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의 미학(3) 사랑해서 미안합니다.
사랑은 권리일까요? 사랑하는 것은 의무일까요? 부부는 서로를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요? 또 사랑받을 권리를 갖고 있을까요?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의무일까요? 아니면 권리일까요? 양육권이라는 것은 과연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인가요? 소위 천륜을 법적으로 규제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요? 부모의 이혼이 자식과의 이혼으로 여겨져도 되는 것인가요?
갑작스러운 질문 공세에 당황하셨나요?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과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인간의 감정까지 권리와 의무로 규정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1970년대의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우리에겐 너무나 생소한 문제인 양육권다툼을 그렸습니다.
1980년대의 영화라고 기억되는 어느 작품에서는 이혼한 부부와 아이들 사이에서 생기는 면접권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혼 후 양육권을 가지지 못한 자녀에 대하여 아버지는 면접권이라는 알량한 권리만을 갖게 되어 제대로 아이들을 만나지도 못하게 되자 여장을 하여 자신의 자녀들에게 접근함으로써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늘리게 됩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정체가 들통나고 말죠. 그 때 아빠는 하소연을 합니다. “내가 왜 내 아이들을 마음대로 못 만나는냐”고. 영화는 부부의 재결합으로 끝나지만 혈연의 정을 법으로 제한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부부의 사랑은 정당한 권리일까요? 결혼이란 분명히 계약입니다. 결혼식에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사랑하고 아껴 주겠습니까?” 하는 물음에 모두가 ‘예’라고 답을 했으나 이는 도덕적 윤리적 약속이지 법적인 구속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의무이고 권리라면 예전 우리 조상님들은 잘못된 결혼을 한 것이죠. 결혼하는 날까지 신랑 신부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사이인데 결혼식이 무슨 마법의 지팡이도 아니건만 갑자기 없던 사랑이 생길 리도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짝사랑’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의무도 없음은 더더구나 명백할 것입니다. 의무가 없으니 자유로우나 권리가 없으니 누릴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있다면 마음의 사랑을 통한 마음의 행복 뿐이겠지요. 하지만 이마저 상대가 불편해 하면 누리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물론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시치만 떼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보아의 2집 앨범에 실린 ‘늘(Waiting)’은 짝사랑하는 사람의 그런 입장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압권은 “나 알고 있어요 내가 그대에게 마지막 한 가지 해줄 수 있는 것이 이별뿐이라는 것 이제서야 깨달은 나의 모자란 사랑을 용서해줘요 사랑해요 여전히 감사해요 사랑해요 이 말이 하고 싶었죠”라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고작 이별이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별뿐이라면?
더구나 주인공은 “이제서야 깨달은 나의 모자란 사랑을 용서해줘요”라고 사과까지 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속된 말로 ‘빵 터져’ 버렸습니다. (적절한 말인가요?) 저로 하여금 보아의 팬이 되게 한 노래는 ‘넘버원’도 아니고 ‘마이지니’도 아니고 바로 이 노래 ‘늘’이었습니다. 그것을 결정적으로 한 것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진짜 사랑한다면 상대가 자신의 사랑으로 불편해 하는 것을 좀 더 빨리 깨닫고 물러나야 했다는 것이죠. 이 정도면 아름답다 못해 숭고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짝사랑을 그저 쌍방형사랑으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기로 보는 사람이라면 절대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거지 같은 사랑 이 바보 같은 사랑” 이라고 하며 상대를 원망하는 사람들 “그대만 행복하면 되는 건가요?”(곡명미상)라며 상대의 행복마저 질투하는 그런 마음이 짝사랑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심정이 아닐까요? 마치 자신의 사랑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상대의 잘못이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줘야 하는 것 같은 태도를 당연시하고 있습니다. 왜요? 왜 그래야 합니까? “한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설 수 없는 사람아”(‘애모’에서)라는 구절에서는 어떤 오만함마저 느껴집니다. 사랑이 무슨 권리입니까? 내가 사랑하니 너는 당연히 알아줘야 하고 받아줘야 하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스토커를 옹호하는 듯한 가사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짝사랑을 수도 없이 했지만 이런 식의 생각에는 거부감을 느낌니다. 짝사랑이란 어차피 허가 없이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아닌가는 전적으로 상대의 의사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왜 상대를 원망하고 심지어 비난까지 합니까? 이것은 ‘짝사랑의 미학’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겠지요. “그대만 행복하면 되는 건가요?”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저주하는 듯한 이 가사는 철저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나타냅니다. 왜 상대가 자신과 관계없이 행복하면 안 되는 겁니까? 무슨 권리로 이런 말을 합니까?
