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완전한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것은 오직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에릭 리들)
여러분이 만일 주일 예배를 보아야 할 시간에 중요한 비즈니스 약속이 잡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상대에게 연락을 해서 조정을 해 보고자 시도할 수 있지만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하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이 약속을 지키면 수십억 아니 수백억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주일 예배 한번 빼먹는 거야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면 될 터이니 그대로 약속을 지켜 엄청난 이익을 취하고 그것의 십일조 아니 십에 이조 심지어 십의 5조라도 드린다면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니 눈 딱감고 한 번 만 주일을 범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유혹을 과감히 떨쳐 버리고 주일을 지킨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은 에릭 리들! 그는 당시 영국 올림픽 육상대표 선수 중 하나였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1924년 파리올림픽이 개최되던 시기였습니다. 에릭은 100미터와 200미터 400미터 등 다양한 종목에 출전하기로 하고 대표팀선수단의 일원으로 파리를 향해 떠났습니다. ‘금메달을 따서 조국에 바치리라’ 고 결심하며 부푼 가슴을 안고 조국 영국을 떠나 프랑스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주종목이며 가장 강력한 금메달 후보인 100미터 경기의 예선이 주일에 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에릭의 100미터 금메달은 거의 공식이라고 할 정도는 그는 그 종목의 최강자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우사인볼트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은 매우 괴로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신앙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팀 관계자들은 에릭이 어떤 선택을 할지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염려된 대로 100미터 경기 나아가 확실하게 보장된 올림픽 금메달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시절에는 프로스포츠가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아서 올림픽 금메달의 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컸기에 더욱 그 선택은 어리석게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영국의 황태자마저 에릭을 설득하려고 나섰으나 실패했습니다. 에릭의 결심은 너무도 단호하여 그 누구도 걲을 수 없었죠. 그로 인해 그는 ‘배신자’ ‘위선자’ 라는 비난에 직면했지만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종목을 포기하고 달린 다른 경기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00미터에서 그는 동메달을 획득하여 일단 여론의 분노를 잠재우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400미터 종목에서 놀랍게도 예상을 뒤엎고 금메달을 따내고 말았습니다. 100미터와 200미터는 같은 단거리라는 특징상 동메달 획득이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400미터는 100미터와는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경기라 두 종목을 함께 잘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실제로 올림픽에서 이 두 종목에서 동시에 메달을 딴 선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경기가 끝나고 비결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 200미터는 제 힘으로 달렸고 나머지 200미터는 하나님이 달리게 하셨습니다”라고. 100미터가 주종목이니만치 처음 200미터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지만 그 페이스대로 400미터를 완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에릭은 그것을 해냈고 그 비결은 하나님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100미터에서는 적수가 없는 에릭이 100미터 달리는 속도로 그대로 400미터를 달렸으니 우승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기적이었습니다.
‘배신자’ ‘위선자’라는 낙인은 완전히 사라지고 하루 아침에 그는 영국의 영웅이 되고 말았습니다. 많은 기자들이 그를 만나고자 했고 팬들이 그를 따라다닐 정도였습니다. 어디가나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면서 에릭은 최고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 그를 축하해 주려는 사람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룬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또 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스포츠 영웅으로 평생을 호의호식하면서 살 수 있었던 그가 모든 것을 던지고 중국에 선교사로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의 부모님이 이미 선교사로 중국에서 사역을 하고 계셨으니 자연스러운 결과라고도 할 수 있으나 그가 가진 위상과 인기를 고려하면 이것은 주일경기를 포기한 것보다 더한 무모한(?)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선택을 아무런 이의없이 받아들인 사람은 아마도 그의 부모님과 형제들 뿐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선택은 주일경기 포기처럼 그에게 비난을 안겨주는 대신 또 한 번의 찬사를 가져왔습니다. 그의 숭고한 정신을 사람들이 알아준 것이죠. 그의 명성은 지속되었기에 그가 안식년으로 귀국했을 때에도 성대한 환영식이 개최되었습니다.
