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이야기

예수의 경제학(12)예수 경제윤리를 말하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닥터 양 2021. 5. 11. 05:54

예수의 경제학(12)예수 경제윤리를 말하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해설) 성경에는 경제에 대한 이야기가 엄청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서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빼면 부스러기만 남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이다. 그만큼 경제는 인간에게 중요한 부분이라는 의미로 마르크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의 경제관을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번 이야기는 산상수훈의 하나로서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가르침의 이야기이다. 예수가 선포한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은 사랑이고 그 사랑이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나눌 수 있다. 복잡한 율법을 하나님이 내린 이유는 야만의 상태에 있던 인간에게 삶의 원칙과 그에 따른 행동방식을 마치 어린아이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줄을 잘 서라 화장실은 휴식시간에 미리 다녀와라 손을 자주 씻어라 등등 매우 유치하지만 중요한 규칙을 배운다. 그러다가 초중고를 겪어 성인이 되면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들을 기회도 이유도 없어지니 좀 더 차원 높은 가르침을 예를 들어 철학이나 역사 심리학 정치학적인 가르침이나 이야기를 듣고 배우게 된다

  예수가 사랑을 선포한 것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사랑이란 율법이 지향하는 목표를 한 마다로  축약한 것이다. 율법에서 가장 핵심적 원칙인 십계명에는 하나님에 대한 규정과 인간에 대한 규정이 함께 들어 있는데 그것은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고 다른 신을 믿지 말며 우상을 만들지 않는 것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사랑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규정들 부모를 공경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탐욕을 갖지 않는 것은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따라서 사랑은 문명화되어 과거와 달리 높은 수준에 올라와 있는 인간들에게 주어진 한 단계 높아진 가르침인 것이다.

  그런데 사랑에도 우선순위가 있다. 십계명에 전반부는 (1-4번째)하나님에 대한 것인데 이는 우선순위가 사람보다 신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가 사랑을 선포할 때 항상 마음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하나님 사랑이 우선이라 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신의 가르침을 제대로 수용해야 인간에 대한 사랑도 신의 뜻에 맞는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자칫 욕정적인 것에 치우칠 가능성이 크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인간사회의 사랑이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가를 생각하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순서가 아닐 수 없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이 말은 자칫 신에 대한 과도한 종교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성직자가 아닌 이상 세상에서의 삶에 큰 비중을 두고 살고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종교가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종교를 위해 삶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우선순위로 하는 것은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가르침 계명을 늘 되새기며 이를 우선시하여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하여라는 말도 그런 의미이다. 삶은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하며 하나님의 계명은 그러한 정상화를 위한 절대적 지침이 되는 것이다.

  “주가 예비하신 가정 주님의 살과 피로 세우신 교회라는 찬양이 있다. 가정을 먼저 내세운 것에 의아해할 기독교도가 제법 있을 것 같다. ‘아니 교회가 왜 나중이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해 놓고가정이 먼저 온 것은 우리의 삶의 중심이 가정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뒤에 나온 것은 교회란 가정을 바르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임을 의미한다. 단 수단이니까 중요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오해이다. 교회는 주님의 살과 피로 세운도구이지 주님 자체는 아니다. 왜 세웠을까? 가정이 나아가 세상이 올바르고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정은 창세기에 이미 만들어졌지만 교회는 신약시대에야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가정이라는 인간사회의 기초단위가 바르고 행복한 곳이 되도록 하나님이 마련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수단을 통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을 배움으로써(우선시함으로써) ‘바르고  행복한 가정이라는 인간에 매우 필요한 것이 더 하여지는것이다.

