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사랑을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닥터 양 2021. 10. 31. 06:41

사랑을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사랑은 믿음 생활의 완성!

 

  다락방으로 큐티를 하면서 느낀 점 중의 하나는 외국인 특히 미국인들이 우리와 비교해 부부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부 일심동체’라는  말이 정작 우리보다 그들에게 더 잘 실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어느 미국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미국에서는 부부가 일심동체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부부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런 모습을 상대에게 보이면 이혼의 이유가 된다고 합니다. 유학생 기숙사에서 만난 한 일본인 여성은 미국 교수와 결혼해 살고 있는데 자신이 조금만 남편과 거리를 두려고 하면 상대가 위기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혼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과거에 한국 여성들은 남편에게 헌신적이었으나 다락방을 통해 미국의 부부의 모습을 들여다본 바로는 도리어 적어도 현재는 미국 아내들이 훨씬 더 헌신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다락방에 투고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니 그들이 모든 미국인들을 대표하는지는 조금 의심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한 기독교 계열의 방송에 나온 어느 분은 (아마 목사 사모라고 기억합니다) 남편이) 죽을병에 걸리자 자신이 편하고자 이혼을 요구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아직 남편이 목사님이 아니라 사모는 아니었지만 믿음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요구를 했다는 사실이 제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남편이 병석에서 제대로 거동을 못하는 중환자도 아니고 단지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죽으면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까 미리 헤어지자는 것이었으니 놀라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기주의의 극치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그녀도 자식의 병에 대하여는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모순은 바로 배우자에 대한 한국 여성들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락방에서 보이는 미국 여성들의 배우자에 대한 태도에서 우리는 부부니까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읽힙니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미국 사람들이 이렇게 헌신적일 수 있다는 것이 조금은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부부는 과연 그럴까요? 오해를 각오하고 말씀드리면 특히 아내들이 남편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자식에게는 희생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보이지만 남편에게는 냉정한 것이 현실이 아닐까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반드시 따라 나오는 반론이 있습니다. “한국 남편들은 아내에게 충실하지 않다라는 것이죠. 과연 미국 남편들은 더 충실할까요?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미국 남편들의 헌신적 모습을 보게 되지만 그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레이디 퍼스트라는 문화 때문에 아내를 소중히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미국인의 다수가 혼외정사를 죄로 여기지 않으며(특히 남성들) 가정) 폭력은 우리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입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딸과 근친상간을 하는 일이 마치 당연한 일처럼 여기는 경우도 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우리 같으면 상상이나 할 일입니까? 마약과 알코올 중독 등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들이 우리보다 훨씬 많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임을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남편들은 최소한 가져에 대한 책임감을 그들보다는 훨씬 소중히 여기고 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당에 가서 의자를 내주는 표면적 매너가 없다고 한국 남편들이 아내를 덜 사랑한다는 식의 편견은 이제 버립시다. 그렇게 말하면 이런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한국 남편이 무뚝뚝하다면 한국 아내들은 미국 아내들처럼 사랑이 표현에 적극적인가요?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 하시나요? 적어도 미국 아내들보다 훨씬 덜 하겠지요? 표현이 부족한 것은 한국 남편들이 유달리 무뚝뚝해서가 아니라 우리 문화의 일반적인 특징일 뿐입니다. 한국 여성들도 과거에는 얼마나 무뚝뚝했나요? 한낱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것을 이유로 한국 남편들의 아내 사랑을 매도하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나라 아내들이 남편에게 덜 헌신적이라면 그것은 남편의 필요성을 덜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결혼을 하면 자신의 원가족(부모님과 형제)과 거리를 두고 부부간의 유대관계에 집중하지만 우리는 어떨까요? 여전히 원가족과 밀착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여성들의 경우 친정과 거리 두기를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낳으면 모든 것이 자녀에게 집중되어 남편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녀가 장성하면 분리하도록 해야 하는데 여전히 자녀를 끼고돌며 살고 있지요. 게다가 친구 등에게 위로를 구하다 보니 남편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낮아집니다. 한 마디로 말해 한국의 아내들은 친정 자녀 친구에 과도하게 관심을 분산시키니 남편이 그다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죠.

  물론 한 가지는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것은 남편의 월급통장이겠지요? 예전의 아내들은 남편이 출근할 때 여보 일찍 돌아오세요라고 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지금은 그럴까요? “여보 늦게 들어와요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마음으로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럼 예전의 남편들은 돌아와 아이도 보고 가사도 함께 분담했나요?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도리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도 일찍 돌아오세요”라고” 한 것은 그만큼 부부관계의 비중이 컸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남편이 자녀 친정 친구 다음이 되었고 심지어 남편이 집에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할 정도로 그 비중이 작아진 것은 아닐지요. 농담이라고 믿고 싶지만 남편은 어디 멀리 가서 따로 살면서 월급만 잘 보내주다가 거액의 보험금을 남기고 일찍 죽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여러분! 사실이 아니겠지요? 농담이죠?

