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의 교훈 - ‘궁하면 통한다’ 창의적으로 일하라!
징기스칸과 그의 후손들이 세계정복을 벌이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유럽 원정대의 일행이었던 장교가 유럽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이 포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다름아닌 영국인이었던 것이다. 아니 몽골군에 영국인이 그것도 장교로 참전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그는 민족과 국가의 배신자인 것일까?
당시 몽골원정군에는 많은 이민족들이 참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인구가 수십만에 불과한 몽골이 단기간에 전세계 육지의 1/6에 해당되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쟁에 참가한 이민족부대는 최전방에서 일종의 화살받이 역할을 하여 순수몽골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이민족이라 할지라도 우수한 인재를 활용하는 것에도 몽골군은 적극적이었다. 징기스칸이 참모로서 거느리며 활용한 유명한 야율초재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유목민족으로서 농경민족의 체계적인 통치기술을 모르는 몽골족에게 야율초재와 같은 인재는 매우 유용한 존재였다. 몽골족의 세계정복 하면 뭔가 파괴적이고 살육적인 ‘피의 잔치’로만 여겨지기 쉽지만 그런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포로를 활용하여 전술에 이용하고 통치의 기술을 배우고 때로는 뛰어난 무기와 전술을 배우는 자세가 사상 최대의 제국 몽골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정복사업이 난관에 부딪였을 때마다 우수한 인재들은 창의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돌파하여 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극적이고 열린 자세는 어떻게 해서 가능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농경민족이 아니라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유목민은 생존에 대한 위협이 농경민에 비해 엄청나게 클 수 밖에 없다. 밭이나 논에 씨를 뿌려 그것을 수확하는 것처럼 안정된 식량공급의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눈이 내려 그것이 그대로 얼어버리는 경우 양들을 먹일 풀조차 구하기 어려워져 결국 가축이 떼죽음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당연히 유목민에게는 생사의 위기를 가져오게 된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이웃부족이나 농경민 마을을 습격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생존의 위협이 상시적으로 존재하는 곳에 상식이나 관습 체면치레 등이 큰 의미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하겠다.
반면 농경민족은 생존에 대한 위협이 적으니 자연스럽게 ‘상식’에 얽매여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능력이나 열정보다 나이나 지위에 의해 인간이 판단되고 사용되기 쉽다. 농경으로 거두어들인 식량을 어떻게 분배하는가가 관심이지 새로운 목초지를 개척하거나 그것을 위하여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유목민처럼 생존을 위한 도전과 창의적 사고는 큰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선출도 농경민족에게는 세습이 일반화되었지만 유목민족은 비록 세습이 이루어지더라도 모든 부족의 동의를 전제해야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 역시 능력 있는 지도자를 원하는가 아니면 사회의 안정이 우선인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며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차이를 극명히 드러내는 차이가 아닐 수 없다.
같은 농경민족이라도 우리와 일본은 또 다른 이유로 인해 달랐다. 일찍이 통일국가를 이루고 안정된 사회를 세운 우리는 사대주의에 의존하여 외부적인 침략도 어느 정도 차단하였기 때문에 농경민족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일본은 외침은 적었으나 그에 비해 통일국가가 일찍이 붕괴되고 분열과 혼란의 역사가 길었기 때문에 농경민족이면서도 유목민족적인 특징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선비와 사무라이라는 양국의 지배층을 출현시켰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선비와 사무라이의 차이를 ‘전략적 사고‘와 ’대의명분적 사고‘로 구분하였다. 전략적 사고란 목적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모든 것을 집중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반면 대의명분적 사고는 옳고 그름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결과의 성패는 비교적 중시되지 않는다. 혈통이나 나이 사회적 관습 등이 우리에게는 중요하지만 일본에서는 훨씬 덜 중시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차이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양국의 근대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전략적 사고가 부족하니 외세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어 결국 식민지로 전락했고 반면 일본은 그것이 능숙하니 도리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제국주의국가로 발전하여 열강의 일원이 되었다. 그들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승리를 위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집중했고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명분은 제국주의시대에는 힘을 바탕으로 해야 통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일본은 사무라이들끼리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이미 그런 사고에 익숙하였기에 쉽게 제국주의시대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우리민족이 오늘날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세계적인 강대국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바로 전략적 사고를 장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한말 열강에게 유린당하면서 명분에 사로잡힌 것이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일제식민지 분단 한국전쟁으로 그러한 깨달음은 더욱 공고해졌다.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다는 의식이 민족의 내부에 팽배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한 의식이 잠재력을 끌어내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마치 몽골이 갑자기 팽창하여 세계적인 제국을 단시간에 수립한 것처럼.
