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민족지도자 정주영의 탄생 -‘산업보국’으로 완성된 그의 삶

닥터 양 2021. 2. 3. 05:31

민족지도자 정주영의 탄생 -‘산업보국으로 완성된 그의 삶

 

  ‘산업보국이 말이 정확히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후진국에서 기업들이 자주 이 말을 사용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그렇지만 특히 일본에서 과거에 이 말이 하나의 구호처럼 쓰여졌다. 후진국의 경우 경제발전이 경제력의 향상이라는 고유의 의미를 넘어서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국력의 발전의 일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부국강병경제를 발전시켜 군사력을 키워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 후진국들의 과제였고 경제를 담당하는 주체인 기업들은 자신들의 영역인 산업을 통해 국가의 은혜에 보답한다고 생각하였다.

  경제와 민족주의를 결부시킨 최초의 인물로서 프리드리히 리스트를 들 수 있다. 리스트는 영국이 산업혁명을 선도하면서 주장한 자유주의와 비교우위론에 의한 국제분업론에 대한 비판으로 민족주의 경제론을 제창하였다. 그것은 강력한 경제력을 갖춘 선진국 영국의 경제적 공세로부터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여 성장시킴으로써 영국과 경쟁할 수 있는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19세기 민족주의가 유럽에서 일어나는 상황에서 민족주의와 경제를 결합시킨 리스트의 주장은 후진국에서 크게 지지를 받아 오늘날까지 후진국 경제발전의 이론이 되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서구열강들이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으로도 세계를 압도하게 되면서 제국주의적 침략이 자행되게 되었다. 기계에 의한 상품의 대량생산은 더 많은 원료의 공급과 상품시장을 필요로 하였고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 서구열강은 이른바 포함외교를 통해 때론 협상으로 때론 무력시위와 침략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이루고자 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아프리카의 분할은 바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낳은 최대의 비극이었다 할 수 있다. 민족국가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아프리카가 마치 무주공산처럼 철저히 열강의 사냥감이 되어 조각조각 나뉘어져 지배되면서 고혈을 짜는 착취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특히 콩고에 대한 벨기에 레오폴드 국왕의 가혹한 착취는 같은 열강들사이에서도 비난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이러한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마수는 동아시아에도 뻗쳐졌고 이로 인해 동아시아국가들의 오랜 평화는 깨어지고 말았다. 1840년 아편전쟁을 통해 중국 대륙의 청나라의 문호를 개방한 열강은 1854년 미일화친조약으로 일본을 개방하고 이어서 일본의 힘을 빌려 1876년 강화도수호조약을 통해 은둔의 나라조선마저 세계무대에 데뷔하게 만들어 놓았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화 글로벌시대는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시작은 침략과 착취 학살 약탈로 점철된 비극적인 것이었다.

  서구열강의 침략에 동아시아국가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다. 유럽과 달리 민족주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던 동아시아에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대두되게 되었다. 원래 민족주의란 외부로부터의 압박이 들어올 때 성장하는 법이니까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개인이 사회 속에서 타인과 계속적인 접촉을 하면서 자아를 성장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륙의 중화국가를 중심으로 보편적인 이념에 의해 유지되었던 동아시아의 질서가 무너지고 한중일은 민족국가로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그것은 여지껏 평화롭게 유지되던 삼국의 관계가 새롭게 재편되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이 지역의 패권을 쥐고 동아시아의 질서를 유지하던 중화제국의 리더십은 더 이상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삼국 중에 가장 발 빠르게 변화에 적응하게 된 것이 일본이다. 일본은 300여개의 분권국가로 나뉘어져 사무라이라는 이름의 무사들이 지배하는 상태에서 개국을 맞이했다. 무사들의 우두머리라 할 에도막부(도쿠가와 막부)는 엄밀히 말하면 일본의 중앙정부는 아니었고 오랜 전쟁으로 혼란에 빠졌던 일본을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한 오야붕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개국으로 일본이라는 하나의 덩어리가 열강에게 침탈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막부는 중앙정부로서의 역할이라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강제로 입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역할을 하기에는 턱없이 무능하고 약했다. 결국 막부는 타도되고 새롭게 유신 정부가 전통의 권위를 수호하여 온 천황을 중심으로 수립되어 본격적인 민족국가 건설에 나서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메이지유신은 그렇게 세워진 유신정부가 실시한 일련의 근대민족국가 건설작업이다. 봉건제적 질서를 철폐하여 분권국가 일본은 중앙집권국가로 통합되었다. 일본인들은 이제 제후의 신민이 아니라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국가의 국민으로 거듭났다. 의무교육과 징병제로 더 이상 사적인 삶에 머무는 신민이 아니라 국가의 일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산분이 된 것이다.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유신정부는 군사력 강화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갖가지 개혁과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훗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 세계열강의 하나가 된 대일본제국의 탄생을 가져온 것이다.

