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가 될 수 있는가?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만난 목사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입니다. 그 분은 그 교회에서 교육목사의 직분을 담당하고 계셨습니다. 어린이 선교회라는 단체의 지역 책임자를 맡고 있던 그 목사님은 저에게 주일학교 사역을 제대로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그것은 기술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어린이 사역에 대한 사명감이나 정신자세 등에 걸쳐서 제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 그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여기저기 교회를 옮겨 다니시며 사역을 하시면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 지를 느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란 변하기 쉽고 때로는 배신도 서슴지 않는 존재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이 공연히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사람을 함부로 믿으면 안 되고 다만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도 그 분은 열심히 사역을 하셨기에 유초등부를 제법 부흥시켰지만 교회의 방침이 바뀌면서 사모님이신 전도사님과 함께 어느 날 갑자기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이미 그 교회를 떠나 있었지만 아직 그 교회를 다니던 아이들에게 그 소식을 듣고 역시 사람을 믿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점에서 인간과 전혀 다르신 분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필자는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믿고 가다 보니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비유했습니다. 네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라간다는 것은 그것을 믿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 믿음이 결국 원하던 목적지를 편하게 가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면 크리스천의 목적지인 하나님 나라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할 것임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을 의심하듯이 하나님을 의심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고 하나님의 때와 우리의 때가 다를 때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분이시며 그분의 생각과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지혜로 판단하지만 그것은 애당초 우리의 판단 영역이 아닌 것입니다. 짐승이 우리 인간의 생각과 때를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생각과 때를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망각하고 어리석게도 판단하고자 합니다.
가장 훌륭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는 기도라고 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우리가 말씀과 기도 찬양을 통해 끊임없이 그 분과 교제하는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누군가 친해지고 교제를 통해 믿음이 커지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마치 수 십년을 함께 산 부부가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알고 이해하기 때문에 서로를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냥 수십 년을 같이 살면 그렇게 될까요?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관계를 깊게 하여 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자가 되어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란 자신을 믿기보다 부모를 혹은 신뢰할 만한 어른을 믿고 의지합니다. 자식을 키워보다 보면 그러한 모습을 종종 보고 감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저 아이가 이렇게 나를 믿고 따르는데 내가 제대로 부모 노릇을 해야 하지 않겠나’는 일종의 책임감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따른다면 하나님도 그런 책임감을 느끼시게 되지 않을까요?
그 어린 아이의 믿음은 갓난아이 때부터 쌓아 올린 관계의 열매일 것입니다. 갓난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기에 전적으로 부모에게 어른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그것이 배신으로 이어지지 않고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면 그 아이는 부모를 어른들을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상태일 때는 유지됩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면 점점 약해지게 되지요. 그래서 사춘기 아이들은 반항을 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인간과 달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오류가 없기에 우리의 반항은 무의미합니다. 인간의 부모는 불완전합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의 반항은 때론 아이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되기도 하기에 무조건 막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반항은 그런 가치도 의미도 없으니 그것을 계속하면 할수록 우리의 삶은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깊게 하면서 그분에 대하여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춘기 이전의 어린 아이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부모와 어른들의 현명함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우리의 어리석음과 하나님의 현명함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나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때를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바울처럼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저의 자아가 죽기를 기도합니다. 내 안에 성령님을 모시고 살면서 그분이 인도하심대로 순종하며 살기를 원한다는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그러한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저의 어리석음과 하나님의 지혜로우심을 인정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하지만 아직도 제 안에는 제가 너무나 많습니다. 마치 ‘가시나무’라는 노래처럼. 여러분도 자신안에 있는 자신이 너무 많아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함을 느끼십니까? 한낱 네비게이션에게도 전적으로 신뢰를 보내 따르는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를 전적으로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이 아니겠습니까? 네비게이션이라는 기게 가 하나님보다 우월하다고 믿으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하지만 그런 사실을 종종 잊고 마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세상의 지식 기계 그리고 사람의 능력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정너라는 말처럼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깊게 하여 그분의 크고 넓고 높고 깊은 사랑을 느끼고 창조주로서의 위대함을 인정할 때 믿음은 자연히 생겨나 우리 안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누군가와 친해져 신뢰를 얻기 위해 우리는 많은 시간과 노력 금전 등을 투자합니다. ‘사랑은 함께 한 시간만큼 깊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왜 거저 깊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제하고 싶어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하나님의 두 팔에 안겨 깊은 교제를 나누며 믿음을 키워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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