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이야기

정주영은 어떻게 쌀가게를 인수하게 되었나?(8)

닥터 양 2021. 5. 14. 06:47

이 땅에 태어나서시대적 사명을 다한 정주영(2)

 

5. 난세를 통해 시대적 무대에 오른 정주영

6. 해방과 분단 전쟁으로 생긴 공백이라는 난세로 영웅이 된 정주영

 

5. 난세를 통해 시대적 무대에 오른 정주영

  ‘정주영은 하늘이 내린 인물이다어느 저자의 결론이다. 그는 정주영이 성공을 거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다며 신비주의적인 어법으로 매듭을 지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정주영 같은 인물을 인위적인 노력만으로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그의 성공의 비결을 체계적인 분석으로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오히려 그런 선입견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제껏 살펴 본 각종 전기 자서전을 종합해 보면 그는 지나치게 신비화되거나 심지어 신격화(?) 되는 바람에 객관적인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느낌이다. 본인은 그렇지 않지만 (자신은 그저 꾸준히 노력하다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겸손해 함)의 추종자들은 말 그대로 정비어천가를 부르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필자도 그에 대한 존경심은 누구 못지 않지만 경제와 역사를 겸하여 공부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런 식의 신비주의나 신격화는 오늘날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객관적인 분석도 아님을 단호히 밝혀야 한다는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이 내린 정주영은 하늘로 돌려보내고 이 땅에서의 삶에만 집중할 필요가 있다.

  정주영이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가 시대를 너무나 잘 만났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주영이 100년 일찍 태어났거나 100년 늦게 태어났다면 그는 성공을 못하거나 해도 훨씬 소규모에 그쳤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난세의 영웅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삼국지를 보면 조조에 대한 최초의 평가는 평시에는 충신 난세에는 간웅이었다. 사실 이 평가는 뛰어난 인물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 평가이다. 평화시에는 아무리 뛰어난 인물도 영웅이 되기 어려우니 충신이 되는 것이고 난세에는 영웅이 되기 마련인데 조조가 가진 간특함으로 인해 영웅이 아니라 간웅(간사한 영웅)이라는 답을 내린 것이리라.

  정주영이 태어나기 100년 전과 후는 그가 태어난 때와 무엇이 다를까? 차이는 하나이다. 100년 전과 후는 평시이고 그가 태어난 시기는 난세였다는 점이다. 정주영의 탄생연도인 1915년은 우리가 일제에게 강점되고 5년이 흐른 때로 이른바 무단 통치가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한반도에는 전쟁이 없음에도 헌병이 칼을 차고 민중을 통제하고 교사가 칼을 차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가 1919년 이른바 ‘3.1만세운동이 일어나 한바탕 한반도가 요동치는 일이 있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민족의 투혼을 마음껏 발휘하여 일제를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은 이 사건으로 일본은 이른바 문화통치를 시작하여 이제껏 억압 일변도에서 당근과 채칙을 섞은 일종의 유화적 지배가 실시되면서 우리 민족은 조금이나마 숨을 쉴 여유를 갖게 된다.

  경제사적으로는 산업혁명의 길이 조금씩 마련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를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이른바 회사령이라는 법으로 경제활동을 억제하던 일제가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이를 완화하였기 때문에 민족자본에 의한 경제활동이 활발해지고 일본 본토의 자본도 대거 한반도에 들어오게 되니 우리 땅에도 산업혁명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1930년대가 되면서 한반도는 난세에 휘말리게 된다. 1929년 뉴욕증시의 폭락으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은 일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비록 유럽에 비해 미국과의 자본적 관계가 깊지 않아 직접적인 피해는 적었으나 (유럽의 경우 미국 자본의 철수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우리나라의 외환위기 때 일어난 외국자본의 철수를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미국시장에의 의존도가 제법 큰 일본으로서는 미국시장의 위축으로 생사 등 주요 제품의 수출이 대폭 감소하여 무역의존도가 높은 일본 국내경제에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때마침 터진 만주사변을 계기로 군비확장으로 돌입하게 된다. 만주사변은 일본 근대사에서 군부가 중앙정부의 계획 없이 일으킨 최초의 군사도발이었다.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라는 관동군의 참모에 의해 세운 계획에 따라 만주의 관동군이 독단적으로 일으킨 만주사변에 대하여 중앙정부는 지지를 표명하였고(오히려 군부는 최초에 반대표명)거침없는 관동군의 행보가 이어져 만주지역을 점령하게 되고 결국 정부는 그곳에 만주국을 세워 간접통치 형식으로 지배를 하게 된다. 원칙적으로는 이시와라를 비롯한 현지 지휘관들을 군복을 벗겨야 할 군율위반을 추인한 것은 결국 일본이 세계대전에 휘말리는 계기가 되었다. 1937년의 중일전쟁도 마찬가지로 군부가 저지르고 정부가 이를 추인하는 형태로 시작되었고 그것이 결국 진주만 기습이라는 엄청난 사건으로 이어져 일본의 패망을 가져왔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일본의 지식인들은 그때 관동군의 일탈을 승인한 것을 애석해하며 일본의 패망이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이 그동안 서구열강과 협조노선을 취해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하고 열강의 지위를 얻었는데 만주사변은 그런 협조노선을 깨고 고립주의로 빠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맺은 독일 이탈리아와의 삼국동맹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여 하여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관동군의 독단으로 일으킨 만주사변의 발발이었다.