  정부만이 일본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아니었다. 봉건제 철폐로 졸지에 실업자가 된 구 사무라이계급들은 그들이 갖는 명망과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새로운 일본의 건설에 매진하게 된다. 그들의 리더십으로 지주 상인 제조업자 등의 자본가들이 앞을 다투어 민족국가 일본의 건설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일본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원래 서양오랑캐를 무찌르고 일본을 지키자는 양이(攘夷)운동을 꿈꿨으나 결국 경제를 통해 애국하는 길이 최선이라는 생각에 경제발전의 최전선에서 자본가들에 대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500여개의 기업을 세우게 된다. 당시 일본에는 이러한 리더십을 가진 제2 3의 시부사와가 경제발전을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일본은 민간주도의 경제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와 더불어 경제분야에서 정부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축소되어 갔다. 제국주의열강과의 대립구도 속에서 일본정부는 경제발전을 이끌 여력이 부족했기에 민간의 주도하에서 발전하도록 장려하고 도와주는 역할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으니 민간의 이러한 움직임은 글자 그대로 복음과 같았다. 일본이 정부주도로 경제발전을 하게 되는 것은 1930년대 이후 전쟁이 이어지던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국민을 총동원하는 총력전쟁은 결국 정부가 경제에 전면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경제발전은 민간주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리스트의 독일과 마찬가지로 당시 일본도 경제활동은 단순한 경제영역의 것이 아니라 바로 애국과 민족주의의 영역이기도 했다. ’산업보국이라는 말이 그렇게 해서 일본기업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윤 추구라는 기업 본연의 목적은 때로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감춰지기도 하였다. 시부사와 역시 그의 기업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애국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서양의 위협에 이기는 길은 양이운동이 아니라 경제발전을 통해 국력을 키우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된 시부사와는 양이운동의 기백으로 경제활동에 전념하게 된 것이다. 이는 시부사와만이 아니라 많은 일본 경제인들이 가진 공통적 의식이었다.

  미츠비시(三菱)라는 기업은 당시의 일본기업 중에서도 특히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충실했다. 그들은 출발부터가 국가와 함께 호흡을 하면서 성장한 기업이었다.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는 하급무사출신으로서 메이지정부의 해운육성정책의 혜택을 누리면서 미츠비시해운을 성장시켰다. 그후 해운업이 전국적으로 통합되면서 손을 뗀 그는 군조선소인 나가사키(長崎)조선소를 불하받아 세운 미츠비시나가사키 조선소를 중심으로 미츠비시조선을 설립하게 된다. 미츠비시는 조선사업을 통해 중공업 재벌로 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국가의 군사적 경제적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미츠비시는 다른 재벌과 달리 국가의 정책에 부응하며 성장하였기에 민족주의 국가주의 색채가 강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미츠비시가 산업보국을 가장 강력하게 내세운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

