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경제학(3) 예수 채무면제를 말하다. (용서에 대한 비유)
(해설) 성경에는 경제에 대한 이야기가 엄청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서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빼면 부스러기만 남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이다. 그만큼 경제는 인간에게 중요한 부분이라는 의미로 마르크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의 경제관을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번 이야기는 종의 빚을 탕감해준 주인과 그의 호의를 배신한 종의 이야기이다. 주인에게 종이 일만 달란트의 거액의 빚을 지고 말았다. 일만 달란트는 시라토리 하루히코의 ‘종교와 돈의 역사’에 의하면 약 5조원 정도의 금액이라고 한다. 달란트 자체가 고대의 화폐인 금과 은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니 정확한 액수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종이 주인에게 빌릴 수 있는 액수도 아닌 것 같다. 아마 우리가 “네가 만일 100억이 있다면”하는 식의 이야기처럼 과장되게 표현하여 듣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려고 했을 것이다. 종은 주인에게 빚을 갚겠다고 하였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종도 주인도 알았을 것이다. 결국 주인은 종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고 종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하였다. 그렇게 이야기는 매듭지어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김상중이 등장한다. “그런데 말입니다.” 빚을 탕감받은 종은 자신에게 100데나리온(한화 약 800만원 정도)의 빚을 진 동료를 만나 빚독촉을 한다. 그가 갚겠다며 말미를 요구하지만 듣지 않고 그를 옥에 가두게 하였다. 이를 본 다른 동료가 주인에게 고하니 주인이 노하여 종의 빚의 탕감을 철회하고 종에게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있을 것을 명하였다.
이 이야기는 신앙적으로는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 주인은 하나님이고 종들은 인간이다. 주인인 하나님이 일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죄를 용서해 주는데 종인 인간들이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육신을 가지지 않은 절대자 신이 인간을 용서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 아닌가? 군대로 치면 말년 병장이 말단 이병을 용서하는 것이 일병이 이병을 용서하는 것보다 쉬운 것처럼. 병장의 용서가 곧 그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지만 일병의 용서는 자칫 위계질서의 유지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신의 권위 역시 마찬가지로 용서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끼리의 용서가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기에 예수는 이를 가르치고자 이런 비유를 사용한 것이다. ‘주기도문’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 내용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를 용서하옵소서”라는 말이 있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불가능에 가깝지만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들어간 구절이다. 만일 우리의 용서가 신의 용서의 전제조건이라면 우리 중에 누가 용서를 받을 수 있겠는가? 100가지 10가지나 될까?
이 비유에서도 우리는 예수가 내세지향적이거나 구원을 최종목표로 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그는 용서를 통해 세상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종말과 내세 천국이 그의 지향점이라면 굳이 이런 비유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하나님께 경배드리며 그날을 기다리라고 하면 그만일 것이다. 예수는 기복과 구원을 위해 선행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선행을 통해 천국이 실현되기를 기대한 종교개혁자인 것이다.
예수는 또한 이 비유를 통해 채무면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인들의 장점이자 단점은 빚을 지는 것에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브프라임모기지론사태’를 일으켰고 그것이 미국발금융위기를 가져왔으니 단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빚을 져서라도 소비를 하려고 있으며 그것은 경기의 쉬운 회복을 가져온다는 점에서는 장점이다.
‘미국발금융위기’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그 점에서 대조적이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필자는 이자율의 저하와 물가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빚과 소비를 꺼리는 견실한(?)일본인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들이 미국인들처럼 빚과 소비를 하였다면 아마 좀 더 쉽게 위기에서 탈출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채무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채무를 꺼리며 죄악시까지 한다. 지금도 제로금리에 가까운 이자율에도 불구하고 빚과 소비를 늘리지 않는 것이 일본경제의 장기적 부진(1%이하의 성장률)을 가져오는 것이다.
빚과 소비를 늘리려면 채무의 면제라는 시스템이 원활히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그것이 무분별한 모럴 헤저드를 가져와서는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극단적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 채무면제는 경제 주체들이 과거에 사로잡혀 미래를 포기하는 것에 의한 더 큰 사회적 손실을 막고 그들이 경제활동을 재개하여 국가 경제를 활성화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미국인들이 빚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취지에서 다중채무자들에게 재기의 길을 마련해 주는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채무면제를 마구잡이로 하는 것은 아닐 것이며 아마 어느 정도 자신의 채무에 대한 책임감을 다 할 것을 조건으로 함으로써 주어지는 일종의 특혜라 할 수 있다.
예수가 채무면제의 조건으로 내세운 채권의 포기는 그러한 책임감을 다하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1만 달란트와 100데나리온은 60만배의 차이이지만 그래도 채무자에겐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금액일 것이다. 그것이 가능해야 채무면제의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는 선언은 채무면제에 대한 일종의 자기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이 구원이라고 바꿔 생각해도 구원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은 선행의 대가가 아니지만 선행 없이 구원은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채무자의 책임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드라마에서 졸지에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 국회에서 실패한 사람이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법률안을 제출했다. 실패는 누구나 있으나 그것으로 인생 나아가 경제활동을 포기하는 것은 국가 경제에 오히려 큰 손해가 될 것이다. 예수는 죄라는 빚으로 인생을 포기하려는 자를 용서하여 그가 새롭게 출발하도록 하였고 그에 대한 책임으로 자기에 죄 진자를 용서하라고 촉구하였다. 우리 사회도 예수의 이런 정신으로 실패자를 보듬어 새롭게 출발하는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보다 나은 미래를 열 수 있을 것이 아닐까? 빚진 자에게 ‘빛’을 비춰주는 사회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밝고 희망찬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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