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일본경제의 빛과 그림자 (5) 기업집단과 일본의 고도성장

닥터 양 2021. 3. 13. 01:46

일본경제의 빛과 그림자 (5) 기업집단과 일본의 고도성장

 

(해설)우리는 일본경제에 대하여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으나 그들이 보여준 경제사에서의 놀라운 업적은 결코 무시해서도 잊어도 안 될 것이다. 어느 나라 어느 경제도 영원한 번영은 불가하다. 현재의 실패나 침체 때문에 번영의 시대까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경제의 번영과 침체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찾아보기로 하자.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긍정적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세계적인 기업들을 보라. 그들은 한 분야에만 힘을 쏟아 세계를 제패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우리의 재벌들은 문어발식 경영으로 무슨 그룹이니 뭐니 해서 잡다하게 업종을 넓혀 어떻게 되었는가? 그룹 전체를 합해 봐야 세계적 기업들의 규모에 훨씬 못 미치지 않는가?” 과연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은 백해무익한 것이었을까?

  일본은 패전으로 인해 미국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연합국의 점령이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와 달리 유럽국가들의 전쟁 기여도가 낮은 동아시아 전선의 특징도 있고 해서 사실상 미국의 단독점령이 되었다. 미국의 점령정책을 총지휘한 것은 바로 더글러스 맥아더이며 그의 점령정책은 본국 미국의 트루먼 정부의 훈령에 따라 실시되었다. 맥아더는 원래 골수 자유주의자로 훗날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지만 그의 지휘하에서 실시된 점령정책은 민주당정부의 진보적 개혁이었기에 상당히 과격한 내용이었다. 오죽하면 미국의 세금을 들여 일본을 사회주의국가로 만드는가 라는 비난이 본국의 여론을 들끓게 하였을까?

  재벌해체는 그러한 개혁 중에서도 상당히 과격한 것이었다. 일본의 재벌은 우리와 달리 과반수 주식의 소유를 기반으로 사업을 확대시켜 나갔다. 지주회사(持株會社:다른 기업을 지배하기 위해 주식을 소유하는 것이 목적인 회사)인 재벌 본사의 주식의 절반 이상을 재벌가족이 소유하고 이를 기반으로 지주회사가 지배하는 모든 회사를 재벌가족의 지배하에 두는 형태이다. 지주회사의 지배를 받는 회사들도 자신의 산하에 여러 회사를 두었기 때문에 재벌가족이 지배하는 회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지주회사가 직접 지배하는 회사를 자회사라고 하고 자회사가 지배하는 회사를 손자 회사라고 하고 손자 회사 산하의 회사는 증손자 회사가 된다. 우리의 경우 지주회사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순환출자라는 방식으로 재벌이 형성되었다.

  재벌해체는 재벌 가족의 재벌에 대한 지배의 해체와 재벌기업 간의 연결고리의 해체에 의해 이루어졌다. 우리와 달리 지배구조가 단순하기 때문에 해체 과정도 비교적 간단했다. 재벌 가족의 지주회사 주식을 유상 몰수하고 그 대금을 은행 계좌에 강제입금시키게 하고 일정 기간 인출할 수 있는 액수를 생활비 수준으로(중산층 수준)억제 하여 판매대금으로 주식을 다시 매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거기에 재벌해체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부유층을 대상으로 부과된 재산세를 통해 재벌 가족들의 재산의 대부분이 국고로 환수되는 바람에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이용해 재벌지배권의 탈환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예금동결이 해제된 뒤에도 그간의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예금의 가치는 재벌로서 부활할 수 있는 액수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기에 결국 일본의 재벌가족은 다시는 재벌의 자리에 복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구재벌의 기업들 이 기업 명의에 대한 사용료 명목으로 생활비를 도와줘야 할 정도로 그들은 몰락해 있었다.

  지주회사의 해체와 함께 자회사 손자회사 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재벌기업들은 독립기업으로 바뀌었다. 서로를 연결시켜 주는 주식은 재벌 가족과 마찬가지로 몰수되어 일반에게 분산판매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일시적이긴 하나 일본의 주식소유구조가 법인 중심에서 개인투자자중심으로 바뀌었다. 이 변화는 훗날 다시 법인 중심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치는 일이 일어났다. 재벌에 속했던 기업들이 다시 모여 기업집단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들을 지휘할 오너도 지주회사도 없었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재벌이 우리와 달리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잘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재벌은 재벌가족을 대리하는 반토(番頭)라는 집사가 경영을 총지휘하였는데 이는 재벌이 되기 이전 시대부터의 관행이었고 그것이 재벌의 뿌리인 상인 가문의 수명을 길게 하였다. 대표적 재벌인 미츠이의 경우 17세기 미츠이 다카토시에 의해 가문과 경영의 분리가 이루어졌고 그것이 오너일가에 의한 전횡을 철저히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기업집단은 재벌과 달리 수평적인 협조관계를 유지하며 일본의 고도성장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기업집단의 핵심은 메인뱅크였다. 그들은 이전에도 구재벌의 은행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성장하였으니 그것이 낯설지는 않았다. 메인뱅크를 중심으로 기업집단은 문어발식 확장을 통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구재벌과 비슷한 행태이며 다르다면 그것이 오너일가와 반토의 지휘가 아니라(반토들은 재벌해체와 함께 추방되었다. 그들이 있으면재벌 가족의 복귀가 용이해지기 때문이다)아래로부터 올라온 경영자들의 자주적 결정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재벌계 기업집단이 형성되자 비재벌계기업들 사이에서도 비재벌계은행을 중심으로 기업집단이 형성되었고 그들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게 되었다.

  ‘모두가 함께 건너면 빨간 신호등이어도 겁나지 않는다라는 일본식 사고방식은 기업집단에 의해 경제 분야에서도 실현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산업에의 진출을 위해 함께 자본을 출자하거나 집단내 기업의 확장을 위해 서로 협조하여 보다 공격적인 경영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그것은 구재벌이 오너 일가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기에 비교적 안전 위주로 확장을 한 것과도 대조적이었다. 구재벌의 소유와 경영분리는 완벽하게 오너일가의 영향력을 차단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리인인 반토는 기업과 오너 가족사이의 조율에 많은 힘을 기울여야 했다. 그에 비하면 기업집단의 경우, 그러한 어려움은 없었기에 더 도전적일 수 있었다.

  한국의 재벌과 문어발식 경영도 비슷한 장점을 가진다. 만일 그들이 한 분야에만 충실했다면 우리 경제의 성장은 훨씬 뒤처졌을 것이다. 삼성이 사돈기업인 금성(LG)와의 불문율을 깨고 전자제품 회사에 뛰어든 것은 세계적 기업 삼성전자와 LG전자를 탄생시켰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삼성전자는 있지도 않았고 LG도 국내시장 독점에 안주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은 한 분야에서 경쟁을 유발해 각 기업의 성장을 촉진하게 된 것이다. 세계적 기업이 되는 길은 여러 가지이다. 문어발식 경영이 한국기업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었으니 이 또한 우리만의 방식이 아니겠는가? 물론 문어발식 경영을 무분별하게 하여 사라진 기업들도 있으니 만능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