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이 일상화된 삶 ‘하나님 알아가기’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녀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복음 7장7절)
창세기에서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살던 시절의 인간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고 출산을 하는 고통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출산과 노동이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고통이 없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삶이 얼마나 편했을지 알 수 있는데 죽음도 없었다면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야말로 우리가 그리는 천국 바로 그것이죠.
그것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짓게 하였는데 그것이 매우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창세기 2장19-20절)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동물이 있는데 그것의 이름을 짓는 것은 초인적인 능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즉 이 때의 인간은 지금으로 치면 아이큐가 몇 천 정도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죠. 놀랍지요?
이런 인간이 어느 날부터 오늘날처럼 노동과 출산 그리고 죽음이라는 고통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게 되었습니다. 석가모니는 생로병사를 극복하고자 출가하여 수도를 하다가 해탈의 원리를 깨달았다고 하지만 그래봐야 대부분의 인간은(불교에 따르면)해탈은커녕 현실의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태어나지 않은 인간이 가장 행복하다”라고 할까요? 태어나지 않으면 인간이기나 하나요? 만일 그가 인간이라면 어디서 뭘 하며 지내는데 태어나지 않아도 인간취급을 받게 되는 건가요?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얼마나 삶이 고달프면 그런 말까지 할까 하는 점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중에서 출산은 인위적으로 기피할 수 있게 되었으니 빼더라도 노동과 죽음은 피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합니다. 노동도 부모님 잘 만나 놀고 먹고 살 수 있는 경우라면 피할 수 있으나 죽음은 도저히 피할 수 없겠지요. 노동을 한다는 것은 노동을 하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육체적 정신적 피로)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는 것에서 인간을 속박합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이 나왔죠. “다 먹자고 하는 짓인데”라는 말도 있고요. 로또를 사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것도(확률이 그렇게 낮아 99.9%는 땡인데도)노동을 하지 않고 살면서 자유롭게 삶을 꾸리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노동이란 삶에서 가장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남성들에게는 거의 숙명이죠. 로또당첨이나 재벌집 딸이라도 만나지 않는 한!
그들이 노동과 출산 죽음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다 아시다시피 선악과 사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을 용서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믿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데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아신 하나님은 그들이 어디까지 자신을 거역하고 죄악에 빠질지 심히 걱정되셨습니다. 이들이 죽음없이 영생하는 상태에서 계속 죄악을 저지른다면 천하가 어지러움에 빠지겠지요. 그래서 결국 죽음과 노동 출산의 벌을 주고 생명나무를 천사로 하여금 지키게 하여 영생을 막음으로써 그 위험을 최소화하려고 했죠.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타락상은 날로 더 해 갔고 결국 홍수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제외하고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노아의 홍수 뒤에도 인류는 노아의 가족들을 조상으로 계속 존재하게 되었지만 그로 인한 변화는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1,000년 가까이 살던 그들이 겨우 (?)120살 정도로 수명이 단축된 것입니다. 최근 창조론을 주장하는 창조과학자 김명현 선생은 이 점에 대하여 “홍수로 인해 지구의 거주환경이 악화되어 수명의 단축이 일어났다는 과학적 증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홍수는 결코 전설이나 신화가 아니라 사실임을 그는 증명하려고 하고 있으며 그것은 타당성이 매우 큼니다. 방주의 연구에 매달리던 조선공학자들이 그 안정성에 경악하여 집단으로 기독교도가 되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더 이상 홍수설화를 ‘썰’로만 여기시지 마시고 사실이라는 전제로 진지하게 검토하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선악과 사건은 인간에게 갖가지 재앙을 가져온 재앙이었습니다. 과일 하나 따 먹고 인간 전체의 삶을 대대손손 망가뜨리고 그것도 모자라 지옥의 고통까지 감수하게 될지도 모르게 된 것은 참으로 인류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흔히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 하지만 이것은 반쪽의 진실입니다. 먼저 먹은 것은 하와이며 아담은 그녀의 말을 잘 들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자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느니 뭐니 하면서 남성들에게 순종(?)을 강요하고 있으니 기가 막히죠. 남자건 여자건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의 말을 잘 듣되 어리석거나 사악한 사람의 말은 절대 듣지 말아야 합니다. 귀가 얇은 사람은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최근에는 인간이 잃은 것이 그것만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처럼 초능력을 발휘하는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가끔씩 듣습니다. 때론 자신이 그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런 경험이 많은 분들이 쓴 ‘간증’서적이나 방송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거나 의학으로 고치는 것이 불가능한 병이 하루아침에 말끔히 낫거나 망해가던 사업이 갑자기 번창하여 돈방석에 앉고 불가능해 보이던 취업이나 사랑이 이루어지는 등 기적의 리스트에는 끝이 없어 보입니다.
