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태어나서’ 시대적 사명을 다한 정주영(3)
7. 박정희와의 만남으로 세계적인 영웅으로 날아오르다.
“앞으로 현대가 하는 사업에 일체 도움을 주지 마시오.” 박정희는 단호하게 김학렬 경제부총리에게 지시했다. 순간 분위기는 가라앉아 버렸고 정적만이 흐르게 된다. 정주영은 말없이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적막은 박정희의 말 한마디로 깨졌다. “여기 있는 분이 경부고속도로를 불굴의 의지로 완성한 정주영 회장님이 맞습니까?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길을 찾아봐요... 미국하고... 일본이 안 되면 이번엔 유럽으로 가 보시오.” 정주영은 정신이 버쩍 들었다. 그리고 청와대를 나와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다.
우리는 정주영이 조선소를 건설할 때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다. “당신이 배를 사겠다고 하면 그 돈으로 조선소를 지어 배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라는” 정주영의 말, 500원짜리 지폐를 보이면서 “이것 보시오. 우리 조상들은 당신들보다 먼저 철갑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만들 수 있어요”라고 하며 상대를 놀라게 한 것, “내 학위는 경제학 박사입니다.. 어제 옥스퍼드 대학에 가서 내 사업계획서를 보여주자 한 번 척 훑어보더니 박사학위를 주더군요” “당신은 유머가 전공인 것 같네요” “나보다 더 미친 사람이 있더군요.” 등등의 에피소드에 우리는 모두 열광한다. 물론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의 팬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세상이 이런 기상천외한 발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개그방송이나 잡담 속에서 그런 말을 하기도 쉽지 않은데 이건 실제 비즈니스를 하는 가운데 나온 말이니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사람 같으면 돈이나 주문을 받으려고 긴장해서 있던 유머도 사라질 판이 아니겠는가? 아니 제대로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천하의 정주영을 이끌면서 용기를 북돋아 준 사람이 있었다면 놀랍지 않을까? 더구나 구체적인 방법까지 알려 주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가 바로 박 정희이다.이다. 평생 포기를 모르고 살았다는 정주영도 조선공업에 진출하라는 박정희의 당부를 들어주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포기하겠다는 뜻을 박정희에게 밝혔다. 그러자 박정희는 대로하여 그의 사업을 돕지 말라는 엄포를 놓은 후 유럽에 가 보라고 조언을 한다. 그 자신도 서독방문으로 얻은 정보가 있으니 그러지 않았겠는가? 이미 미국은 다녀왔으니 미국과 유럽의 차이를 어느 정도 이해했을 것이니까 그런 조언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정주영의 파격적 언행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그야말로 둘은 환상의 복식조가 아니었나 싶다.
두 사람의 삶은 다르면서 닮은 곳이 많다. 무엇보다 그들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매일 새로운 생각으로 살아간’ 사람들이다. 박정희는 가난한 집 막내로 태어나 교사의 꿈을 위해 사범학교에 진학 국비로 공부하여 그 꿈을 이루었다. 이제 그에게는 평안한 삶이 준비된 셈인데 스스로 그것을 박차고 만주군관학교로 진학하여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군인이든 교사든 당시에는 꽤나 괜찮은 직업이지만 나이 때문에 입학이 불허되자 혈서까지 써서 입학허가를 받은 박정희의 의지는 정말로 대단했다. 그를 친일로 몰아 비난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지만 편안하고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한 것만큼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해방이 되자 박정희는 끈 떨어진 신세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한국의 육사에 지원하여 다시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에게도 도전은 이제 삶 자체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남로당에 가입하여 숙청의 위기를 맞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물론 배신자가 되는 치욕을 감내하면서. 남로당에 가입한 것 자체도 하나의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장교가 되어 다시 안락한 삶이 기다리는데 일부러 그런 것은 그가 평범한 행복에 머물 사람이 아님을 의미한다. 배신은 나쁜 것이지만 헛되이 죽는 것보다 현명한 선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가장 큰 도전은 516쿠데타이다. 내란죄는 어느 나라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사형이라는 사실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데 그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바로 잡고자 일어났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여느 제3세계 국가의 군부 쿠데타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그는 권력을 탐해 궐기한 것이 아님은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명백히 드러났다. 권력에만 눈이 멀어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무리와는 급이 다른 인물이 박 정희이다..