그런 점에서 ‘늘’은 저의 ‘짝사랑의 미학’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하게 만들었습니다. ‘아하 상대가 불편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도 결국 나의 사랑이 모자라다는 의미이구나. 그것은 바로 상대를 괴롭히는 것이니 해서는 안 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짝사랑 노래가 자기중심의 푸념과 원망을 늘어놓는데 비해 이 노래는 자신의 모자란 사랑을 탓하고 있으니 짝사랑의 달인을 자부하는 저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곡을 만든 사람이 존경스럽다’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강타입니다. 제가 강타의 팬이 된 것도 바로 이 곡과 상록수 때문입니다. 승화된 사랑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잘 그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인 “사랑해요 여전히 감사해요 사랑해요 이 말이 하고 싶었죠”에서는 정말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랑해요”와 “감사해요” 그리고 “ 이 말이 하고 싶었죠”가 함께 어우러져 감동의 도가니에 저를 빠뜨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이별뿐이라는 슬픈 현실에서도 사랑을 하게 된 것을 감사할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을 훔쳤으니 책임져”라고 원망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감사가 나온다는 것은 사랑에 대한 엄청난 성숙이 따라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거지같은 사랑”이라며 원망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과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이 무렵 저는 마음의 사랑에 대한 정의를 만들어가고 있었기에 이 구절은 엄청난 도움을 주었습니다.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니 사랑을 하게 해 준 사람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에 무척이나 기뻐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받은 것은 고마워해도 사랑한 것은 고마워하지 않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기 마련인데 (이 거지 같은 사랑, 그대만 행복해도 되는 건가요 처럼)저는 사랑을 느끼게 해준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할 수 있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만난 이 구절은 제겐 천군만마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 내 생각이 틀린 게 아니었어’라고 확신했죠.
“지금인데 그대 앞인데 말해야 하는데 나의 마음을 오랜 시간 그대를 향한 길었던 내 기다림을 바보같죠 항상 그랬죠 그래야 했죠 그댈 위해서” 상대에 대한 짝사랑을 고백해야 하지만 그것을 하지 못한 것은 상대를 위한 배려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혹시 강타 자신의 아픈 경험을 그린 것일까요? “왜 날 잡지 않았나요 왜 아무것도 묻지 않았나요 그대 없는 내가 괜찮을 것 같나요” 원망하는 것 같이 보이는 이 구절 하지만 웬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어떠한 권리의식도 상대에 대한 비난과 저주의 느낌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이선희의 ‘인연’에 나오는 구절 “이 생에 못다한 사랑 이 생에 못다한 인연 먼길 돌아 다시 만나는 날 나를 놓지 말아요”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 구절은 언 듯 상대에게 자신을 잡아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저는 조금 달리 봅니다. 마치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말라는 부탁인지요”라는 개여울의 구절처럼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에 못 다한 사랑’이라는 말은 이미 이루어질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니까요. 앞에서도 “맺지 못 한 데도 후회하지 않죠.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에서 체념의 미학이 나타나고 있는데 새삼 요구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것도 사랑받는 것도 당연한 권리가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짝사랑은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사랑은 자판기처럼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면 저절로 나오는 상품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기쁨은 상대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짝사랑의 미학’은 사랑을 느끼게 해 준 상대에게 감사하게 하며 원망이나 권리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자신의 사랑을 거부하건 배척해도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것은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게 해 줘서 고마워. 너를 사랑해서 행복했어. 영원히 잊지 않을게“라고. 여러분은 이러한 ‘짝사랑의 미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마음의 사랑의 달인이라고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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