  전개되는 난세에서 한반도에는 병참기지화라는 이름으로 일본자본의 유입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만주사변으로 열강과 척을 지어 고립된 일본은 본격적으로 대륙침략을 계획하게 되고 그를 위한 준비로 이제껏 원료와 식량의 공급지로 여겼던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기지로 여기게 된다. 이는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침체된 경기의 활성화를 위한 일본판 뉴딜의 일환으로 실시된 재정팽창정책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다.

  이때 중심이 된 지출은 바로 군비확장이었다. 일본의 군부는 러일전쟁과 제1차 대전에서 외부에 의존한 상태로의 전쟁수행의 어려움을 깨달았고 자주적인 전쟁 수행을 위한 총력전 수행능력을 정비하고자 하였다. 일본의 약점은 중화학공업의 상대적 후진성으로 인한 군비의 자급자족능력의 부족이었다. 이를 세계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한 재정팽창의 중심을 군비확충에 둠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그를 위해 중화학공업분야에 국가재정이 집중되었는데 이는 경기회복과 군비확충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결과를 가져온다. 독일이 재무장을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한 것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고 하겠다.

  일본이 난세에 휘말리게 된 것이 결과적으로는 한반도에는 경제적인 활기를 가져왔다. 많은 본토 자본이 일본 정부와 총독부의 지원을 업고 한반도에 진출하기 시작하고 그것이 정주영의 가출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가 신문을 통해 얻은 각종 취업정보도 일본자본의 대량투입이 가져온 경기의 활성화로 인해 발생한 파생 효과에 따른 것이다. 만일 이전처럼 일제가 일본자본의 진출 자체를 억제하거나 방관하는 정도였으면 과연 정주영이 가출을 결심할 정도의 호경기를 맞이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조선의 소년 정주영은 난세를 틈타 세상에 나가게 되고 위대한 기업인이자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첫걸음을 걷게 되었다.

6. 해방과 분단 전쟁으로 생긴 공백이라는 난세로 영웅이 된 정주영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인식을 의외로 가지지 않는 것 같다. 해방이 곧 독립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몰랐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식민지시대에도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통치를 받았다. 그것이 조선왕조의 지배세력에서 일본의 지배세력으로 바뀐 것 뿐이다. 그렇다면 해방이 되는 순간 그들이 물러나고 누가 우리를 통치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일본의 총독은 실질적으로 왕으로 군림했다. 그는 일본 정부 어디의 지시나 명령을 받지 않고 오로지 천황에게 직속되어있는 존재로서 조선 통치의 전권을 위임받았으니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존재가 사라졌으니 왕이든 대통령이든 수상이든 세워야 한다.

  누가 역할을 할 것인가도 문제지만 그걸 누가 정하는가도 문제이다. 그동안 일본이 제멋대로 정해 보냈는데 일본이 그럴 권한을 상실했지만 대신할 존재도 없었다.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니 투표로 뽑을 수도 없고. 서구열강의 식민지처럼 일본이 우리의 옛 지배세력을 앞세워 통치한 것도 아니며 기존의 지배층은 친일파로 몰려 숙청(?)당할 위기에 처했으니 나서기도 어렵다.

  통치자만 문제인가? 일본인이 대부분의 고위관직을 독점하다시피 했으니 그 자리도 공백이 된다. 하급관료들 중에도 어느 정도의 공백은 불가피하다. 주재소(파출서) 순사나 경위 등에는 일본인이 제법 있었다. 공립학교의 경우 교사 중에도 일본인은 꽤 있었고 교장 교감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위로는 총독에서 아래로는 순사나 학교 교사(박정희가 일본교사에게 박대당한 것을 상기해 보라)들이 사라지는 초유의 국가적 공백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공백은 국가통치체계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본 자본이 엄청나게 들어와 있었으니 그곳의 사장과 간부들 그리고 중간 관리층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공백이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공장이나 회사건물을 뜯어 갈 수는 없지 않는가? 일본인의 일부는 인수인계를 위해 잠시 동안 남아서(라기 보다는 억류되어)도움을 주었지만 그것도 1020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공백은 필연적이었다. 기술자들도 대부분 일본인들이니 사업체의 존립이 위태롭다.