중정의 안가에서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난 괜찮아’하며 의연히 죽어간 모습은 그의 삶과 인간 됨을 보여주었다. ‘각하가 곧 국가’라며 충성을 외쳤지만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목숨을 구걸하러 이러 저리로 도망 다닌 차지철의 초라한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박정희는 오히려 살아서 당할지 모를 수모보다 그런 장렬한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언제라도 죽음을 맞을 준비를 했던 그가 바라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토 히로부미가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비롯한 일본의 중신들은 그의 장렬한 죽음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늙고 병들어 쇠약해진 몰골을 보이며 죽어가는 것보다는 얼마나 멋진 죽음인가 하는 것이 이유였다. 적이지만 훌륭한 자세인 것 같다.
두 사람은 현실의 편안과 안락을 거부하고 새로운 도전을 통해 미래를 열어간 영웅들이었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하지 않았던가? 정주영이 훗날 ‘포니보다 못한 수준’의 정치에 대한 분노로 대선에 출마하였고 그의 글에는 정치가들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적대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예외적으로 극찬으로 가득하다. ‘사심 없이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지도자’라는 칭송을 바치기까지 했다. 그런 박정희와 환상의 복식조를 이루어 보람을 느끼며 사업을 하다가 “권력의 무서움만 알고 그 책임을 모르는” 권력자들의 횡포에 그가 ‘토사곽란’까지 하며 집에 드러누워 있을 정도로 분노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박정희 대통령이 잘 차린 밥상을 신군부가 더럽게 먹어치운다”는 말을 굳이 저서에 인용한 것도 신군부에 대한 분노와 함께 박정희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박정희의 뒤를 잇고자 했던 것이다.
1960-80년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제2의 전성기’였다. 고조선과 고구려가 동북아시아를 누비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백제가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에 세력을 확장하며 우리 민족의 영역이 가장 컸던 시절이 제1의 전성기인 셈이다. 그때 동아시아의 진짜 주인은 한족이 아니라 바로 우리 민족이었다. 그것은 단지 지나간 옛날의 추억이 아니다. ‘제2의 전성기’를 가져온 원동력은 바로 우리 민족이 가진 놀라운 저력 잠재력이었으며 그것은 2-3,000년에 이르는 제1의 전성기‘를 통해 축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100만 대군을 물리친 동아시아 최강의 나라였으며 그 저력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흐르고 있다.
그런 우리가 천 년 이상 침체의 역사를 써야 했던 것은 바로 신라의 민족적 배신 때문이었다. 삼국 중 가장 국력이 약했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동맹을 갈아타며 생존을 꾀하였으나 그 정체가 드러나서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나라의 존립이 위태롭자 이번엔 바다 건너 당나라를 찾아가 당나라의 도움을 청한다. 우리는 신라의 삼국통일 운운하지만 신라가 원한 것은 삼국통일이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의 손길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는 것뿐이었다.이었다. 마침 고구려 정벌에 연이은 실패로 대국의 체면을 잃었던 당나라는 자신들의 약점인 병참을 신라에게 맡기고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여 마침내 무너뜨리기에 이른다. 우리 민족은 내부의 적으로 인해 자멸하고 만 셈이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영웅이 아니라 당나라는 대국에게 머리를 조아려 그들을 동족을 치기 위해 끌어들인 민족의 반역자 들일뿐이다.일 뿐이다 (다만 그들을 이완용과 다르게 봐야 하는 것은 아직 민족적 정체성이 성립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거짓된 ’삼국통일‘은 우리 민족을 약소화시켜 한반도에 가두는 결과를 낳았다. 고구려의 땅에 유민들이 세운 발해가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일어나 신라와 대치하여 민족의 영역은 일시적으로 유지되었으나 애당초 그것은 고구려와는 근본이 다른 나라였다. 고구려는 9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아시아 최장수 국가였고 그들의 국토는 완전히 요새화 되어 외부의 적을 들이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만일 연남생의 배신이 없었다면 당나라가 아무리 신라의 지원을 받았어도 고구려를 멸하지는 못했을 것임을 필자는 확신한다. 하지만 발해는 핵심적인 고구려 지배층이 당나라에 끌려가고 남은 유민들의 나라이며 대다수는 고구려 유민이 아닌 말갈족(여진족)이었으며 국토 또한 고구려의 핵심과는 거리가 먼 만주와 한반도의 오지가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렇게 허점투성이의 나라가 그나마 200년 이상 유지된 것은 아마 고구려의 저력이 그 안에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발해의 멸망과 함께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는 한반도에 한정되게 되었다. 한반도란 어떤 곳인가? 그것은 대륙의 회오리바람이 비켜 가는 고립된 지역이다. 동아시아의 중심은 만주와 중원이고 한반도는 변경일 뿐이다.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 갇혀 살게 됨으로써 더 이상 동아시아의 주역이 될 기회는 가질 수는 없게 되었다. 결국 문화국가라는 허울 좋은 테두리에서 사대를 통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폐쇄적인 국가로 전락하면서 무능과 부패가 가득한 민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끝은 일제에 의한 식민지 지배를 당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놀드 J. 토인비가 말한 ’도전‘이 되었다. 천년에 가까운 침체와 그로 인한 무사안일함이 가져온 시련은 민족의 잠을 깨우는 강력한 도전이 되었고 그것에 대한 응전이 시작되었다. 독립운동이든 기업활동이든 또는 각종 계몽활동이든 종류와 성격에 관계없이 우리 민족은 각각의 분야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 숨겨진 잠재력을 끌어내기 시작하였다. 한반도라는 안전지대에서 ’’ 은둔의 나라‘가 되어 한없이 약해지던 우리에게 식민지 지배라는 ’도전‘은 민족중흥을 가져오는 ’응전‘을 불러온 것이다.
