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이 지배하는 오늘의 세계
목차
1. 서양의 지배와 그 영향
2. 정체성의 혼란이 가져오는 문제
3. 서양은 아직도 우리의 롤모델인가?
4. 전통과 외래문화의 조화가 필요
1. 서양의 지배와 그 영향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이 서양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지배한다는 것의 개념 정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일단 통상적인 개념으로 정의한다면 그렇습니다. 군사력 경제력 문화적인 지배력(이 경우 논란의 여지가 크지만)에서 서양을 따라올 세력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의 사고방식가지 서양 것에 물들어 있고 그로 인해 한국의 전통은 이 사회에서 그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영화 텔레비전 스포츠 매스컴 등 모두가 서양에서 비롯된 것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서양하면 미국과 유럽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호주나 뉴질랜드 캐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서양의 일부이긴 하지만 주류는 아닐 겁니다. 호주나 캐나다의 면적은 유럽을 능가하나 영향력은 미미합니다. 유럽은 면적은 미국에 비할 수 없이 작으나(러시아의 아시아 부분 제외하면)미국의 존재가 유럽 없이는 생각할 수 없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유럽이 없었다면 미국 땅에는 인디안들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을 것이고 또 서유럽의 기술과 문물이 없었다면 중남미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지역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기껏해야 카우보이가 소를 모는 농업국가 정도)
지난 백여년간 우리는 서양처럼 되고자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고 상당히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치마저고리는 미니스커트로 바뀌었고 바지저고리는 말쑥한 양복에게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기와나 볏짚으로 지어진 집들은 이제 고층 아파트로 바뀌어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커피와 양주를 마시고 침대에서 피곤한 몸을 쉬며 도보나 가마 대신 자동차나 기차로 먼 곳으로 이동합니다. 춘향전이나 홍길동전보다 톨스토이 헤밍웨이의 문학작품이 더 친숙하고 정약용 선생보다 마르크스나 칸트가 더 귀에 익숙하며 판소리나 창이 아닌 가요가 훨씬 더 즐겁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쌀로 밥을 지어먹고 김치찌개를 즐기는 점에서 한국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고기를 즐겨 먹고 빵을 아침식사로 삼고 우유나 치즈를 아무렇지 않게 섭취하는 등 그마저 왜소해지고 있습니다.
2. 정체성의 혼란이 가져오는 문제
앞으로 백년 후에 우리민족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내보일 수가 있을까요? 한국어를 쓰고(아마도 그렇겠죠?) 얼굴이 한국인의 얼굴이고(이마저 위험합니다. 성형으로 뒤바뀐 모습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예상합니다)한국의 역사를 배우고 애국가를 부르는 정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침에는 빵과 우유 커피를 저녁엔 스테이크와 콘스프를 먹는 모습이 일상이 되는 것은 아닐지 궁금합니다.
한 때 우리는 ‘효’를 중시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전세계문화를 전부 알 수 없으니 장담하기는 어려우나 우리처럼 효를 중시하는 민족은 아마 찾아보기 어려웠을 정도입니다. 모든 도덕윤리의 출발이 효였습니다. 효를 확대한 것이 충이었고 그래서 충효는 우리민족의 최고의 미덕이었습니다. 같은 동양의 민족이라도 충을 더 강조한 일본과 다르고 충효가 균형을 이루며 지켜진 중국과도 다릅니다. 서양사람들이 예전 우리나라를 효의 나라라고 부러워하기조차 했습니다. “며느리는 한국여성에서 고르고 싶다”고 한 외국인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효부상을 주며 효성스러운 며느리를 칭송하던 나라입니다. 물론 효자 효녀도 엄청나게 쏟아졌고요. 부모의 목숨을 구하고자 자신은 물론 자식까지 희생시킨 미담은 지천에 깔려있습니다.
왜 우리는 효에 목숨을 걸었을까요? 개인적인 견해이기 때문에 공감하기 어렵겠지만 과감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민족은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아왔습니다. 대륙의 회오리 바람에 시달린 중국, 나라가 분열되어 늘 전쟁으로 날이 새고 지던 일본과 달리 우리는 전쟁과는 인연이 적은 나라입니다. 우리 역사를 수난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근대사의 비극을 확장시킨 왜곡된 인식의 결과입니다. 지난 천 년간 우리나라에서 전쟁이란 거란과 몽골의 침입, 도요토미의 침입, 청나라의 침입이 전부입니다. 일본의 식민지지배는 침략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당한 거고 우리는 일본과 일전을 겨루지도 못하고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입니다. 한국전쟁이야말로 1000년 동안 우리가 격은 가장 치열한 전쟁이었습니다.