  일본으로부터의 우리의 해방은 세계 식민지 해방사에서 극히 드문 사례였다. 제국주의 시대로 인해 대량으로 발생한 식민지들이 해방되는 과정은 다양하지만 우리처럼 하루아침에 남의 힘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1차 대전 후 패전국의 식민지는 승전국에게 인계되었지 해방되지는 않았다. 2차 대전 후에는 많은 식민지가 해방되었지만 대부분은 투쟁으로 얻어진 것이기에 급작스러운 해방은 없었다.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이 제2차 대전이 제국주의적 침략주의를 물리친 전쟁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 영국 프랑스 등의 승전국이 전쟁 후에 온갖 이상을 내걸었지만 그 안에 식민지해방이라는 조항은 없었다. 그들은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의 전쟁도발에 대한 보복과 함께 전쟁의 재발을 막고자 하는 노력은 했지만 식민지 문제에는 조금도 반성이나 죄의식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 종주국들은 한때 동맹국에게 빼앗겼던 식민지를 되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특히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면서 일시적으로 지배한 동남아시아에는 구 종주국들이 속속 들어와 지배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미 자유의 맛을 안 식민지 민족들이 그대로 수수방관 당할 리가 없다. 일본이 본의아니게 그들의 독립의식을 고양시켜 준 것도 있어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종주국 대부분은 전쟁으로 피폐해져서 완전히 제압할 힘이 없었기에 그들은 독립을 쟁취해 갈 수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종주국의 공백은 그들에게 자치를 위한 조직과 힘을 기를 기회이기도 하였다. 베트남전쟁은 그러한 투쟁의 마지막을 장식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으로 힘을 잃은 종주국의 부재 거기에 다른 침략자도 없었으니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네덜란드나 프랑스처럼 본국이 점령을 당한 경우라면 더욱 식민지지배는 약화될 수 밖에 없었으니 더욱 그렇다. 그들의 독립운동은 전후에도 이어졌고 종주국은 결국 독립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이 길면 1020년도 걸렸고 그 가운데에 식민지는 자신들의 조직과 능력을 키워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지적해야 한다. 통치권은 넘겨도 경제적인 지위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의 기업 자본가는 여러 가지로 새로운 통치세력과의 타협을 통해 남을 수 있었다. 이집트 독립과 관계없이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던 스웨즈 운하를 뒤늦게 민족주의자 낫세르에 의해 국유화됨으로써 이집트는 영국과 프랑스와 전쟁을 해야 했다. 정치적인 독립은 이루어도 경제적인 독립을 제대로 이루기는 어려웠으니 공백은 최소화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패전국의 식민지라는 이유로 즉석 해방을 맞게 되었다. 독일은 제1차 대전으로 식민지를 모두 빼앗겼고 이탈리아는 제대로 된 식민지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만이 식민지를 빼앗기게 되었다. 우리가 연합군에게 지나치게 고마워 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1차 대전 후처럼 우리를 그들의 전리품으로 가져가지 않은 것은 다행이나 그것은 인도주의 때문이라기보다는 한국에 대한 관심도 없고 가치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남북이 분단된 채 이루어진 해방이다. 그것이 임시라고 해도 독일과 이탈리아가 패전국으로서 점령을 당한 것과 달리 우리가 피지배국가였는데도 분단을 강요당한 것은 동구권을 소련에게 내준 연합국의 초조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독일 패전으로부터 일본 패전 사이에는 3개월 10일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소련이 88일 선전포고를 하고 급속하게 만주로 진격하며 한반도까지 쳐들어 왔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동구권처럼 소련의 영향력하에 들어갔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미국이 뒤늦게 이를 제지하는 바람에 남한이라도 소련의 지배를 벗어났던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이다. 그야말로 위기일발이었다. 소련이 점령한 한반도의 미래는 어땠을까? 한국전쟁은 없었겠지만 남북한이 김일성일가의 지배를 받았다면 우리 민족의 미래는 얼마나 암담했을까?

  자력으로 이루지 못한 급작스러운 해방이니 공백에 의한 혼란은 필연적이었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기회였다. 권력을 탐하는 자에게는 권력을 쥘 기회였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업을 넓히거나 새로운 사업을 할 기회였다. 서민이라도 기회를 잘 잡으면 공무원으로 교사로 경찰로 군인으로 성공하겠다는 꿈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혼란과 싸움으로 점철된 시대로 보일 것이다.

