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효의 나라 대한민국의 사망선고

닥터 양 2021. 2. 1. 02:08

효의 나라 대한민국의 사망선고

 

  1970년대 대한민국을 아는 서양인들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며느리는 한국여성으로 삼고 싶다라고. 물론 이 말은 한국여성의 외모가 출중하거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은 고도의 화장술과 성형술 그리고 건강의 향상으로 우리 여성들의 외모도 서양여성 뺨칠 정도로 훌륭해졌지만 당시는 국제적으로 볼 때 그렇게 볼품있지 않았다. 능력은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시대니 발휘할 기회도 거의 없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여성의 국제적 가치가 높았던 것은 오직 하나 그녀들의 효심 때문이었다. 오늘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다. 40억짜리 아파트를 가진 부모가 아들 며느리에게 결혼과 동시에 동거를 요구하였는데 이에 대한 네티즌의 반응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그 동거가 40억의 아파트를 언젠가 물려주는 호조건임에도 그렇다면 요즘 세대가 얼마나 부모 모시기를 꺼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70년대에는 부모를 모시는 것은 특히 장남과 맏며느리에게는 선택이 아닌 필수에 가까웠다. 필자도 장남이기에 언젠가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는 생각을 갖고 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사람들에겐 상상도 가지 않을 이야기다.

  놀라운 이야기는 더 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효에 관한 에피소드이다. 어떤 부부가 부모님을 팔도강산 유람을 시켜 드리고 싶어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심지어 부모님에 대한 지출마저 억제하며 살았는데 막상 돈이 모아졌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 통곡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 사람이 들으면 그게 실화냐?”라고 할 법하다. 또 한 가지는 어느 홀아버지를 모시는 아들 내외의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너희는 왜 허구헌 날 콩나물국 아니며 나물국만 주냐? 언제 한번 고깃국 먹어 보겠냐?”라고 아들 내외를 호통친다. 요즘 같으면 인터넷에서 갑질이라는 댓글이 도배를 할 이야기다. “아니 모시는 것만 해도 어딘데 뭐가 어째?”라고. 하지만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필자는 이 이야기를 당연하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아 안타깝다. 돈이 없으니까 효도도 하기 어렵구나. 난 돈을 많이 벌어 효도를 제대로 해야지라고.

  물론 이런 수준의 효도를 오늘날 기대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필자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효가 며느리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부인하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자신의 부모와는 결혼과 더불어 반은 생이별을 하다시피 하며 시부모만 모셔야 했던 여성들의 서러움을 모르는 바가 절대 아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효도의 모습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처럼 우리는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라는 이유로 자식이 부모의 집을 방문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에는 도저히 수긍하기 어렵다. 요즘 자식들이 수시로 부모를 방문해서 효도를 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 것이다. 그나마 1년에 두 번 추석과 설에 찾아가는 것도 하기 싫어 이 핑계 저 핑계로 피하고자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일부러 명절에 근무를 자원해서 기피하는 사람들조차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밖에서 만나 식당 같은 공개된 장소에서 식사를 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만나 함께 가정식을 나누는 것이 과연 금해야 할 일인지 묻고 싶다. 필자는 12녀의 자녀를 키웠고 지금은 결혼하여 분가를 했지만 만일 한 집에서 살았다면 따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주민등록을 함께 하는 가족은 허용된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른 것인지 묻고 싶다. 그렇다면 위장전입이라도 해서 모일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인가? 문제는 다섯 이상이 모이는 것이지 주민등록은 아닐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번 조치는 대한민국이 더 이상 효의 나라가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라 하겠다. 지금도 지난 추석때도 불효자는 옵니다라는 해괴망칙한 주장으로 불효를 조장하더니 휴양지에는 예약이 가득 차는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다. 휴양지에 가서 놀면 되고 부모님을 뵈면 잘못이란 말인가? 휴양지에 간 사람들이 숙소에 틀어박혀 얌전히 놀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럴거라면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서 갈 이유가 없다. 5명이 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소리라는 말인가? 일부 캠핑장에서는 마스크도 쓰지 않고 온갖 위험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넘쳤지만 버젓히 영업을 하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괜찮은 것인가?

  엄연히 가치관의 문제이다. 부모를 만나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불필요한 일이지만 캠핑을 하고 휴양지를 찾는 것은 해야 할 일이라는 판단을 가져오는 가치관이 이와 같은 조치를 내리게 한 것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유달리 자식 사랑에 매달려 있는 대로 없는 대로 퍼주는 부모 덕에 고생하지 않고 사는 자식들이 효도에는 인색하다는 사실을 국가가 전면 공인해 준 것이 된 셈이 아닌가 싶다. “권리는 누리지만 효는 하지 마라라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세계제일의 저출산 국가가 된 것은 당연하다. 누가 이런 자식들을 낳아서 키우고 싶겠는가? 아마도 자신들이 가장 잘 아니까 비혼이니 뭐니 하며 결혼조차 기피하는 것이다.