그렇게 영웅들의 무대가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 의한 국난이라는 무대에서 활약하였고 임경업 장군이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는 무대에서 활약하려다 산화한 것처럼 구한말기에 시작된 민족의 시련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분단과 전쟁 냉전이라는 형태로 민족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청년 정주영은 그 시대에 맞게 자신만의 응전을 거듭해 갔다. 일제강점기와 ’병참기지화‘에 따른 응전은 쌀집과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하여 경영하면서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이었다. 해방과 전쟁으로 찾아온 ‘공백의 시대’에는 건설업에 도전하여 민족이 겪었던 ‘공백’을 메워가면서 ‘현대’의 기반을 다진 것이 시대에 부응하는 길이었다. 많은 ‘정주영’들이 이렇게 시련 속에서 응전을 통해 용이 되고자 몸부림치고 있었다.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도 이러한 무대 준비에 기여하였다. 은둔의 나라 조선은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세계 속의 대한민국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을 이용해 미국을 맹방으로 끌어들여 각종 원조를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물론 그의 공적은 대한민국이 서유럽과 함께 냉전의 최전선이 되었다는 국제정치학적 배경에 힘입은 바 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열강의 주목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냉전은 우리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를 국제무대의 신데렐라로 만들었던 것이다.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도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한국전쟁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열강으로 하여금 한국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였다. 미국은 패전국 일본을 식민지 수준의 나라로 만들려다가 분단과 중국의 공산화로 180도 정책을 전환하여 일본의 부흥을 도왔고 재무장을 지시했다. 그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에치슨 라인으로 한국을 제외했다고 할 때 만 해도 미국의 관심밖에 놓였던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최대 관심지역이 되었다. 그로 인해 많은 원조와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어떨까? 미국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고 주한미군을 주둔시켜 놓았으니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높아질 수밖에없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밝힌 것도 외신기자들이 공중에서 찍은 학살의 참상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516쿠데타와 12121212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쿠데타 세력을 압박하는 것이었고 8787 민주화운동 때 군을 동원하려던 전두환의 생각은 미국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미군이 주둔한 일본 필리핀 그리고 우리가 유달리 민주주의에서 주변 국가보다 앞선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많은 신생독립국이 생겨났지만 우리처럼 경제와 민주주의가 성장 발전한 나라가 없는 것은 우리가 냉전과 분단 전쟁으로 받게 된 혜택의 힘이 컸다. (물론 피해와 함께. 세상엔 공짜가 없다)
제2차 대전 이후 조성된 평화와 자유의 모드 역시 우리의 ‘기적’에 크게 기여했다. 일본이 산업혁명을 하던 19세기 후반에 비해 세계는 개발도상국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관세장벽을 낮춰주며 시장을 개방했고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제2차 대전이 가져온 교훈 즉 폐쇄적인 체제가 비극을 낳았다는 것에서 비롯된 특혜였다. 한국의 고도성장은 실로 경이적이지만 그것은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가 아니라 전후 세계가 펼쳐놓은 평화와 자유의 모드 속에서 세계 경제가 고성장을 하는 가운데 일어난 것이었다.