  미츠비시재벌의 성립과 발전의 모습에서 정주영의 현대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필자만일까? 물론 현대는 미츠비시처럼 국가의 강력한 지원을 통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조선소 불하 같은 특혜를 통해 성장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조선 사업도 자동차 사업도 또한 건설의 발전도 국가적 필요성에 부응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미츠비시와 마찬가지로 애국과 민족주의적 성격이 다른 재벌에 비하여 강하게 나타났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대의 설립자 정주영이 애국이나 민족을 위해 기업을 시작했다는 근거는 찾기 힘들다. 그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자리잡고 살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농업으로는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기 어렵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쌀가게를 하고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면서 그가 애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찾아 볼 수 없다. 그저 식민지라는 특별한 환경에서 자신의 삶을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을 뿐이다. 그가 어머니를 모시고 총독부 앞에서 언젠가는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한 것은 그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는 부자가 목표였지 민족이나 국가를 위해 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사의 회오리바람은 그로 하여금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로서의 삶을 살게 하였다. 일제에 의해 두 번이나 사업을 강탈당한 사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 아울러 해외진출을 통해 국가와 민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 등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6. 25로 인해 국가와 더불어 성장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자신과 가족 회사의 발전만을 의식하였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훗날 그는 전쟁만 없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한국전쟁이 그에게 준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말해주고 있다. 국가가 잘못되면 모든 것이 허사라는 점을 깨달은 정주영에게 한국전쟁은 그의 마음에 애국애족의 정신을 어느 정도 심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를 뒤에서 격려하고 질책한 것이 바로 박정희였다. 그들의 만남은 엄청난 시너즈 효과를 가져왔다. 박정희는 정주영을 통해 그의 원대한 구상을 실현시켰고 정주영은 박정희의 구상에 공감하고 앞장서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민족과 국가라는 것에 사로잡힌 인물이었으니 그의 영향이 정주영의 민족주의 사상을 키웠던 것이다. 정주영 역시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스스로 확고한 민족주의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긍정적 의미의 정경유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환상의 듀엣으로서의.

  정주영이 그렇게 민족주의적 기업인이 되어 산업보국을 외치게 된 것은 그가 가난한 집의 장남이자 장손으로서의 책임감과도 관계가 깊다. 정주영의 가출은 결코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부모와 형제들을 서울로 데리고 와 그들의 삶을 책임지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에게 일신의 안위가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한 책임의식이 국가지도자와의 만남으로 국가적인 규모의 책임감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정주영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산업에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뛰어들었던 것이다. 조선사업도 그렇고 자동차 산업도 그렇고 무리라고 만류했지만 그는 기어코 해내고 말았는데 그것이 일신과 가족 회사의 번영만을 생각하는 기업인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훗날 정주영은 정치에 대한 분노와 회의로 대선에 출마하는 초강수를 두게 된다. 그는 정치가에 대한 반감을 곳곳에서 유감없이 쏟아내었다.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칭찬한 정치가가 박정희이다. 그만큼 둘의 관계는 좋았고 그것은 민족과 국가의 앞날만을 걱정하는 박정희의 태도에 정주영이 느낀 감동 때문일 것이다. 그 감동이 그에게 민족주의의 혼을 불어넣었고 기업인 정주영을 민족주의자 정주영으로 바꾸어 놓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발전에 대한 집념과..그 총명함과 철저한 실행력을 존경하고 흠모했다. 사심없이 나라만 생각하는 대통령을 도와 한 푼이라도 적은 예산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시키는 목표 외에는 나에게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박정희에 대한 정주영의 마음이었다. 박정희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 하겠다.