  이 가르침의 앞에는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놓여 있다. 인간의 경제적인 욕구의 절박함에 대한 경계라 하겠다. 우리는 먹고 사는 것에 지나치게 마음이 가기 쉽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그것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 중 이보다 더 설득력있는 것은 없다. ‘황금만능주의먹고 살기 위한부득이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그렇게 절제되지 못한 이른바 먹고사니즘이 세상을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으로 만드는지 알 것이다. 갖가지 사기 사건과 같은 명백한 경제범죄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2008년에 일어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사건과 그에 따른 미국발 금융위기 일본의 버블경제와 그에 따른 잃어버린 20한국의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이 모든 것이 지켜야 할 원칙을 무시한 탐욕의 무절제한 실현에 의한 것이 아니던가? 1980년대 이후 세계를 풍미하던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무절제를 부추겨 결국 세계 경제를 커다란 위기로 몰아 넣었다. 대공황으로 만들어진 합리적인 규제조차 규제완화를 이유로 철저히 없애버리고 무절제한 욕망의 잔치를 벌이다가 파탄을 맞은 신자유주의의 최후는 신의 뜻을 무시하고 오롯이 죄악에 빠져 있다가 노아의 홍수에 의해 사라진 세상과 같다 하겠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사회를 보다 바르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메시지이다. 먹고 마시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경제이지만 그 경제 역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앞세울 때 비로소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음을 예수는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역사적으로 볼 때 부정한 방법으로 장기적인 발전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 부정한 방법으로 성공한 개인은 있을 수 있으나 그런 사회는 없다는 것이다. 19세기의 제국주의는 부정한 방법으로 경제적 성공을 노린 국가들의 전형적인 수법이지만 결국 그들은 두 번의 전쟁으로 폐허만을 안고 말았으며 제국주의를 버리고(완벽한 것은 아니다)나서야 보다 나은 삶을 누리는 사회를 이루는데 성공한 사실을 우리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일본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이야기로 마무리하겠다. 일본이 서양제국주의국가들에 의해 지배될 위기에 처한 19세기 후반 그는 경제가 구국의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여겨 관직을 버리고 경제에 투신하여 무려 500여개의 기업을 창업함으로써 일본근대경제의 토대를 쌓았다. 그런 그가 내세운 경제원칙은 바로 도덕경제론이었다. 논어를 평생의 지침서로 삼아 늘 읽고 되새기며 살아온 그는 자신의 성공 원인을 바로 도덕적 경제활동이라고 한 것이다. 원칙대로 하면 망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된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그의 성공이 살아있는 증거이니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원칙을 지킨다는 것과 융통성이 없는 것은 별개이다. 시부사와는 위기의 순간에 융통성을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했지만 그렇다고 원칙을 버리지는 않았다. 오늘날 시부사와는 일본재계에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는데 이는 버블경제의 붕괴과정에서 자신들이 원칙을 저버린 것이 드러남에 따른 반성에 의한 것이다.

  우리도 시부사와의 사례를 통해 원칙을 중시하는 모습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도덕과 경제는 결코 모순이 아님을 외친 시부사와의 정신은 오늘도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우선시하면 경제문제가 해결된다고 한 외침은 시부사와를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다르다면 유교와 기독교라는 종교의 차이일 뿐이다. 정주영 회장도 최선을 다하여 가장 좋은 품질의 제품을 공급하는 원칙을 고수하여 성공의 길을 걸었다고 하였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아무리 먹고 마시는 것이 급해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해당 되는 경제윤리를 소중히 여겨 이를 준수하여야 미래가 밝다고 믿는다.

  필자가 예전에 일식당을 할 때의 일이다. 식당을 그만둘 때 필자와 새로운 세입자 사이를 오가며 사기성 행각을 벌인 부동산이 있었다. 필자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무시하고 직접 계약을 해 버리는 펀치로 대응했다. 물론 올바른 대응은 아니지만 그만큼 분노가 컸다. 그런데 2년 정도 지난 지금 그 업자는 폐업을 하고 말았다. 코로나 사태의 영향일지 모르나 이웃에 있는 다른 부동산들은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으니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필자는 그들이 벌인 부도덕한 행위가 결국 발목을 잡은 것이 아닐까 싶다. 마치 우리 경제의 무원칙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과 같다는 생각에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그 부동산의 페업이 우리 경제에도 나타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란다. 원칙 없는 경제는 모래 위 에 지은 성과 같음을 명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