현장을 맡겨 놓아도 알아서 잘 할 소비재 중심의 경공업이니 굳이 본인이 현장에 발을 갈 필요가 없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차이이다. 이병철이 성공한 사업가라면 정주영은 민족의 지도자로 생을 마쳤다. 국가에 도움이 되지만 돈벌이는 되지 않는 일을 이병철은 하지 않았고(적어도 정주영만큼은) 정주영은 혼신을 다해 도전하고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가져온 것은 정주영과 이병철의 초기 조건이 너무나 차이가 났다는 점이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라는 말은 바로 정주영을 두고 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그런 강함은 경제에서만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대로 이병철의 강함은 도리어 약점이 된 셈이다.

  정주영의 모든 것이 출발의 약함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면 지나칠까? 어떤 심리학자는 정주영의 진짜 가출 이유는 부모님이 먹고 사는 문제로 싸운 것이라 했다. 심리학자다운 사고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먹고 사는 문제로 고통받는 가족이라는 것으로 바꿔 생각한다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저 가난한 게 아니라 줄줄이 딸린 식구로 느낀 절망과 위기감을 정주영은 간절함을 통한 도전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가난함 때문에 맨주먹으로 출발하려니 성실과 근면 신용을 소중히 여겼고 그것이 쌀가게 인수와 이어지는 사업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가장 큰 자산이 되었다. 그의 창의력, 불굴의 의지, 돈에 대한 무욕 등등이 그의 약함이 준 선물이었다.

  정주영은 기업에 대한 정권의 압력과 비판적인 여론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분노와 억울함을 느낀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정권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은 맨몸으로 출발하여 모든 것을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이루었고 결코 부정과 부패를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컸기 때문이다. ‘시류를 따라정권과 가까이 지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업을 지키기 위한 것이지 정경유착으로 이익을 얻으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그는 굳게 믿고 그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세상에 알리려고 했다. 심지어 부모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수성가한 그에게 약함이 도리어 자신의 자부심의 근거가 된 셈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정주영의 약함이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여 깔려놓은 레일을 따라 상식에 따라 생각 없이 사는 빈대보다 못한삶을 사는 우리의 강함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도전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가 꽃길만 걷지 말도록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가르침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서투른 과보호보다 엄격함이 필요하다. 우리가 과거에 몰락한 제국들 그리고 가까운 일본과 같은 길을 가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