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있음에 ‘새 이름’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사62장 2절)
‘그대 있음에’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서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그대 있음에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서 손 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랑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운 이여/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누군가가 소중하다는 것은 꼭 그 사람이 내게 현실적인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도리어 자신이 상대에게는 많은 것을 주고 있음에도 그것을 손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기쁨으로 여긴다면 상대가 자신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경우를 ‘호갱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과연 그럴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자 애씁니다. 가치가 있다는 것은 자신이 남들에게 그만큼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필요한 존재가 된다면 어떤 이익이 돌아올까요? 가장 현실적으로 말하면 생존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생존을 보장받을 가능성이 커집니다. 왜냐하면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그를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치가 없다고 여겨진다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적으니 그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것을 애석해 할 사람도 적어지고 그렇기에 그를 보호해 주려고 할 사람도 적을 겁니다. 이해가 되시겠지요?
그렇다면 그 가치는 무엇으로 결정될까요? 그것은 한 가지나 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있습니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은 경제적인 능력일 것입니다. 아니면 기술자나 경영인같이기업 활동에 큰 기여를 하는 사람들의 능력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십도 아마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누가 봐도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적인 것만이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얼굴이 예쁜 여자는 생존의 가능성이 큼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얼굴이 예쁜 것이 과연 무슨 실제적 가치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얼굴이 예쁘다고 경제능력이 좋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쁜 여자는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10분만 더 공부하면 마누라의 외모가 바뀐다.” 이것이 어디에 쓰여진 것인지 아시나요? 중학교 도서관입니다. 남학생들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연봉이 오르면 더 예쁜 아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농담반 진담반으로 쓴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쁜 여자는 자신의 능력과 관계없이 경제능력이 높은 남자랑 결혼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생존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생존이라는 것이 의미가 적어졌지만 조금만 과거로 올라가도 생존은 절실한 과제였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경제능력이 뛰어난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여자에게는 매우 절실한 꿈이었지요. 물론 오늘날에도 경제능력이 인기있는 신랑감의 중요한 조건이기는 하지만 그 차원이 다를 것입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이야기를 하지요. 오늘날에는 돈 많고 나이 많은 남자와 예쁘고 가난한 여자의 결합이 그다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이것은 매우 흔해지는 조합입니다. 조선시대쯤 되면 가난한 집 딸이 부잣집에 첩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그리 드물지 않았습니다. 가족의 삶을 위해 일종의 희생양이 된 것이죠. 그나마 그것은 나은 편입니다. 기생집이나 창녀촌에 팔려가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으니까요.
경제수준이 낮은 나라에서는 사람의 가치는 그야말로 형편없었기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인신매매입니다. 그 때문에 여자 특히 어린 딸들은 좋은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을 매개하고 돈을 챙기는 업자들도 제법 있을 정도였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상상이나 갈 일입니까? 자기 딸을 부잣집에 첩으로 보내고 돈을 챙긴다는 것이. 하지만 생존이 너무나 어려웠던 시절에는 그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강제적으로 팔리는 경우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는 여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김동인 선생의 ‘감자’라는 소설을 아시나요? 거기에 등장하는 복녀라는 여자는 20년 연상의 남자와 결혼했지만 경제능력이 없자 송충이를 잡는 알바를 하게 되는데 스스로 작업반장에게 성상납을 하고 편하게 지내며 더 많은 품삯을 챙깁니다. 그 후에 그것에 맛을 들인 복녀는 계속 성매매를 하다가 왕서방이라는 부자의 첩이 됩니다. 왕서방이 젊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자 질투 끝에 그를 살해하려다가 도리어 살해되며 복녀는 기구한 인생을 마칩니다.
스스로 더 나은 삶을 위해 돈과 힘이 있는 남자에게 접근하던 복녀의 모습이 제겐 낯설지 않습니다. 어려서 본 드라마의 단골주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남자의 여자가 되어 그의 사랑을 받는 젊은 여성과 그의 아내와의 갈등을 그린 드라마를 어려서 신물나게 보았습니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시지요? 당시에 돈 좀 있는 남자들은 두 집살림을 하는 일이 적지 않았으며 이 영화도 그러한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드라마는 1970년대 후반이 되면 사라지고 대신에 나타난 것이 호스티스 드라마였습니다. 여성이 몸 하나로 할 수 있는 호스티스라는 직업을 가지고 한 남자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구가하고자 하는 꿈을 그린 드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사회진출이 어려웠던 여성들이 그런 형태로 자립을 이루고자 몸부림치는 시대가 되면서 첩드라막 사라진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것은 1980년대에 ‘애마부인시리즈’로 더 한층 확고해집니다. 여성에게도 성에 대한 욕망을 채울 권리가 있다는 시대적 목소리를 반영한 애마부인 시리즈는 더 이상 남성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않겠다는 여성해방을 외치는 시대적 산물이 아닐까요?