하지만 육상선수로서의 화력한 경력과 달리 선교사로서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44세로 마감되었으며 그것도 일본이 강제로 수용시킨 외국인 수용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곳에서도 모든 수용자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그는 애니라는 소녀의 곁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화려한 삶의 끝은 결코 화려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에서도 에릭은 믿음을 조금도 저버리지 않고 지켰습니다. 심한 고통으로 울부짖던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애니..완전한 순종..“ 바로 이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 제가 이렇게 충성하며 살았는데 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는 원망을 쏟아내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그는 어린 소녀에게 유언처럼 순종을 가르친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가르친 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순종의 삶이었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해도 어떠한 고난이 와도 자신이 가진 것을 던져버리고 순종의 삶을 살았기에 그는 존경받을 신앙인이 되어 삶을 마친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라는 그의 말은 결코 공허한 슬로건이 아니라 완전하게 실천된 현실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식인으로서 살면서 늘 비판정신을 배워왔습니다. 지금도 비판정신이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지식은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동설이 지동설에 의해 뒤집어진 것도 가톨릭의 잘못된 가르침이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에게 뒤집어 진 것도 바로 그러한 합리적 의심 때문이며 이는 결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지 앟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천동설을 신봉하고 면죄부를 사며 죄를 용서받으려 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합리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음성으로 각종 계시로 우리에게 레마의 말씀을 주십니다. 에릭이 육상선수가 된 것도 주일 성수를 위해 100미터 예선을 포기한 것도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선교하러 간 것도 모두 그러한 레마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에릭처럼 주님께 얼마나 충실하게 순종을 하며 살고 계십니까? 자신에게 맞으면 순종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순종하는 편의주의와 타협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그렇게 살다가도 자신이 불행에 빠지면 ”왜 하나님 저에게 고난을 주시는 겁니까?“라며 하나님을 원망하신 일은 없으신지요. 물론 저에게는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순종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제가 마음에 드는 것만 순종하는 척했던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주님께 사명을 달라고 기도해지만 주님은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런 저런 일을 하게 하시어 경험을 쌓게 하신 것 같습니다. 이번엔 주님이 사명을 주신 것이라고 믿고 혼신을 다해 한 일들이 물거품처럼 실패로 끝날 때마다 저는 ‘희망고문’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저 여기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왜 결과가 이 모양입니까? 매일 열심히 주님께 기도했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저를 버리신 겁니까?“ 라는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완전한 순종이 아니라 선택적 순종을 해 온 것을. 주님은 그런 저에게 사명을 주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더 많은 고난으로 저를 연단하여 이제는 순종이라는 말이 제 마음 속에 각인되게 하신 겁니다. 모든 것을 잃고 더 이상 저의 인간적인 능력이나 노력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게 되어 주님에게 항복하고 순종하고자 하게 되었을 때 주님은 저에게 사명을 주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야 알겠느냐?’ 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네 주님. 이제야 저는 주님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선택적 순종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약 7개월간의 시간을 들여 얻은 결론은 바로 ‘완전한 순종’ ‘절대적 순종’이었습니다. 그것 역시 저의 용기나 믿음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어려움이나 실패를 겪을 때마다 주님은 저에게 길을 제시하셨고 저는 그것을 따라 온 것 뿐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실패를 거듭하면서 저는 자신감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방언 통변을 해 주신 분이 제 방언을 이렇게 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 왜 저는 실패만 계속해야 하나요?“라고.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시선’
흐르는 시간이 한숨만 남기고 반복된 실패 속 지쳐갈 때 내 맘의 소망이 눈물 조각될 때 내 곁에 다가와 부르시네
주님의 시선 나를 비추시고 상처 난 내 맘 만지시네 말씀하시고 회복케 하시네 주의 사랑이 다시 살게 하시네 (중략)
주를 봅니다 지금 이곳에서 주를 봅니다 지금 이곳에서 주를 봅니다 지금 이곳에서(중략)
주님의 시선 나를 비추시고 상처 난 내 맘 만지시네 말씀하시고 회복케 하시네 주의 사랑이 다시 살게 하시네
(이하 생략)
이 찬양을 식당에서 식사 중에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제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서요. ”반복된 실패 속 지쳐 갈 때 내 맘의 소망이 눈물 조각될 때“ 부분에서 거의 대성통곡을 하는 수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저를 위한 찬양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주님의 뜻을 알았으니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에게 실패는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께 완전한 순종을 하도록 하기 위한 연단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7개월의 기간은 그것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 주님과 함께 한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고민을 하고 계시다면 부디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반드시 선택적 순종이 아닌 완전한 순종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위해 인내하시며 기다리셨던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의 글이 여러분에게 그런 결단을 내리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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