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주만 바라볼지라 “내가 했지 니가 했니?”

닥터 양 2021. 11. 3. 07:22

주만 바라볼지라 내가 했지 네가 했니?”

 

  ‘하나님이 하셨어요의 저자이자 찬양사역자 정경주 사모는 2002년 한일월드컵 한국과 미국의 경기에서 미국 국가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재미교포나 혼혈이 아니었으며 국적도 엄연한 한국이었으니 (남편이 미국인 목사이기는 하지만) 순수 토종 한국인입니다. 그런 그녀가 미국 국가를 그것도 한국에서 열리는 한국과의 경기에서 적이라 할 미국 국가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매스컴의 관심이 그녀에게 집중되었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그녀의 답은 간단하지만 매우 단호한 것이었지요.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이 하셨어요이 말은 그 후로 정경주 사모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늘 따라다니게 됩니다. 정경주 사모가 최초로 집필한 저서의 제목이 되기도 한 이 말은 결코 겸손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한 것이었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책을 적어도 세 번 이상 읽었는데 두 번째 읽을 때는 한창 은혜를 받던 시절이라 페이지마다 눈물로 적셔버렸다고 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어요라는 그녀의 고백은 곧 저의 고백이 되어 갔습니다.

  하나님은 불교 집안에서 자란 정경주 사모에게 찾아가시고 이끄셨습니다. 독일에서 유학하던 오빠를 따라 독일로 유학 가기 위해 맹렬히 독일어를 공부하던 그녀는 갑작스러운 병마로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 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어 공부의 부담이 적은 연세대학교 음대 성악과를 선택하게 됩니다. 지정곡 후보곡 70개 곡 중 69개를 연습하고 목이 피로해 하나만을 남겨 두었는데 놀랍게도 추첨에서 그 곡이 뽑혔습니다. 물론 제대로 부를 수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합격을 시켜주셨습니다. 대졸과 160센티 이상의 신장을 요구하는 스튜어디스 시험에서 (집안 형편의 악화로 휴학 후 응시)두 조건 모두 미달인데도 (신장 157)157) 합격하는 이변을 경험합니다. 미국에서 기독교 교육을 전공하고 돌아왔는데 숙명여대에서 영어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로 발탁됩니다. 전공도 다르고 게다가 박사학위도 없는데 말입니다. 비행기가 사고로 추락하게 되어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영문을 모르는기적이 일어나 살아났습니다.

  정경주 사모가 왜 하나님께 이토록 축복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보인 완전한 순종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자리에서 편하게 부귀를 누릴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아무런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순종했습니다. 그 잘 나가던 스튜어디스 자리도 대학교수의 자리도 모두 그녀에게는 그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그것이 더 이상 자신의 역할에 맞지 않게 되면 초개와 같이 버린 것입니다. 정경주 사모의 삶은 보기와 달리 화려하지도 사치스럽지도 않았지만 그럴 수 있었지만 스스로 박찬 것입니다 순종하기 위해- 그녀가 누린 행복은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것이었다고 믿습니다. 저 역시 그런 행복을 누리고 싶을 정도로.

  정경주 사모의 간증이 문학적이고 따듯한 것이라면 홍예숙 사모의 간증은 처절하고 가슴 아픈 것입니다. 물론 두 사람의 공통점은 온전한 순종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르다면 정경주 사모가 비록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비교적 순조롭게 삶을 살았던 것에 비해 홍예숙 사모는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된 체험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사람의 현재의 명성과도 관계가 있을지 모릅니다. 정경주 사모는 적어도 기독교 세계에서는 아이돌이나 명사처럼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하나님이 하셨어요도 잘 알려져 있지만 홍예숙 사모의 젓 나는 진실로 행복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찬양사역자이기에 인기를 먹고 산다는 점도 감안해야 하지만.

  임신한 사실을 모른 채 어머니가 복용한 독한 약으로 인해 장애를 안고 태어난 홍예숙 사모는 10살 때 기도원에 맡겨져 반쯤 고아 같은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놀라운 은사를 받게 됩니다. 무슨 병이든 손을 대면 낫는 치유의 은사입니다. 누군가는 지구 최강이라고 했지만 저는 우주최강’이 아닐까 합니다. 난다 긴다는 치유사역자들이 울고 갈 치유 능력에 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어요을 읽을 때 느꼈던 잔잔하고 따듯한 감동과는 결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을 이토록 잘 보여준 간증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그녀의 나이는 10-13살이었으니 어린아이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은 중학교에 다닐 나이에 미국을 누비며 부흥회를 인도하고 한 치유사역!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택함을 받았다고 해도 어린 소녀에 불과했기에 마음에 불안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한 병자 앞에서 내가 과연 치유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업습해 올 때마다 그녀는 아버지 저 자신 없어요. 도와 주세요라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걱정 마라. 내가 했지 네가 했니?‘”라고. ‘하나님이 하셨어요라는 정경주 사모의 고백을 업그레이드한 것 같은 이 말에 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물론 벅찬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역사하심을 가슴 시리게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전도사도 아닌 어린 소녀에게 일어난 일이니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증거인 것입니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아니 평범에도 못 미치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시면 위대한 인물로 거듭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어요’ ‘내가 했지 네가 했니라는 선포는 우리에게 그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할 수 있는 생생한 증언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택함받은 사람들 중에 잘난 사람이 있느냐고. 세상에서 지위나 명성 돈 학력 등이 힘을 발휘하는데 그 누구도 그러한 것을 가지지 못한 채 부름 받았다고. 그 이유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렇습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부름 받는다면 그들은 자신을 자랑하기에 급급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하셨어요가 아니라 제가 했습니다라는 자부심에 가득 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원래 좋은 조건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제법 여유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살았고 공부도 마음껏 했습니다. 집안의 지원으로 유학도 갔고 (학비나 생활비는 국비로 충당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하나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무지에서 오는 교만이었지만. 하지만 그 후로 바닥으로 떨어져 갔고 지금은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더 이상 나를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욥이 모든 것을 빼앗긴 상태와 같다고 할까요?