그런 과정을 거쳐 나이 먹고 성공한 남자와 예쁘고 청순한 젊은 여자의 조합은 사라져 갔습니다. 2001년 ‘푸른 안개’라는 드라마에서 오랜 만에 그런 스토리가 전개되자 여론은 비난을 쏟아부었습니다. ‘역겹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마치 세상에 없던 것을 내놓은 것처럼 비난했지만 제게는 그것이 오히려 위화감을 주었지요. ‘뭐야? 예전에 그렇게 보던 드라마인데 왜 새삼스럽게 난리야?’라고.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옛날을 모르니 낯설고 나이 먹은 사람들은 잊어버렸던 것이지요. 군대 훈련소에 “너희들 중에 첩의 자식 있으면 손들어”하는 질문을 들었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 제가 비정상일까요?
엄마들이 왜 자식에게 그토록 헌신적일까요? 그것도 생존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에는 여자들이 사회생활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모집공고에 근거없이 ‘남성’이라고 제한을 가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대에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없었습니다. 그러니 가정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며 남편을 내조하는 것이 살아가는 가장 쉬운 길이었죠. 가자야 남자도 할 수 있다지만 아이를 낳는 것은 남자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고 육아도 한 때는 엄마가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졌기에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생존에 매우 유리한 조건이라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 시절에 엄마가 아이에게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가장 좋은 방법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듯이 우리는 ‘빵(밥)’으로만 살 수는 없는 존재들입니다. 사람이 자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돈이 없어도 몸이 아파서도 아니라 자신에게 어떠한 희망도 살아갈 의미도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삶은 고단합니다. 그 고단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자살충동을 막아주는 것이 희망이고 꿈이며 의미입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는 조금은 어처구니 없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떡볶이라는 것은 살아가는 재미를 상징하는 것이지 설마 떡볶이 때문에 살지는 않겠지요.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살아갈 의미나 보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재미있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떡볶이(살아갈 의미) 때문에라도 죽지 말아야지 한다면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때론 그 의미가 사람일수 있습니다. 아니 사람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목숨을 거는 것은 그녀가 희생정신이 투철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제일 탐욕스러운 여성도 자식에게는 희생적입니다. 그것은 자녀가 그만큼 자신에게 삶의 의미를 주기 때문이지요. 이혼을 할 때 자식만큼은 자신이 키우겠다고 우기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어리석은 선택일지 모르나 삶의 의미를 생각하면 이해가 됩니다. 설마 그녀가 ‘나중에 노후에 자식이 있으면 나를 부양해 줄거야’라는 계산에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물론 그런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대 있음에’라는 김남조 시인이 쓴 시를 아십니까? 이 시를 김순애작곡가가 곡을 부친 것이 가곡 ‘그대 있음에’입니다. 제가 이 노래를 원래 무척 좋아했는데 한때 무척 싫어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학교 가곡제에 참가했는데 이 노래를 부른 여학생이 1등을 했고 저는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노래 탓도 아닌데 웬지 이 노래가 미워졌습니다. 철이 없죠? 왜 그런 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노래의 주인공은 상대에게 뭔가를 받거나 하기 때문에 상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에 대한 사랑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의미를 상대에게 두게 되었고 그래서 ‘그대 있음에’ 자신의 삶이 있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들 중에도 그런 경험을 해 본 분들은 제법 있을 것입니다. 아무런 의미도 모른 채 살아가던 사람이 사랑을 만나게 되어 새롭게 세상을 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에게 상대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찰리 채플린이라는 세계적인 희극배우를 아시지요. 그에겐 36살에 만난 우나오닐이 그런 존재였습니다. “내가 우나오닐을 더 일찍 만났다면 그렇게 방황하며 살지 않았을 텐데” 그는 훗날 그렇게 회고합니다. 세 번의 결혼 세 번의 이혼을 거치면서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찰리 채플린에게 우나오닐은 구세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외모도 그저 그렇고 나이도 그의 반 쯤 밖에 안 되는 18살이었지만 아버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유진 오닐의 영향 때문인지 그녀는 외로운 사나이 찰리 채플린의 영혼을 위로해 주는 훌륭한 성품을 가진 모양입니다. 돈도 여자도 명예도 가질 만큼 가졌지만 채플린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는 겉은 평범하지만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진 우나오닐이었으니 우리가 새겨 보아야 할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이 진정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지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중국의 최고 고전 중의 하나인 삼국지를 읽어 보셨습니까? 중학교 2학년 때 집에 있던 삼국지를 (박종홍 선생편)읽은 것은 저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5권짜리를 2,3번 통독하고 다른 삼국지를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저는 삼국지에 푹 빠졌습니다.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과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과는 이야기를 나누지 말라고 하는데 이해가 갑니다.