평화로운 역사 때문에 국가의 이름으로 민족이 단결하거나 지역이 단결해야 할 필요가 별로 없었습니다. 민족주의란 외침이나 정복에 의해 일어나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럴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국강병도 그다지 필요 없었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일도 그리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가문이나 가족이 단결의 중심이 되었고 그래서 효가 제일의 덕목이 된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일단 그렇게 문화가 형성되면 국가나 민족을 위해 싸워야 할 때도 가족이 우선이 되고 효가 강조됩니다. 식민지지배 분단 한국전쟁 등 민족적인 단결이 필요할 때도 우리는 국가보다 가족을 택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는 가족과 혈연이 중심이 되어 있는데 이러한 역사와 전통이 남긴 유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효는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중요한 덕목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효도를 하기 보다 이익을 얻으려는 경향이 무척이나 강해졌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심지어 자신의 자식까지 가져도 여전히 부모를 바라보며 뭔가를 요구합니다. 부모의 노후자금을 노려 효도를 조건으로 재산을 물려받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고 부모를 길바닥에 내모는 자식도 있다고 합니다. 웬지 ‘효도의 나라’에서 ‘불효의 나라’로 바뀌고 있는 느낌입니다. 효를 강조하지 않던 나라도 이런 짓까지는 하지 않으니까요.
이것이 모두 서양화의 영향은 아니겠지만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서양의 문화를 배워야 한다고 교육받았습니다. 민주적인 사고 합리주의 평등 심지어 침략의 역사마저 진취적 기상이라고 미화하며 따라하기를 배웠습니다. 평화와 안정을 천시하고 지배와 정복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가 우리에게 침투했습니다. 남북분단과 대립은 군사문화를 심어주었고 전쟁에 대한 저항감도 약화시켜 대체복무를 도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리 청년들은 대체적으로 진보성향이 강하지만 군대체복무와 동성애에 대하여는 한없이 보수적입니다. 동성애는 그렇다고 쳐도 대체복무를 거부하는 것은 군사문화의 침투가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닐까요?
문제는 서양의 문화를 흡수하면서도 그들과 다른 토양 때문에 그들의 미덕을 완벽하게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효도를 강조하는 문화가 사라졌으면 노인들의 삶을 보장하는 사회복지도 서양에서 도입되어야 하는데 그것에 대하여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은 것은 각자의 노후가 각자가 준비하는 것인데 지금의 젊은이들과 달리 미처 노후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많은 지금의 노인세대가 사각지대에 놓였습니다. 그렇지만 젊은 세대는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나아가 부모의 노후자금까지 빼앗지 못해 안달이 나 있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현실 아닙니까?
3. 서양은 아직도 우리의 롤모델인가?