  정주영의 민족주의적 사고가 극렬하게 드러난 것은 자동차산업의 육성과정에서였다. 미국 자동차 회사의 조립공장으로서 편하게 사업을 하라는 압력에 대하여 정주영이 보여준 단호한 태도가 그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자동차를 잘 만들면 그 자동차가 돌아다니는 국기입니다. 내가 건설에서 번 돈을 다 들이고 실패한다고 해도 우리들이 자동차 공업을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디딤돌을 내가 몇 개 놓을 수 있다면 나는 실패해도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이러한 태도는 정주영이 이미 단순한 기업가가 아니라 민족의 지도자로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배불리 먹고 잘 살겠다고 서울로 올라온 그가 사업가를 넘어서 민족적 지도자가 되었고 그것이 그의 사업인생의 후반기를 장식했다는 사실을 이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기 하나 잘 살라고 그렇게는 못합니다. 애국심이 있으니까 가능한 것이죠. 자신을 위해서는 못하고 누군가의 도움이 되기 위해 합니다농가의 장손 정주영의 책임감이 가족을 넘어 민족과 국가로 확대되었고 그것이 그에게 보다 높은 이상을 향하게 했음을 이토록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그가 마음에 새겼던 격물치지(格物致知부딪히면서 깨닫게 된다)가 훌륭하게 실천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정주영이 인생의 후반기에 벌였던 각종 사업은 그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서산의 간척사업과 농장건설, 대북사업, 소련에 대한 관심 등은 이윤만을 추구하는 사업가에게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실행한 자원외교가 실은 정주영의 생각을 이어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정주영은 소련의 무한한 자원 특히 천연가스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활용하려고 애썼다. 그것이 단지 현대라는 재벌그룹의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1001마리의 소를 이끌고 휴전선을 넘어가는 최초의 민간인이 된 것도 그의 민족주의자로서의 모습을 극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하겠다. 그것은 전쟁으로 나라가 망가진 경험을 통해 얻은 평화주의자로서의 모습이었다. 현대가 대북사업으로 얻은 것이 정몽헌 회장의 죽음 뿐이라고 하면 지나칠지 모르나 오늘날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정주영의 뜻이 남북화해와 통일에 있었다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곧 민족주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치가는 물론 경제인들도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전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웃나라 일본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제국주의의 침략위협에 맞서고자 정치가도 기업인도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뭉쳐야 했기 때문이다. ‘산업보국은 그렇게 한중일의 경제인들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본에 시부사와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정주영이 있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비록 정주영이 시부사와처럼 처음부터 애국을 목적으로 기업을 일으킨 것은 아니나 궁극적으로는 그 역시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업활동을 자신의 생의 목표로 삼게 된 점에서는 시부사와에 뒤지지 않는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고 생각한다. 시부사와가 일본자본주의의 아버지라면 정주영도 한국경제의 지도자정도의 평가는 받아도 되지 않을가 싶다.

  하지만 오늘날 한일 양국은 시부사와도 정주영도 잊혀진 채 기업의 이윤과 기업가의 부귀영화만이 중시되고 있는 풍토에 젖어버린 느낌이다. 민족과 국가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을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으로 치부하고 이른바 욜로라는 이름으로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버린 것 같다. 과거의 역사를 모르는 젊은이들은 오늘날의 번영이 결코 민족과 국가를 앞세운 기업가들의 헌신적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사실에 그다지 동의하는 것 같지 않다. 오로지 내 가족과 자신의 행복에만 몰두하는 현실이 염려스럽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하지만 세계는 겉보기와는 달리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치열한 경제전쟁을 치루고 있다. 세계화니 글로벌 시대니 하여도 여전히 국가와 국경은 견고히 유지되고 있다. “경제에는 국경이 없지만 기업과 기업인에게는 국경이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확인된다. 삼성이 국제자본과의 싸움을 위해 애국심을 주주들에게 호소한 것은 그것을 상징한다. 국가와 민족이 망한다면 우리는 또 다시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주영의 산업보국정신은 결코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이 아님을 상기해 보자. 일본에서 시부사와가 다시 각광을 받는 것처럼 우리는 정주영의 정신을 되새기고 이를 교훈삼아 미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 태어난우리의 사명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 백범 김구 선생이 민족주의를 제일로 내세운 것은 결코 폐쇄적 민족주의를 통해 침략과 착취를 일삼는 나라가 되기를 바래서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민족주의를 통해 우리가 강성해지고 문화대국이 되어 세계와 인류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정주영의 민족주의도 다르지 않고 박정희의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국민교육헌장의 서두에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민족의 힘을 키워 인류공영에 이바지하자는 것이 국민교육헌장이 지향하는 목표인 것이다. 김구선생이 문화국가가 되어 세계에 우리의 훌륭한 문화를 전파하자는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위대한 지도자들의 뜻을 우리 세대가 받들어 대한민국의 국민이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인류에 공헌하는 미래를 다 함께 걸아 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