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마음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2)

닥터 양 2021. 1. 9. 14:16

마음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2)

 

  ‘식구 줄이기라는 말을 아시나요? 일본어를 직역해서 조금 생경할지 모릅니다.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 식구를 줄이는 것은 가족의 생존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도시로 가서 취업을 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식구줄이기는 주로 농촌에서 이루어진 과제입니다. 농토는 한정되어 있고 가족은 늘어나니 어떻게든 줄여야 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딸들을 시집보내는 것입니다. 딸이란 어차피 시집가면 남이라는 생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었고 그래서 일찍 시집을 보내서 식구 줄이기를 한 것이죠. 부잣집에 시집을 보낸다면 얻는 게 많으니 일석이조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시집보내는 것은 나은 편입니다. 기생집이나 창녀촌에 팔아 먹는 경우에 비하면 말이죠. 이래저래 딸은 가족에게 그리 사랑받는 존재는 아니었나 봅니다. 팔아 먹거거나 시집보내거나 하는 대상이니까요. 육체적 노동력이 중시되던 시절 딸은 아들에 비해 여러모로 평가절하되었던 것이죠.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영화를 기억하십니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 더욱 화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소설과 영화를 모두 보고 읽었습니다. 어느 쪽도 다 감동적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었는데 이 방식이 좋은 것 같습니다. 영화를 통해 이미지를 얻고 소설을 읽으면서 그것을 떠올리면 실감이 엄청나게 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은 어쩌면 식구 줄이기때문에 결혼을 했을지 모릅니다. 이탈리아인인 여주인공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탈리아에 진주한 점령군 미군 병사와 결혼을 했습니다. 전쟁으로 먹고살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미군병사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을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군들이 초콜릿이나 껌을 뿌리고 다닌 일이 있죠? 그런 모습으로 인해 미군은 풍요로움의 상징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미군과 결혼하면 저런 풍요로움을 마음껏 누릴 거야라고 여주인공은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가족들로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겠죠. 그냥 있으면 가족도 본인도 고생만 할텐데 결혼으로 미국에 가면 가족도 식구 줄이기로 숨통이 트이고 본인은 미국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미국으로 건너가 살기를 십수 년! 왕자님은 아니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남편 덕에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고 또 사랑하는 자녀들도 낳아 서민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여주인공인 인생은 순탄하게 보였습니다. 어느 날 찾아온 뜻 밖의 방문객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렇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죠.

  아이들과 남편이 며칠간 집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는 매우 희귀한 일이죠. 아이들과 아내가 집을 며칠 비우는 일이야 흔하지만 그 반대는 드물지 않습니까? 가족이 모두 가야 하는 순간 그녀는 운명적으로 혼자 집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자녀들이 생기고는 거의 처음으로 홀로 며칠간 집에 남아 있게 된 것이죠.

  그 순간 그가 찾아왔습니다. 예전에 ‘3일간의 사랑이라는 영화가 우리나라 관객들을 울렸는데 여기서도 ‘3일간의 사랑’(실제로는 4일이지만 상징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3일로 합니다)이 펼쳐집니다. 사람은 경험에 따라 감동이 다른 모양입니다. 제가 처음 ‘3일간의 사랑을 보았을 때는 아이는 물론 결혼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그다지 공감을 하기 어려웠는데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그 영화를 보니 정말 눈물이 쏟아지는데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주인공의 아이(사생아)가 다른 아이들과 축구를 하는데 너무 잘 해 다 따돌리는 장면에서 주인공이 좋아서 펄쩍 펄쩍 뛰는 모습을 보고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그 마음을 이해하니까요. 자식이 없을 때는 그저 그랬는데.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의 ‘3일간의 사랑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저는 여주인공과 비슷한 입장이었을지 모릅니다. 물론 그녀와 다른 점도 있습니다. 아마 여주인공은 제대로 된 사랑이나 연애도 하지 못한 채 결혼을 했지만 저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입장이라고 한 것은 아내와의 결혼이 사랑이 아니라 이 여주인공처럼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지만 마음 어딘가에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이 여주인공의 마음이 너무나 잘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뭐야 바람이나 피우고라며 비난을 했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비디오의 표면에 적힌 설명을 읽을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죠.

  둘은 서로에게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프리랜서 사진사로서 세상을 떠돌던 남자 주인공(클린트 이스트 우드)는 여성편력 또한 대단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가정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키우며 차분한 삶을 사는 여주인공은 그의 방랑벽을 깨버릴만큼의 매력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반면 착실하기만 남편에게 마음을 채우지 못하던 여주인공은 떠돌이 사진사의 파격적인 행보에 가슴이 설레였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상형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타고난 기질 그리고 살아온 환경과 인간관계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이상형이 태어납니다. 그 사람 내부에 쌓여있는 데이터가 이상형을 만들어내고 그런 이상형을 만날 때 내면의 울림 영혼의 소리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해주는 것 없이 말이죠. 우리는 이것을 첫 눈에 반했다고 하는데 눈만이 아니라 귀와 심장 모든 것이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여주인공의 가족이 돌아오면서 일단 일시정지버튼을 누르게 됩니다. 그렇게 된 상태에서 둘은 서로를 그리워합니다. 남자 주인공은 다시 그곳을 찾아 여자주인공에게 나랑 같이 떠납시다라고 눈빛으로 제안하지만 여자주인공은 이를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물론이고 자신도 그런 파격을 허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남편이나 자녀에 대한 의무나 책임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온 그녀의 삶이 그녀를 묶어 버린 것이죠.

  그렇게 서로의 마음에 남겨진 마음의 사랑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사랑의 진실은 그녀가 죽고 자녀들이 발견한 일기장에서 밝혀집니다. 자녀들은 처음에 엄마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딸은 이렇게 외칩니다. “정숙한 줄 알았던 우리 엄마가 차탈레부인이었다니라고. 차탈레 부인이라는 소설은 아시죠? 지금이라면 그다지 대수롭지 않을지 모르나 19세기에 나온 이 작품은 불륜을 그렸다는 이유로 판매금지까지 당했다고 합니다. 딸은 엄마의 그런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이렇게 외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둘은 죽어서 하나가 되었을까요? 남녀 주인공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지붕이 있는 다리로 유명)에 자신의 죽은 몸을 간직하게 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 생에 못 다한 인연 이 생에 못 다한 사랑을 그렇게 죽어서 이루었을까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죽음의 순간까지도 간직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절대. 다만 가슴에 묻어둘 뿐입니다. 이루어져야만 사랑이 아니고 그 사랑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마음의 사랑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두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도 상대와 함께 하고 싶어 그런 유언을 남긴 것이겠지요. 현대인들 특히 젊은이들은 이런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뭔가 느끼고 보고 받아야 성이 풀리는 그들이 이런 사랑을 이해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심지어 청승맞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압니다. 그 사랑의 행복을. 이루지 못해도 아니 이루지 못했기에 평생을 간직할 사랑으로 남은 그 사랑이 주는 설레임과 행복을 아는 사람은 압니다. 저는 묻고 싶네요. “어차피 결혼 못 했으니 실패 아니에요?” “사랑은 쟁취해야 해요라고 말한 사람들에게. “당신이 사랑을 알아?”라 고. 사람들은 사랑보다 결혼이나 행복에 관심이 더 큼니다. 그래서 사랑을 우습게 여기죠. 심지어 사랑이 밥 먹여주냐라는 말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모르고 사랑이 주는 행복도 모르고 살죠..알면 그렇게 못 할 겁니다. 다행히 그 맛(?)을 아는 사람이 적으니 그 행복도 아무나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