이런 혼란을 겪으면서도 우리는 서양의 물질정신문화를 따라가야 보다 훌륭한 나라가 된다는 믿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유교는 우리를 근대화에서 뒤처지게 만든 원흉이기에 버려야 하는 공공의 적 1호가 되어 교육의 현장에서도 배척되었습니다. 삼강오륜을 배우던 우리와 달리 오늘날 어린 학생들은 무엇을 배우는 지 궁금합니다. 요즘 아이들의 태도를 보면 어른은 공경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있으니 사회가 더 각박해지고 흉악해진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입시에서 승리만을 배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도 그런 사고로 살아가니 자살률은 OECD국가에서 1,2위를 다투고 노인 자살률은 1위라는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서양의 기독교가 근대화를 가져온 것일까요? 기독교 성경에는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내용은 전무합니다. 도리어 이자를 금지하여 금융업발전을 방해하거나 심지어 일정 기간이 지나면 채무를 탕감하라는 반자본주의적 내용마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사회주의적 요소가 여기저기 보입니다. 부자관원에게 전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예수의 가르침 자신의 전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 삭개오라는 세금청부인의 이야기 모든 것을 팔아 공동생활을 한 초대교회 이야기 등 마르크스가 울고 갈 사회주의적 이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막스 웨버는 커다란 오류를 범했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를 통해 자본주의가 개신기독교에 의해 발달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반대인 것입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성경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가르침을 마구잡이로 가르쳤습니다. 개신교는 가톨릭에 비해 부담을 덜어주었기에 자본가들에게는 매우 반가운 것이 되었고 그러기에 수용하였던 것이죠. 웨버가 말하는 것처럼 개신교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는 것은 거의 코미디 수준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가톨릭을 믿는 나라들이 개신교를 믿는 나라보다 가난하기 때문에 나온 날조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개신교를 믿어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부자나라가 개신교를 편의상 믿은 것이고 가난한 나라가 가톨릭에 매달린 것 뿐입니다. 이탈리아는 과거에 가난했지만 오늘날 부유해졌습니다. 프랑스는 가톨릭국가지만 늘 부유하고 강했습니다. 아프리카에 개신교를 믿는 가난한 나라도 많습니다.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북유럽이 개신교를 믿게 된 것은 로마교황의 영향력이 약하기 때문이죠. 남유럽국가들은 로마제국의 영토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로마교화의 영향력이 컸죠. 북유럽 북서유럽은 거리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톨릭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쉬웠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유교가 자본주의발달에 장애라면 오늘날 동아시아국가의 발전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심지어 한 때 ‘유교자본주의’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중국, 일본 한국 싱가폴, 홍콩 대만 모두가 유교문화의 영향권에 있는 나라들입니다. 이들 지역말고 서양을 제외한 나라들 중에 놀라운 경제성장과 발전을 거두고 있는 곳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교자본주의라는 황당한 주장이 나온 겁니다. 동남아시아가 발전하면 이번에는 ‘불교자본주의’를 내세울 겁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역사상 가장 번영한 시대(적어도 물질적으로는)를 맞이했습니다. ‘유교자본주의’논리대로라면 우리는 더욱 유교에 충실한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입니다. 한국은 일본이나 중국보다 유교적 전통이 가장 강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삼국중에 가장 먼저 자본주의로 발전한 나라는 유교적 전통이 가장 약한 나라인 일본입니다. 유교자본주의론은 완벽한 허구는 아니겠지만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주장이라 할 것입니다.
작가 중에 담배피우는 사람이 많으니까 담배를 피우는 것이 작가가 되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담배를 피우면 생각이 잘 정리된다고 하니 글쓰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담배를 피우면 작가가 되기 쉬운 것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저처럼 담배는 전혀 피우지 않지만 글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담배는 잘 피워도 글은 제대로 못 쓰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4. 전통과 외래문화의 조화가 필요
과거에 세계 문명을 좌우한 것은 동아시아도 아니고 유럽도 아니고 중동지역입니다. 이슬람제국 오스만제국은 동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문명을 더하여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지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슬람 하면 가난하고 야만적인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이슬람교는 시대에 따라 그렇게 변화한 것일까요? 터무니 없는 이야기입니다. 종교는 죄가 없으며 공로도 없습니다. 종교는 종교일 뿐입니다. 그걸 가지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이지.
세계적 명저 ‘역사랑 무엇인가?’의 저자 E.H.카는 원인과 원인이 아닌 것을 구별하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실화는 아닐 겁니다) 어떤 사람이 밤에 가로등이 부실한 곳에서 길 건너 담배가게에서 담배를 사고자 무단횡단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에 대하여 사람들은 갑론을박을 벌입니다. 무단횡단이 문제니 무단횡단을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부터 횡단보도를 늘려야 한다든지 가로등이 부실해서 그러니 가로등을 충실하게 정비해야 한다든지 여러주장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합니다. 담배를 피우려고 한 게 문제라고. 그럼 금연운동을 하면 교통사고가 줄까요?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렵죠. 담배를 피우려고 한 것은 원인 같지만 원인은 아닙니다. 인과관계가 불명확하니까요. 술취한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자 길 건너 모텔로 가려고 무단횡단하다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연애가 문제니 연애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애와 교통사고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것이죠.
그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는 우리의 전통을 열심히 배척하고 그들을 따라합니다. 개신교가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것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겠죠. 우리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토착문화를 버리고 서양문화문물로 갈아타는 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부와 번영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서양의 지배는 물질만이 아니라 이렇게 정신 깊숙한 곳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마저 미화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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