  20여 년 전에 우연히 접한 통계가 필자를 놀라게 하였다. 한국과 일본, 미국 세 나라 중에 결혼하여 분가한 자식들이 부모를 찾아오는 횟수에 대한 당시 일본 후생성(우리의 보건복지부)생활백서에 나온 통계이다. 필자는 당연히 우리가 제일 빈번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들여다보았지만 놀랍게도 최저였다. 더욱 놀란 것은 효와는 인연이 먼 미국이 가장 그것도 일본과 우리의 2배 이상이라는 사실이다. 일본은 그렇다 쳐도 우리가 미국보다 효를 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놀랍기 그지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 놀라운 통계는 따로 있었다. 부모의 빈부와 자녀의 방문횟수와의 관계이다. 필자의 상식으로는 가난한 부모일수록 더 찾아뵙고 부유한 부모라면 좀 소홀히 하겠지 라는 것인데 결과는 반대였다. 부유한 부모는 자주 뵙고 가난한 부모는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필자 자신은 부모님이 제법 사시기 때문에 소홀히 대한 것을 지금도 자책해야 하는 처지이다. 물론 이것도 잘못이다. 부모님이 자식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결코 돈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변명 같지만 부모님께서 가난하게 사셨다면 훨씬 더 자주 찾아뵈었을 것이고 심지어 모시고 사는 것도 생각했을 것이다. 어렵게 사는 부모야말로 더 보살펴 드려야 할 분들이 아닌가 확신하는데 어떨까?

  서양사람들이 우리처럼 보이는 효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들은 사회복지제도를 통해 우리보다 훨씬 나은 노후를 보내게 해 드리고 있으니 개인적 효 대신 사회적 효를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지하철 무임승차조차 없애라고 젊은이들이 주장하고 청년주택이니 뭐니 하며 젊은이들에게 국가가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나라이니 사회적 효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개인적 효마저 부정된다면 이 나라의 노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인가? 일부 넉넉한 노인들의 화려한(?) 노후를 강조하면서 빈곤에 시달리는 노인들을 박대하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가 아니던가?

  노인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언제까지 유지할 셈인가? 그 이유의 태반이 경제적 이유란다. ‘먹고 살기 어려워효도 못 한다는 말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오지만 1970년대 우리의 효를 세계가 부러워하던 시대에는 지금보다 먹고 살기훨씬 좋은 시대였던가? 1978년 국민 소득 1천 달러 시대가 열렸고 지금은 3만달러시대이다. 단순 계산해서 30배이지만 물가를 감안해도 5,6배는 될 것 같다. 거지가 득실대고 굶어 죽는 사람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자가용은커녕 자기집도 없는 사람이 태반인 시대에도 효를 챙길 수 있었던 것은 효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가 효의 가치를 강조했기 때문인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국가가 나서서 효를 하지 말라는 조치를 하고 있으니 한숨이 나올 뿐이다.

  심청이처럼 생명을 버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소리를 할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다. 아니 70년대처럼 부모님에게 팔도강산 유람을 시켜 드리기 위해 내핍생활을 하라는 말도 하지 않겠다. 문제는 자신들을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최소한 고마움과 사랑의 마음으로 효를 실천해 주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하는 것이다.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자신들도 자식을 데리고 있을 것이다. 자식을 아끼는 마음을 생각한다면 자신들의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자식이 떨어져 산다면 보고 싶고 그래서 만나고 싶지 않을까? 그렇다면 역지사지로 생각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인간은 해야 할 일을 해야 비로소 인간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 ‘하고 싶은 일만 한다면 금수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이성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하고 싶어하는 일이다. 하지만 부모에게 효를 하는 것은 해야 할 일이다. 국민의 4대 의무를 하지 않는 사람은 처벌 여부를 떠나 비난받아 마땅하다. 효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거처럼 엄청난 효는 기대하지도 않고 그것이 꼭 바람직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인간적인 범위 내에서 자신을 낳고 길러준 부모에 대한 도리로서의 효는 해 주었으면 한다. “나는 자식에게 효를 바라지 않는다라고?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지만 부모님은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잊지 말라.

  정부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들이 이번 조치를 한 것은 국민의 건강을 염려해서인지 아니면 그것을 하지 않아 확진자가 늘 경우 받을 비난이 무서워서인지는 모르겠다. 이번 조치는 효를 기피하는 대다수의 국민에게는 매우 환영받을 수 있는 것임을 필자는 안다. 아니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가? 국민의 지지도 받고 확진자 증가에 대한 책임도 피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필자의 심보가 고약한 것일까?

  하지만 설은 아직도 10일 이상 남아 있다. 일 주 일정도 경과를 보고 다시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완화를 고려했다고 하지 않는가? 1천 명이 넘던 확진자가 3,4백명대로 떨어졌으니 사태가 호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주일이 지나서 만일 더 상태가 좋아지면 완화를 고려해 주기 바란다. 그게 아니라면 휴양지 등 꼭 필요하지 않은 곳도 폐쇄하고 보다 철저한 방역에 힘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어떨까?

 그리고 또 한 가지를 묻고 싶다. 부모님을 뵙는 것이 꼭 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휴양지는 가도 좋은데 부모님을 뵙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만일 그렇게 생각하면 필자는 선언하고 싶다. ‘효도의 나라대한민국은 사망했노라고. 삼가 조의를 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