  그들이 왜 싸웠을까? 공백이 된 곳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대한민국 최대의 기회의 시대가 그렇게 나타났다 사라져 갔다. 기회를 잡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 사이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 30살 남짓한 자가 참모총장이 되고 별을 두 개 세 개나 달던 시대가 대한민국 역사에 이 시기 말고 있었던가? 뒤늦게 합류한 박정희는 이념문제로 숙청된 것도 있어 35살에야(?) 별을 달았다. 한 발 차이로 참모총장이 되느냐 대령이 되느냐가 결정된 기회의 시대. 대학에 친일학자들이 자리를 차고 식민지적 사고를 전파하려고 한 시대가 이 시대이다.

  정주영에게도 기회는 주어졌다. 일본 자본이 물러나고 생겨난 사업기회를 이용하는데 그도 민첩했다. 원래 하던 자동차 수리업에 만족하지 않고 건설업에 뛰어든 것은 재벌그룹 현대의 출발이었는데 그것은 수백 개의 건설업자가 일본 자본의 철수로 생긴 공백을 파고들며 생겨나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거기에 새로운 소비자로 등장한 점령군 미군이 물주로 등장한 것도 큰 힘이 되었다. 임시이긴 하지만 미국의 지배세력은 한국의 사업가들에게 여러모로 기회를 넓혀 주었다. 그들은 장비와 기술까지 전수해주는 고마운 고객이었다.

  분단은 또 다른 기회를 주었다. 남한에는 중화학 공업의 시설이 거의 없었다. 기본적으로 병참기지정책이 북한에 몰린 것은 대륙침략을 전제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준비는 곧 중화학공업의 육성이고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하려니 북한에 몰린 것이다. 게다가 북에는 자원과 천혜의 자연도 넘치니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남한의 공백을 더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이 남긴 공백이 아니라 북에서 공급받던 물자를 생산해야 해야 는   새로운 공백이었다. 시급한 것은 전력과 같이 당장 필요한 물자였다.

  거기에 더하여 전쟁으로 인한 특수도 발생했다. 우리는 일본이 한국전쟁 특수로 경제발전을 했다는 생각만 했지 우리 자신에게도 그것이 기회가 되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전장이었고 경제력도 약하기 때문에 제한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들이 뿌린 달러와 들여온 물자는 사업수완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진 기회였다. 한편에서는 전쟁의 고통에 신음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른 쪽에서는 달러와 물자를 획득하여 나날이 성장하는 사람들이 지천에 깔렸다. 한국 재벌사를 보면 한국의 1세대 재벌들의 대다수가 한국전쟁을 통해 기반을 쌓고 재벌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성의 이병철도 그중 하나이다.

  정주영에게도 전쟁은 위기이자 기회였다. 일제의 패망 그리고 생긴 공백 이어지는 전쟁으로 인한 또 다른 공백은 공백을 메울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기회가 되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국가로 자리잡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그들이 있어 우리는 붕괴되지 않고 공백을 메워 전후에 안정된 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 기회를 못 잡은 사람들은 땅을 치며 애석해하거나 잡은 사람들을 질시할지 모르나 그것은 정주영을 비롯한 자본가들이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한 공헌을 무시하는 평가이다. 만일 그들이 없어 처음부터 끝까지 원조물자에 의존해 위기를 이겨냈다면 전쟁이 끝나고 우리 사회는 총체적 붕괴 현상을 가져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들이 그렇게 기반을 다짐으로써 우리는 해방과 전쟁의 공백을 극복하고 신생독립국으로서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한 많은 신생독립국들의 현재의 모습을 상기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정주영은 그렇게 공백의 시대에 있어서 시대적 사명을 다하였다. 후 복구사업에서는 그렇게 해서 쌓은 능력과 자본으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1950년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기반이 되었다. 고령교 공사, 한강인도교 공사, 인천 도크 공사 등이 그렇게 현대건설에 의해 완수되어 한국사회는 전쟁의 화마를 믿고 일어설 수 있었다. 1960년대 이후의 기적은 그렇게 준비되고 있었다. 1940-50년대는 그저 혼란과 전쟁 독재로 물든 절망의 시대만이 아니라 이렇게 일제의 공백을 메우는 사람들의 처절한 노력으로 미래를 준비하던 시대이기도 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 중에는 정주영과 현대건설도 자리 잡고 있었다.

  또 다른 난세가 정주영에게 시대적 사명을 가져온 것이다. 일본이 패전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승전국이 되어 급작스러운 철수로 공백이 생기지 않았다면 분단이 공백을 강요하지 않았다면 또 전쟁이 일어나 큰 공백을 만들지 않았다면 미국이 공백을 메우기 위한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현대그룹이 지금 존재할 수 있었을까? 난세가 영웅을 만들었다는 진리는 여기서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난세에 영웅으로 활약할 기회는 준비된 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정주영은 첫 번째 난세에서 그것을 마쳤기에 영웅으로 시대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