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사는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았다. -이낙연의 오해
“두 나라는 길게 보면 1500년의 교류역사가 있다. 불행한 역사는 50년도 안 된다. 김대중 대통령이 말씀하신 것처럼 50년도 되지 않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우호 협력의 역사가 훼손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2019년10월22일, 이낙연 총리)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 연설은 그러나 커다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낙연 총리는 한일관계의 악화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로 한일관계사를 아름답게 회고하고 있다. 1500년의 우호협력과 50년의 불행을 대비함으로써 마치 불행한 역사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고나 순간적인 불행이었음을 강조함으로써 ‘정상’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하는 듯 하다. 하지만 ‘불행한 역사’는 50년이 아니라 그보다 길었고 1500년의 ‘우호 협력의 역사’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는 역사적 사실에 무지하거나 애써 외면한 주장이다.
한일관계사에서 불행한 역사는 결코 5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존재하지는 않았다. 50년이란 계산은 아마 직접적인 불행만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일제강점기 36년과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침략 기간 7년 등을 합하면 50년 정도가 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며 일본이 우리 나라에게 침략적인 행위를 한 것이 도요토미의 침략과 일제강점기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50년이라는 숫자가 갖는 오류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일제강점기 36년은 그 이전에 펼쳐진 일본의 침략사를 통해 만들어진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1873년 일본조정에서 벌어진 ‘정한논쟁’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은 사실상 시작되었으며 1876년의 강화도조약은 구체적인 침략의 첫걸음이었다. 이후 34년간 일본은 갖가지 방법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적 행위를 자행하였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다. 그렇다면 그것만 합하여도 73년(적어도70년)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고대사를 들여다봐도 일본의 침략은 수없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신공황후신라정벌’의 역사는 그 자체로는 허구이지만 일본이 한반도에 끊임없이 침략의 손길을 뻗쳤다는 간접적인 증거는 될 수 있다. 광개토왕비에는 신라의 수도 금성을 포위한 일본군을 광개토왕의 군대 5만이 물리쳐 신라를 구원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교과서에도 기록될 정도로 유명한 사실이다. 멸망한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일본이 수많은 군선을 파견하여 벌어진 663년의 금강전투(백촌강전투)도 일본이 가진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중세에도 일본은 왜구라는 형태로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이어갔다. 왜구라 하면 해적을 말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도적들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이다. 그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한반도 남부를 돌아다니며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거대한 무리이기도 했다. 이성계 최영이 정규군을 이끌고 겨우 진압할 정도이니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침략과는 거리가 먼 우리 민족이 왜구 때문에 대마도 정벌에 나서야 했을까?
평화롭게 보이던 세월 역시 아름답게 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대폭적인 양보와 인내를 함으로써 가능했던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삼포를 열어 거주하게 하고 심지어 벼슬까지 내리며 그들을 달래면서 우리는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러한 호의가 때로는 그들에게 ‘권리’로 여겨져 ‘삼포 왜란’같은 ‘배은망덕’적인 행위조차 일어났다. 도요토미의 침략전쟁 이후의 전후처리조차 지나치게 관대했던 것도 일본을 자극하여 또 다른 침략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정도로 우리는 일본의 침략적 행위에 시달려 왔다.
그들은 오늘날 또다시 한반도에 대한 도발 행위를 일삼고 있다. 침략의 역사를 부인하고 심지어 미화하면서 –식민지근대화론 등-미일 동맹을 발판으로 한국에 대하여 강경노선을 펼쳐가고 있다. 경제제재는 이러한 일본의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결과일 뿐이며 나아가 그 시작에 불과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고대의 침략, 도요토미의 침략, 근대의 침략에 이은 제4의 침략-국가적 수준의 침략으로서-이 자행될 가능성은 결코 작지 않다. 그것이 과거와 같은 군사적인 정치적인 지배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해도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낙연 총리의 잘못된 역사 인식-아마 개인적인 것은 아닐 듯-은 자칫하면 또 다른 과오를 초래할 수 있다.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은 식민지지배 책임문제 등을 애매하게 함으로써 오늘날 한일관계의 악화를 가져온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일제강점이 국가적 성폭행을 동반한 강제결혼이라면 한일청구권협정은 미국에 의해 강요된 성급한 화해였다. 여기에는 양국의 국가지도자들의 잘못된 역사인식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식민지지배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일본, 일제강점기의 혜택을 누린 박정희 김종필 같은 친일주의자들은 역사문제를 무시한 성급한 화해를 필요로 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아무리 바빠도 실을 바늘허리에 매어 쓸 수는 없다”라고 했다. 1998년의 ‘오부치김대중선언’은 그 나름대로 큰 성과였지만-최초로 식민지지배에 대한 사죄를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이루어진 ‘성급한’ 화해였음이 드러났다. 일본 내에 존재하는 침략주의에 대한 철저한 청산 없이 진정한 한일화해는 있을 수 없음을 우리는 오늘날 똑똑히 보고 있는 셈이다. 눈앞의 이익에 매달려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놓친다면 언젠가 그것이 시한폭탄처럼 폭발할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부터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을 가져야 한다. 일본의 식민지지배는 결코 일시적인 일탈이 아니며 제국주의라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일본이 고대부터 갖고 있던 한반도 나아가 대륙에 대한 침략 욕구의 발현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이 역사를 망각하거나 무시한 것으로 인해 오늘의 도발을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같은 과오를 통해 또다시 1965년의 성급한 화해라는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1500년의 평화와 50년의 불행’이라는 잘못된 역사 인식은 한일관계사 2000년에 담겨진 많은 교훈을 무시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한일관계를 열어가는 진정한 ‘화해’의 길이다. 영화 ‘밀양’에서 여주인공(전도연분)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이 면회시간에 기독교를 믿고 하나님에게 용서받았다는 말을 듣고 나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용서를 합니까”라고. 자식을 살해당한 피해자만이 가해자를 용서할 권리가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용서는 피해자만의 특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특권을 함부로 사용해서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용서를 받을 자격은 오직 하나 철저한 반성과 사죄 그리고 재발 방지에 대한 약속과 그것의 성실한 이행 뿐 임을 명심하자. 그리고 그것이 갖춰질 때까지 우리의 특권은 잠시 보류해야 할 것이다. 특권을 잘못 행사하면 ‘직권남용’으로 톡톡히 대가를 지불해야 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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