잠재력의 폭발을 이끌어낸 것이 바로 지도자들이다. 그 정점에는 몽골은 징기스칸 우리에겐 박정희이 있었다. 현재 가장 뜨겁게 성장을 하는 중국의 경우에는 떵샤오핑이 대표적인 지도자라 할 것이다. 그가 말한 ’흑묘백묘론‘(검은 고양이든 힌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과 ’선부론‘에 의한 개방주의와 실용주의가 중국의 오늘늘 가져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명분에 사로잡혀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마오쩌퉁의 과오로 인해 떵샤오핑의 개혁은 더욱 빛난다. 징기스칸은 잠재력은 월등하지만 분열되어 큰 힘을 가지지 못한 몽골족의 힘을 모아 세계제국을 세웠고 박정희 역시 민족의 잠재력을 결집시켜 놀라운 결과를 이끌어낸 지도자였다.
박정희가 등장하면서 우리는 ’농경민족‘의 삶에서 ’유목민‘의 삶을 살게 되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무엇이 옳으냐”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라는 사고의 전환을 하게 된 것이다.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은 사실 박정희의 이러한 변화가 가져온 기적에 영향받은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박태준을 원했고 정주영을 닮고자 했다. “우리에겐 모든 것이 있다. 단 하나 없는 것이 정주영이다”라고 한 말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런 박정희가 실시한 정책 중에 그의 성향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이른바 ’가정의례준칙‘이라는 것이다. 국가가 가장 사적인 영역인 관혼상제에 개입하는 지극히 이례적인 사례이다. 그는 극도의 실용주의를 추구하였던 우리 민족이 관혼상제에 필요 이상의 힘과 재정을 쏟아붓는 것이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얼마나 피해를 주는지를 꿰뚫어 보았다. ’허례허식‘이라는 그이 말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허례허식‘은 농경민이 가진 악습이다. 마치 공무원이 능력에 의한 평가보다 아부나 줄 등에 의해 출세가 정해진다는 생각과 같다. 능력이 중시되지 않는 사회이니 남보다 더 관혼상제를 화려하게 치러 자신의 부와 세력을 과시하는 것이 중시된 것이다. 자주국방과 경제발전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자 한 박정희에게 이러한 ’허례허식‘은 용납할 수 없는 낭비였던 것이다. 마치 눈 앞에 적이 진을 치고 있는데 잔치를 벌이며 시간과 힘을 허비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잘못된 관행을 경제와 국방에 집중하고자 한 것이 바로 ’가정의례준칙‘인 것이다.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는 또 다시 허례허식으로 자신의 세와 부를 과시하는 습관을 부활시켜 버렸으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우리가 경제성장이 멈추고 내적으로 끊임없이 분열과 대립이 이어지는 것은 마치 조선시대나 구한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는 허례허식에 마음을 빼앗기고 오락이나 즐거움에만 몰두하는 사회풍토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주영의 삶은 유목민의 그것이었다. 안정된 삶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 현대그룹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만들어내어 우리 경제 발전에 기여한 거인인 것이다. 그는 작은 징기스칸이요 나폴레옹이었다. 실제로 정주영은 나폴레옹에 심취하여 그의 전기를 수없이 읽었다고 한다. 혁명으로 분열되고 망가진 조국 프랑스를 유럽의 패자로 만든 나폴레옹과 초원의 유목민집단인 몽골을 세계제국의 지배자로 만든 징기스칸과 비교해서 정주영의 업적은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근본적으로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세계를 누비는 영웅이 되었으니 말이다.