  그래서인지 욥기를 읽으면서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욥기를 찾아 읽었고 그것이 큰 힘과 격려가 되었습니다.. 욥기의 페이지를 하나하나 눈물로 적시며 읽고 나면 살아갈 용기가 솟아났습니다. 저를 감동시킨 것은 그가 받은 축복이 아니라 그가 고통 속에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왜 한국교회는 이런 보배를 무시하고 해피엔딩만 강조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욥기는 인간의 고난에 대한 복음적 성찰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오늘의 필자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고통에서 벗어난 일을 고백합니다. “그대가 이름을 부를 때 나는 내가 나인 게 너무 행복했죠라는 가사를 아시나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이라는 존재에 만족하고 그것을 행복하게 여기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요? 거의 없을 겁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아니 심지어 저주스럽게 느끼기조차 했습니다. 심지어 내가 남자라는 사실조차 싫었습니다. 이유는 제 삶이 그것에 맞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죠. 어렸을 때 여동생과 늘 비교되면서 너하고 재하고 바뀌었으면 좋을 텐데 라는말을 듣곤 하였는데 그것이 남자로서의 저를 미워하게 한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에 남자인 것도 제 자신인 것도 감사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변화의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사랑도 커지니 자신이 자신인 것이 행복한 겁니다. 서영은 님의 노래에서는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고 그가 자신을 사랑해주니 자신에 대한 사랑도 생겼지만 오늘 본문의 필자도 또 저 자신도 정경주 사모도 홍예숙 사모도 수많은 크리스천들도 아마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그러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은 그대로인데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택하시면 우리는 누구도 부럽지 않을 영웅도 되고 미남미녀도 되고 선한 사마리아인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적인 변화를 동반하기에 우리는 어느 날 너무나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겠지요.

  그토록 남자라는 것이 싫었던 저에게 남자라는 사실이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어떤 여성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여자라면 그녀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성성을 미워했던 저는 네가 여자였으면 어울렸을 거야 라는 말에 일종의 복수심을 가졌죠. ’ 그래 그게 좋다면 그렇게 해 주지 ‘‘ 라며 일부러라도 남성성을 억압하고 여성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죠- 남성성을 마음껏 뽐내려고 애썼습니다. 적어도 그녀 앞에서는. 마초를 싫어하는 저였지만 마치 마초 기질을 가진 남자인 양 행동하기조차 했죠.

  지금은 어떨까요? 하나님에게 더 사랑받고 싶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나님과 더 많이 교제하고자 몸부림칩니다. 전에 그녀를 사랑하던 시절 일할 때 공부할 때를 제외하면 24시간 그녀를 생각하고 그리워했듯이 지금 저에겐 하나님이 그런 존재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일할 때조차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다가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하나님께 누가 되니까요. 하지만 사모하는 마음이 넘치니 어쩔 수가 없네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아니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잘 아는 찬양 ’’ 주만 바라볼지라 가사처럼. 그러면 자신에 대하여 가졌던 열등감 무기력함이 사라집니다. 저는 이제 어떠한 어려움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를 바라보면 말도 안 되는 망상이지요. 하지만 제겐 최후의 무기가 있습니다. ’ 내겐 하나님이 계시다 ‘‘ 바로 이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데 누가 나를 막으랴! ”내가 너를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는데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욕되게 하리오.. 아무도 너를 만지지 못함은 내가 너를 사랑함이라 이라는찬양을 늘 떠올리며 살아갑니다. 이제 나는 죽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살아서 저를 인도하십니다. 그분이 ””네가 했니? 내가 했지 라고속삭이십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분의 능력을 믿고 귀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S. 삿포로 신학교 시험은 일단 불합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 도중에 포기하면 기회가 생기겠지만 ““ 저는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누군가 포기할 것을 기다리며 기도할 겁니다. 그분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주신 레마라고 생각하고. 여러분들도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