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이 사건은 개인적 죄악인가?-가장 힘없는 약자를 방치하는 사회
이 사회의 중심은 누구인가? 바로 어른들이다. 그들은 사회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력자이기도 하다. 그들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지고 국가정책의 결정에 관여하고 있다. 사회가 창출하는 경제적 부가가치의 거의 전부를 독점한다. 문화 사상 가치관의 형성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 상호간에 이해충돌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 앞에서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를 지키기에 여념이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대부분이 누군가의 부모라는 점이다. 부모이기에 자신들의 자녀에게 책임을 가지고 양육에 임하겠지만 부모로서의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점에서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친권’ ‘양육권’이라는 이름의 권리는 부모로서 당연히 가지고 유지할 수 있는 신성불가침적인 영역이며 이를 약화시키려는 어떠한 움직임에도 저항하려고 한다.
정인이 사건은 이러한 어른들의 카르텔에 의해 일어난 비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모든 부모가 모든 어른들이 아동학대라는 끔찍한 범죄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사건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격렬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분노는 어른들에 의해 삶의 모든 것이 결정되어야 하는 가장 약한 존재에 대한 어른카르텔이 보여온 횡포에 대한 인식을 어느 정도나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구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러한 횡포가 정인이라는 아이와 그 아이의 양부모에 의해 구체화된 것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을까?
근본적으로 묻겠다. 우리 사회는 영유아를 비롯한 아이들의 기본권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는지. 그들에겐 선거권 피선권이 없는 것은 물론 최소한의 저항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영유아의 경우 청소년처럼 가출이나 반항을 할 능력조차 없이 학대에 노출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얼마나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는지도 묻고 싶다. 부모가 다수인 이 사회에서 부모의 ‘친권’ ‘양육권’이 아직도 아동의 기본권보다 우선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학대에 의해 지옥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고 때론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있는지 우리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사건이 일어날 때만 반짝하고 소란을 피우다 곧 사라지는 지금의 현실에서 근본적인 방지는 어렵다. 생각 자체를 바꿔야 한다. 어른들의 카르텔의 분쇄가 우선 이뤄져야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소유이며 그러기에 자신들이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생각 자체가 바꿔져야 한다. 인권은 저항으로 만들어졌고 지켜져 왔지 침묵하는 자들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진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저항도 외침도 불가능하다는 약점을 가진 아이들의 인권은 방치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친권이나 양육권 박탈 등 어른 카르텔이 그토록 지켜내려고한 기득권을 깨부수는 혁신적 변화가 요구되고 있음을 언제까지 묵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이들의 영혼이 그들의 들이지 않는 함성이 우리에게 절규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한다. 권리를 위해 외치고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의 이익만 지켜지고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에겐 기본권마저 보장되기 어려운 현실이 바뀌어야 한다. 이번 사건이 정인이 양부모 개인의 악행으로만 여겨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 사회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존재들의 권리를 우리가 기득권을 버릴 각오로 지켜주겠다는 각오로 뼈를 깍는 각성과 개혁이 이루어져야 제2의 정인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로 인해 강자인 어른들의 권리가 어느 정도 침해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이를 겸허히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 누구의 권리도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들의 권리에 우선시될 수 없다. 약자에도 서열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약자들의 권리를 위해 스스로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싸운 용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이제 우리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때이다. 여러분은 그럴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가해자에게 엄벌을 가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아니다. 엄벌이 범죄를 예방하는데 생각보다 큰 효과가 없다는 사실은 사형폐지국가와 사형유지국가들 사이에 유의미한 범죄발생률의 차이가 없다는 것에서 증명되었다. 사형이 두려워 범행을 멈출 정도라면 애당초 범죄를 저지를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범죄에 대한 욕구로 그것을 실행하고자 하게 되면 처벌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죽기 밖에 더 하겠어’라는 심리상태가 아니라면 사형에 해당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어른 카르텔의 파괴 그것만이 아동학대를 막거나 최소화할 유일한 길이다. 학대자는 언제든지 나타나지만 그것을 어떻 막느냐는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는 아직도 ‘친권’ ‘양육권’에 대한 인식이 절대적이고 아동학대에 대한 심각성에 대한 인식 또한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3차에 걸친 신고에도 정인이를 구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학대 자체를 막지 못한다면 학대가 일어났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이 땅의 아동들이 조금은 더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바로 거기에 있다. 같은 어른이니까 부모니까 봐주고 이해하고 하는 어른 카르텔이 사라지는 날 우리 아이들의 삶은 더 행복하고 안전하게 될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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