정주영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을 일군 것은 그가 체제의 중심에서 벗어난 아웃사이더였기 때문이다. 관습과 전통 편견 체면 등에 얽매여 상식과 절차 지위 순서에 따라 살아가는 이른바 인사이더들에 비해 그의 영혼은 자유로웠다. 박정희가 사범학교와 일본육사를 거치면서 체제내에서 일본의 전략적 사고를 익혔다면 그는 체제 밖에서 자유롭게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한 것이다. 남의 나라에서 이미 실용화된 기술을 도입하고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서 성공시키는 지극히 상식적인 방법으로 성공한 재벌들이 대부분이지만 정주영은 “길을 모르면 찾고 길이 없으면 만들어라”는 정신으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는 그가 인싸이더들의 세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혁신은 항상 아웃사이더의 몫이었다. 예수라는 청년이 기독교를 창시한 것은 그가 갈릴리라는 당시 이스라엘의 변방에서 하층민인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유대교의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파격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의 지지를 모았다. 형식과 관습에 얽매여 민중의 지지를 잃었던 유대교를 예수는 ‘사랑’ 하나면 된다는 지극히 간단명료한 가르침으로 정리하는 혁신으로 기독교라는 세계적 종교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 봐! 해 봤어”라는 그의 구호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을 보다 명료하게 정리한 것이다. 창의력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일을 하고 부딪히고 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난제를 만났을 때 정신의 집중이 가져오는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일상적인 삶만을 되풀이하는 사람이 창의력을 발휘한 경우가 있었는지 묻고 싶다. ‘한 번도 가 보지 않을 길’이라는 말이 요즘 유행하는데 그런 길을 가야 비로서 상식에 얽매이지 않은 창의적 사고가 발휘되는 것이다. 에디슨이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라고 한 것은 어려운 상황에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면서 비로서 영감이 나타나는 것이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멀뚱멀뚱 생각만 한다고 나타난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결국 “이봐! 해 봤어”는 끊임없이 도전을 해 온 정주영이 발견한 창의력의 비결을 나타낸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움직인다. 그러다가 문제에 부딪히면 생각한다. ‘궁하면 통한다’라는 말의 현실버전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궁한’ 상황을 만나야 통하게 된다. ‘궁한’ 상황은 해 보지 않으면 생기지 않으니 해 봐야 통한다는 것이 된다. 정주영의 창의력은 모두가 안 된다는 난문을 스스로 끌어안고 ‘궁한’ 상황을 만났을 때 발휘된 것이다. 그러니 상대에게도 해 봐 라는 “이 봐! 해 봤어”라는 말을 끊임없이 하며 ‘통’할 기회를 가지게 했다.