삼국지는 정말 남자들의 의리를 부각시키는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물론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와 그에 따른 의형제의 우애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온통 그런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은 형제일수도 있지만 군신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의리가 군신관계에서는 충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은 이런 말 하면 욕먹기 딱 좋지만 과거에는 충분히 수용될 수 있는 말이었죠. 관우가 오관참장(5개의 관문을 통과하며 관문을 지키는 장수들을 몽땅 베어버린 사건)을 하면서 유비에 대한 의리를 지킨 것은 왜 일까요? 조자룡이 유비의 아들 유선과 부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이유는?
그들에게 유비는 꿈이며 희망이었고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골에서 훈장 노릇을 하던 관우는 사나이의 꿈을 펼칠 웅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차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유비는 그에게 더 할 나위 없는 보스였습니다. 관우는 한황실의 후예인 유비만큼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 인물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한실의 부흥’이라는 대의명분은 자신의 싸움이 너무나 고귀한 것이라고 여기게 만들었고 황실인 유비는 그것에 더 큰 가치를 준 것이죠. 조자룡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손찬을 섬기던 그는 공손찬의 졸렬한 모습에 실당했다가 유비의 인물됨에 반해 그의 삶을 유비에게 걸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리가 꼭 좋은 결과를 가지지는 않습니다. 히틀러에게 인생을 걸었던 사나이들에게 그것은 악몽일지 모릅니다. 괴벨스 괴링 히스 같은 나치스의 핵심인물들은 히틀러에게서 인생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그 결과가 엄청난 인류의 비극인 세계대전과 유대인학살이었습니다. 1995년 동경의 지하철에서 일어난 ‘사린 집단살해사건’을 아십니까? 옴진리교라는 사이비종교집단이 백주대낮에 벌인 이 사건은 아사하라 쇼코라는 교주와 그에게 인생을 걸었던 엘리트 청년들이 만들어낸 참담한 비극이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의미가 아니라 비극을 낳게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인생의 의미를 일깨워준 사람을 만났습니까? 아니면 지금 만나고 있습니까? 오늘의 필자는 한 분의 선생님으로 인해 그것을 찾았습니다. 자신에게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강조함으로써 깨우쳐준 선생님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필자는 고백합니다. 훌륭한 스승은 이토록 소중합니다.
저는 교사로서 살아오면서 그런 선생이 되고 싶었습니다. 제 인생에도 그런 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본에서 섬기던 교회의 목사님이었습니다. 이름은 아사야마 마사하루(朝山正治)라고 합니다. 그 분은 저를 알아주고 이해하신 분이었습니다. 여지껏 이렇게 저를 대하여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이끌어 내신 분이시기에 그 분에게 감사하는 바입니다. 그 분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스승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온 제자 중에 한국무용을 전공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간 제자가 있습니다. 제자라고 하지만 그녀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는 의문입니다. 분야가 워낙 달라서 실제적 도움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나눈 대화가 지금도 저에게 큰 힘이 되었고 그녀에게도 힘이 되었음을 확신합니다. 지금은 결혼도 하여 가정을 이루었고 그럼에도 자신의 길을 꿋꿋히 걸어가는 모습이 그저 대견하고 아름답습니다.
스티브잡스라는 거장도 그를 이해해준 선생님이 없었다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방황하던 그를 이해하고 이끌어준 여자 선생님이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아마 그녀에 의해 미래를 향해 달려갈 용기를 얻었을지 모릅니다. 괴짜를 알아보고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삼국지에도 현실에서도 그런 훌륭한 스승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상을 위해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의 제 삶에서는 그런 역할을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열리지 않는 미래에 좌절을 느낀 저에게 손을 내미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셨습니다. 친구도 부모도 자식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저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시고 위로해주시고 격려해주십니다. “네가 실패를 거듭한 것은 너로 하여금 세상에 취해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분이 저의 삶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만들어주신 오늘도 저는 나이를 잊고 소년처럼 꿈을 위해 달려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필자처럼 단점이 아니라 장점을 부각시켜주시는 스승이신 것입니다. 많은 스승을 모셨지만 하나님은 저에겐 최고의 스승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대 있음에’ 누군가는 삶의 의미를 갖게 되었는데 제겐 ‘하나 있음에’ 인생이 의미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찰리 채플린은 우나오닐을 만나 인생의 방황을 끝냈지만 제겐 그것이 하나님이시었음을 고백합니다. 필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버림받은 자’에서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신다’로 이름이 바뀐 것처럼 저도 ‘패배자’ ‘낙오자’에서 ‘사명자’로 인생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찾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도 바울이지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은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습니다. 그가 가진 지식이 180도 회전하여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될 때 위대한 사도 바울이 탄생한 것입니다. 노예상인 존 뉴튼은 하나님을 만나 탐욕스러운 삶을 경건의 삶으로 바꾸는 극적인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하나님은 큰 변화를 주셨습니다. 바로 의미있는 삶에 대한 열망을 느끼게 하신 것입니다. ‘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라는 주님의 음성이 저에게 들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간 저를 이끄시며 변화를 주신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 여정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과거의 저를 돌아보며 느끼는 놀라움을 미래에도 느낄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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