이로써 ‘민족의 제2의 전성기’를 위한 무대가 마련되었다. 민족이 겪은 외부로부터의 시련과 그로 인해 파생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각종 지원과 관심 그리고 평화와 자유라는 세계사의 흐름이 가져온 무대였다. 그 무대에서 많은 영웅들이 활동을 시작하였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 그것을 완성할 슈퍼 히로의 등장이 요구되었다.
바로 그 때 분산된 민족의 ‘응전’을 하나로 묶고 외부의 호조건을 최대로 활용해 한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 영웅이 마침내 무대 위에 올랐다. 그 이름 박정희! 그가 ’제2의 전성기‘의 문을 연 것이 바로 516쿠데타였다. 박정희는 그저 경제발전이나 이끈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역사가를 무색하게 할 정도의 역사 지식에 기초해 민족의 침체의 원인을 정확히 이해하고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한 개혁을 철두철미하게 실시한 혁명가요 개혁 군주였다. 조선의 어느 왕도 세종 정조라도 이루지 못한 개혁을 그는 이루어 갔다. 그것은 세종이나 정조가 능력이 뒤져서가 아니라 시대적 환경이라는 무대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개혁은 메이지 유신에서 시작되어 쇼와에 완성된 일본의 근대역사를 모델로 하였다. 300여개의 지방정권으로 분열되어 있던 일본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메이지 유신을 일으켜 ’일본‘을 하나로 뭉치고 근대적 문물을 수용하여 제국주의 국가를 구축하였다. 그 힘이 지나쳐 고립을 자초할 폭주를 시작하여 결국 패망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비서양 국가로서 열강의 반열에 오른 유일한 사례라는 점에서 우리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처럼 비록 적이지만 배워야 할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 자신이 사범학교와 사관학교를 통해 일본의 근대사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은 인물이라 하겠다.
일본이 우리의 근현대사에 미친 영향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침략과 식민지 지배는 어두움이다. 하지만 그 어두움이 우리를 각성하게 했고 또 그들의 발전이 우리에게 모델이 된 것은 분명 인정해야 할 빛이라 하겠다. 정주영은 ’일본이 했으니 우리도 할 수 있다 “ ”일본이 한만큼 우리도 해야 한다 “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일본이 우리에게 자신감을 준 셈이라 할 수 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성공을 했다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싶겠지만 이웃집 철수가 성공을 하면 ‘저런 인간도 성공했는데 나는 못 하겠냐’라고 자신감을 느끼는 것과 같다.
일본은 스스로 서구 열강의 문물을 가져오느라고 고생했지만 우리는 일본을 통해 그것을 들여오는 바람에 상당한 노력과 시간 돈을 아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일본이 우리 곁에 없었다면? 식민지지배도 없었을지 모르나 우리가 배우고 따라가야 할 대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우리에게 애증의 대상인 셈이다.
그런 ‘일본’을 몸과 마음에 장착한 혁명가 박정희의 개혁은 민족의 저력 잠재력을 끌어내어 ’’ 한강의 기적‘이라는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게 하였다. “잠을 깨세 잠을 깨세 사천 년이 꿈속이라”는 시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역사를 모르는 무지한 자의 말이고 우리의 잠은 길어야 천년 남짓이었다. 박정희의 개혁은 민족의 잠을 깨워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그가 국민교육헌장에 명시한 ’민족중흥‘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많은 영웅들과 국민의 지도자가 된다. 이런 박정희의 업적이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등에 비하여 작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제2의 전성기’를 기획하고 이끈 것이 박정희라면 그의 지휘 아래 세계를 누비며 특공부대처럼 활동하며 경제발전의 선도자가 된 것이 바로 정주영이었다. 조선업 진출의 에피소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주영의 활약 뒤에는 박정희의 존재가 있었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도 실제로 그것을 이룬 것은 정주영이지만 박정희의 강한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사업이었다.
때론 강하게 때론 부드럽게 망설이는 정주영을 이끈 박정희로 인해 정주영은 세계적인 영웅으로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그를 궁하게 하여 통하도록 함으로써 성장하게 만든 지도자가 박정희였던 것이다. 그들의 선도적 역할에 다른 기업인들을 비롯한 많은 영웅들이 따라감으로써 해방과 분단 전쟁 등으로 생긴 공백을 메우면서 준비를 다졌던 우리 민족은 이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 시대정신을 이끈 것이 박정희와 정주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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