정주영이 창의력을 발휘한 경우를 살펴보면 이러한 이야기는 더욱 실감이 날 것이다. 남이 만들어 놓은 기술에 자금을 퍼부어 성공한 경우라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어느 분야에 선택과 집중을 할 것인가만 정할 정도의 창의력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정주영의 사업인생은 그러한 편안함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일단 그는 자금을 퍼부어 일을 이룰 정도의 자본이 없었기에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하나하나를 맨주먹으로 이루는 과정에서 자본을 가진 자본가가 된 것이다. 그러니 반도체 산업의 경우에는 막대한 자본을 퍼부어 성공을 이루는 비교적 편안한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것은 이미 그가 많은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둔 뒤의 일일 뿐이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라는 기독교 찬양이 있다. 이것은 원래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니 그의 은혜를 더 많이 받게 됨을 의미한다고 알고 있다. 물론 해석은 여러 가지지만. 정주영의 약함(기존의 자본가들과 같은 막대한 자본력이 없다는 의미)이 그의 잠재된 창의력을 폭발적으로 발휘하게 한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약함은 곧 강함이 된 셈이다. 정주영에게 종교는 없었지만 그는 종교적인 삶을 실천한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우리는 약함을 슬퍼만 해서는 안 된다. 그 약함이 있기에 도전을 하고 그러기에 우리 안에 있는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정주영은 그것을 가장 극대화시킨 위대한 인물이지만 그것이 정주영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세계역사를 보라. 잘 먹고 잘 사는 집에서 태어나 부모의 백업으로 대성공을 거둔 인물이 얼마나 될까? 문제는 그러한 처지를 한탄하고 인생을 낭비하는가 아니면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몸부림을 쳐서 그것을 이루는가의 차이이다. 정주영은 신도 슈퍼맨도 아니다. 그저 좀 더 열정과 힘이 넘치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그가 했는 일 우리가 못하라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정주영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우리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이 사실은 가능한 일임을 보인 것이다” 이것이 왜 가능했을까? 그것은 스스로를 ‘궁’하게 만들어 잠재력을 끌어내 ‘통’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쿠텐베르그가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은 그의 어머니가 성경을 갖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이루어드리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소망을 이루어 드리고 싶다는 ‘궁’이 금속활자라는 ‘통’을 가져온 것이다.
정주영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스스로 해 보니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궁’해져 결국엔 ‘통’하게 창의력이 발휘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사람이니 “이 봐! 해 봤어?”라는 명언이 나온 것이다. 명언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허용된 ‘눈물과 땀’의 결정인 것이다. 학자나 지식인들의 헛된 말보다 정주영의 ‘이 봐! 해 봤어?“가 우리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은 그것이 그의 ’눈물과 땀‘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정주영 공법’ ‘사력댐 건설’ ‘쥬베일 산업항만공사의 기적’ 심지어 고향을 떠나 기어코 서울에서 살고자 했던 도전 이 모든 것이 ’궁‘함을 이기기 위해 치열하게 사고한 결과물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행운은 절대 아닌 것이다. 상식에 얽매여 사는 삶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 아닌 결과’일 뿐인 것이다. 그 결과는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평소의 삶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도전하던 궤적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산물인 것이다.
“Boys, Be ambitious!”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일본 메이지 초기 홋카이도 농학교에 부임한 미국인 클라크 박사가 학생들에게 선포한 이 선언은 그 학교에서 일본 무교회주의의 선구자인 우치무라 간조를 비롯한 많은 인재를 배출하게 했다. 오늘날 우리의 소년소녀들은 야망을 가지고 있는가? 기껏해야 공무원 교사가 되어 편안한 삶을 꿈꾸는 그들에게 야망 따위는 사치일 뿐이다. 그러니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 아니라 ‘모두가 걸어간 길’을 가게 된다. ‘궁’ 하지 않으니 ‘통’하지도 않는다. 먹방 등을 비롯한 예능 프로에 몰입하여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것에 전부인 삶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사회는 그런 삶을 부지불식간에 권하고 있다. 한국사회가 정체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독수리 이야기로 마치겠다. 독수리가 병아리와 함께 길러지면 날지도 못하고 닭처럼 살아간다고 한다. 그는 날 줄 모르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그에게는 저 높은 창공을 날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능력을 힘을 깨닫게 해야 날아갈 것이다. 정주영은 ‘이 봐! 해 봤어?’로 모두의 능력을 힘을 깨우치려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위로하면서 계속 병아리 닭의 삶을 살도록 권한다. “꽃길만 걷게 하고 싶다”며 능력과 힘을 사장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 ‘꽃길’ 이 아니라 ‘가시밭’을 마다하지 않는 젊은들을 길러 ‘통’하는 기적을 맛보게 해야 한다. 우리 함께 외치자. “젊은이들이여! 해 봤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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