기적이 원래 인간의 능력안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육체적 고통과 죽음을 통해 그러한 능력을 회복시켰다고 합니다. “그가 재칙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라는 이사야 53장 5절 말씀은 그것을 증명한다고 합니다. 주님이 재칙을 맞아 살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맞음으로 우리는 질병에 걸리지 않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병에 걸리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 때문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기적은 원래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전에는 일상적인 것이었고 그것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이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경험한 이야기를 간증합니다. 저의 신앙의 멘토 손선미 선교사는 그런 인물 중 하나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데 자신은 2021년 12월부터 교회에서 월급을 받지 않기로 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지는 수입이 20일도 지나지 않아(월급날부터)월급보다 더 모였다고 합니다. 이른바 물권이라고 하는 능력 같은데 자신이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되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면 누구나 가능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믿어지시나요? 저도 믿기 어렵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니 믿어야겠지요. 아니 꼭 믿어서 저도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기적이 일상화되어야 합니다. ” 손선교사는 주장합니다. 어떻게? ‘믿음으로’ 성경에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라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이 중국에서 선교비를 끊고 선교단체에서도 탈퇴하라는 주님의 지시에 순종하자 중국의 형제자매들이 자신에게 그보다 더 많은 헌금을 해 주었다는 간증은 실로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저도 손 선교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여러 번 그런 경험을 했기에 원칙적으로 믿습니다. 수 천 만원의 빚이 하루아침에 해결되는 일 정도는 약과일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들 간증거리 하나 둘은 갖고 계시겠지요.
디민 그런 일이 기적이 아니라 일상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는 하지만 과연 그게 내게도 가능할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성경에는 각각에게 은사가 다르게 주어진다고 했으니까 과연 누구나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택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작은 기적만 가능한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그의 뜻 안에서 기적을 일으켜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필자는 그녀의 언니에게(동생이라고 번역했는데 일본어 번역에는 언니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판을 보니 언니가 더 맞을 가능성이 큰 것 같아요)기도를 권유받았을 때 자신이 신앙도 없고 교회도 다니지 않는데 그게 응답을 해 주실까 하는 의문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기적은 일어났고 문제는 해결되었음을 알게 되고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이 자매의 신앙을 위해 속히 응답하신 것 같습니다.
초신자일 때 도리어 응답이 빠르다는 말은 여기저기서 들었습니다. 저도 그랬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표적이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손선교사는 자신이 중국에서 선교할 때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표적을 보았다고 하며 그것은 그들이 순수함을 우리보다 더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표적이 더 필요한 신앙수준이기 때문이라고 해야 더 정답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는 부모님의 응답이 빠르게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야 아이가 부모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어 부모자식의 관계가 빠르게 형성될 수 있겠지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도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초신자의 연약한 믿음은 표적을 더 요구하게 되어 있겠지요.
하지만 기적이란 꼭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쩌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기적의 연속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가르침은 억지로 감사를 짜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써 평범하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기승전하나님으로 사고가 전환되면서 영적감수성의 안테나가 작동하여 범사에 감사하는 일이 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기적이라면 기적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눈을 못 뜬 채 사망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세끼의 식사가 순조롭게 제공되는 것도 세계전체를 관찰하면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 끼는커녕 한 끼도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가족이 있는 것도 기적입니다. 가족이 없이 혼자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이제 세대의 형태 중에 1인가족이 제일 비중이 높다고 하니 거짓말이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을 얼마나 의식하고 살고 있을까요? 아침에 일어나면 감사의 기도를 하기는 하고 식사 때마다 시기도를 하지만 또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잘 보낸 것을 감사하지만 얼마나 마음 속 깊은 감사를 누끼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모두가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감사를 모른 채 살아가기에 바쁘기에 불평과 불만이 넘치고 사랑이 식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식사가 가족이 잠이 너무나 소중해 그것이 제공되는 삶에 감사하며 살 수 있다면 꼭히 우리가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없더라도 우리의 삶은 기적이 일상화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아무리 기적 같은 기적이 일어나는 삶을 산다고 해도 스스로 만족을 모르면 불행할지 모릅니다.
이번 달부터 직장의 관계자에게 “월급을 받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십니다”라고 선언하고 월급을 거부하시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그런 믿음이 있으시다면 하십시오. 굳센 믿음이 생기거나 기도 하여 응답을 받으셨다면 꼭 하십시오. 그리고 간증하세요. 단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시는 것을 잊지 마시고. 할렐루야!
그러나 범사를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분의 기적으로 보고 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모든 게 감사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너무 고마워 제 삶이 기적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기도할 수 있어 감사 찬양할 수 있어 감사 주님의 사랑을 느낄 때 감사 이렇게 감사가 넘치며 그런 것들이 기적이 아니면 도저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왜 저 같은 죄인이 예수 믿고 거듭나서 구원을 받고 천국에 살게 되는 것인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유가 이해됩니까? “나는 당연히 구원받을 자격이 있지” 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아닙니다. 물론 확신은 갖고 있지요. 하지만 여전히 왜 나일까 하는 의문은 가지고 살아갑니다. 언젠가 그 답을 알 날이 오겠지요.
얼마 전 부흥회를 다녀왔습니다. 4회에 걸친 부흥회를 통해 은혜를 받았지만 그보다 그곳에서 마음껏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행복해서 감사했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바쁘다고 해서 또는 몰라서 참가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을 생각하면 감사할 일 아닙니까? 좋은 말씀과 축복기도 그리고 교제 등을 통해 얻은 기쁨은 물론이고요. 또 언제나처럼 어떤 기도응답을 받을까 설레이는 마음을 가진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 모두가 제겐 그저 기적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일상화된 삶’ 그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나의 삶을 바꾸고 그런 눈으로 귀로 삶의 하나하나를 접할 때 생기는 ‘또 하나의 기적’이 아닐까요? 여러분과 제가 그러한 ‘또 하나의 기적’을 항상 경험하며 살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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