  이러한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유달리 한국 여성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부부관계에 집중하지 못하는 우리 문화가 아닐까 합니다. 결혼을 하면 독립하고 살아야 하는데 여전히 친정에 의존하고 또 자녀에게 지나치게 매달리는 문화 사고방식이 결국 부부의 유대관계 강화에 큰 해를 끼치고 있는 것이지요. 남편들에게는 시댁과의 거리두기를 강조하면서도 친정에 밀착해 있는 아내들의 생각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으며 자녀 중심의 사고는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으니 부부관계가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나만 좋으면 좋다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고를 버리거나 약화시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친정 자녀 친구에 집착하는 것은 남편에 비하여 책임이 덜하거나 본능적 욕구 때문입니다. 친정이나 친구는 한 관계니 부담이 덜 하고 자녀는 모성 본능이라는 본능을 느끼니 자연스럽게 집착합니다. 하지만 남편은? 결혼식에서 분명히 부부의 의무를 이행할 것을 약속했지만 애당초부터 의무를 제대로 의식하고 결혼하지 않으니 그저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필자의 글을 읽으면서 아내의 남편 사랑이 가슴에 와닿네요. 부부니까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식구조가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슬픔도 기쁨도 함께 하려고 결혼을 하지 기쁨은 함께 하지만 슬픔은 너나 가져라는 생각으로 결혼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요즘 결혼 풍토를 보면 왠지 그런 식의 편리주의적 사고가 엿보입니다.

  이른바 비혼이 늘어나는 것도 그렇기 때문이 아닐까요? 결혼을 하지 않는 거야 개인의 자유지만 그것이 결혼으로 인한 의무를 외면하고자 하는 사고에서 오는 것이라면 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그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을 겁니다. 상대방의 단물만 빨아먹고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한다면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사람들이 부부가 된 들 그들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만들어갈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인생에 좋은 일만 있다면 굳이 결혼을 할 필요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어려움도 괴로움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니 그때 나의 고통을 함께 할 파트너가 부부가 아닐까요? 그런데 상대가 어려움에 처하면 버리겠다고 생각하는데 부부가 결혼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상대에게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나도 상대에게 도움을 줄 각오가 있어야 그 관계가 건강한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갑을관계 이상이 될 수 있습니까? 서로를 이용해 먹겠다는 사람의 결합이 가정이라면 그것은 살아 있는 지옥이 될 것입니다.

  사랑은 종합 선물세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저는 여러 가지 과자가 들어 있는 종합 선물세트를 받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유치원을 졸업하던 날 그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개근상을 받은 것에 대한 부상으로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유치원을 다니던 아이들이 적어서인지 개근상에 대한 부상이 엄청났습니다. 50색짜리 크레파스, 12색짜리 색연필, 사진을 붙일 수 있는 빈 앨범, 연필세트 등등... 벌써...벌써 50년도 더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입니다. 해태제과의 과자 종합세트도 그중 하나입니다. 당시 가격으로 100100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차삯이 5원 정도 했으니 100원이면 큰돈이지요.. 종합 선물 세트에는 마음에 드는 과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것을 동생과 남김없이 다 먹었습니다. 우리 집은 그다지 가난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에는 골라 먹었지만.

  사랑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좋은 것만 골라 먹겠다는 마음으로 사랑을 한다면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사랑에 대하여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하나입니다. 바로 인내이지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모든 걸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어떻습니까?..”어떻습니까? 인내가 모든 것이 아닌가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영광을 누리려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하셨지요? 이 역시 인내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인내를 구닥다리로 여기고 참는 것은 의식의 부재라고 폄하하며 맛있는 과자만 먹고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빙자한 고도의 이기주의가 아닐까요? “너는 나에게 헌신해. 하지만 난 절대 안 해이렇게.

  남편에게만 그렇겠습니까? 부모는 어떻고요? 효도가 어렵습니까? 먹고살기 어려워서요? 그럼 과거에 우리 부모님들은 먹고살기 좋을 만큼 잘 살아서 효도를 했습니까? 1970년대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효도에 감동했다고 합니다. 그럼 1970년대에는 우리가 그렇게 잘 살아서 효도를 할 만큼 여유가 있었습니까? 아니면 효도를 할 마음이 사라져 자신의 행복에만 집중하니 부모님에게 드리는 것이 아까워서 그럴까요?

  외환위기에 우리는 금 모으기로 세계를 감동시켰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자영업자들이 거리두기의 희생양이 되어 고통을 겪는데 그들에게 지원을 하자고 하면 세금이 아깝다며 비난이 쏟아지네요. 그들이 거리두기를 제대로 안 지켰으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고 세금만 아까운 겁니까? 이웃에 대한 사랑은 실종되고 자신에게만 집중해 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닐까요? 그야말로 고도의 이기주의라 하겠지요. 오로지 ’ ‘나의 행복만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가치이며 목표가 된다면 그것이 믿는 자의 삶이 될까요?

  사랑은 로맨스와 동의어는 아닙니다. 로맨스는 사랑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거기에는 고난과 시련도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을 극복할 인내도 필수품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깨닫고 각오를 할 때 진정한 사랑이 꽃피는 것입니다. “어디 흔들리지 않고 핀 꽃이 있으랴는 시도 있지 않습니까? ‘어디 흔들리지 않고 피는 사랑이 있으랴 “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은 인내를 빼먹고 달콤함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사랑에 몰두할지라도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합니다. 병든 배우자를 함부로 버리는 부부가 아니라 함께 고통을 극복하는 부부가 되었으면 합니다. 부모에게 주는 것을 아끼며 혼자 잘 살겠다는 생각은 이별합시다. 자녀 사랑을 숭고한 것으로 여겨 다른 사랑을 우습게 여기는 오류도 범하지 맙시다. 자녀 사랑 그거 시켜서 하는 거 아니지요? 그럼 본능입니다. 자랑할 것도 숭고할 것도 없습니다. 남녀의 사랑도 마찬가지고요.. 남녀의 사랑보다 부부의 사랑이 더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요? 믿음 생활이란 이러한 인간적인 본능을 극복하고 보다 높은 차원으로 날아가는 과정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믿음 생활을 통해 참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