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의 제1유형 - 생계형 성공
목차
1.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유대인의 성공
2. 생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 가져온 성공
3. 성공은 결국 시련이 가져다 주는 선물
4. 생계형 성공은 침략을 부르지 않는다. - 한국과 유대인의 성공
1.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유대인의 성공
유대인의 성공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그리 크지 않은데 비해 그들은 큰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성공한 유대인들의 리스트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이 사람도?’ 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분야를 석권하고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나 블라디미르 레닌이 유대인이라는 것은 너무나 뜻 밖입니다. 유대인하면 경건하게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마르크스나 레닌하면 무신론자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라는 비난도 서슴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들은 유대인 중의 이단아일까요?
유대인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노벨상수상자입니다. 30%정도의 수상자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인류전체에서의 비율에 대한 통계는 신빙성이 없어 보입니다. 어떤 방송에서는 0.2%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대략 1천 7백만정도이겠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숫자같습니다. 유대인의 역사가 못해도 4천년이상인데 고작 그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600만이 독일의 히틀러에게 살해당했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비슷한 역사를 가진 우리가 남북한 합하여 8천만 정도인데. 더구나 산아제한을 하지 않아 아이를 많이 낳는 그들의 인구가 출애굽 시대(BC1,500년경)에 장년 남성만(20-60세)60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전부해서 200만 정도로 추산됨. 그것도 400년전 이집트에 들어갈 때 70명이었는데 그렇게 늘어나는데-3만배-)3500년이 지난 오늘날 겨우 8배 밖에 늘지 않았다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총수가 1억이라 할지라도 30%면 엄청난 비율이 아닐 수 없습니다. 1억이면 전인류의 1.3%정도이니까 무려 약 33배가 되는 셈이죠. 인구비례로 보면.
독일의 히틀러는 유대인을 멸시하여 말살시키고자 하였으나 유대인은 인류에 엄청난 공헌을 한 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벨상은 인류의 평화와 발전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인데 유대인이 30%나 이를 수상했다면 유대인은 히틀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해악을 끼치는 민족이 아니라 인류에게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에도 가끔 등장하는 유대인음모론을 읽어보면 조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이 세상을 좌우할 정도로 힘을 가졌다면 유대인학살이 왜 일어났을까 하는 생각과 유대인이 기여한 공헌을 생각하면 신빙성을 가지기 어려운 주장이라 하겠습니다.
혹자들은 유대인이 세운 이스라엘의 폭력성을 들어 유대인들을 악한 민족으로 생각하기도 하나 이 또한 역사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생각이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땅을 무단 점거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돈으로 현지의 토지를 매입하여 차근차근 정착하였고 근면한 자세로 그들의 토지를 넓혀갔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주전에 성공적인 사람들이었기에 금전운영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주변 아랍인들보다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자 이에 대하여 박탈감을 느낀 아랍인들이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유대인들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우게 되었습니다. 압도적으로 수가 많은 아랍인들을 상대로 하는 전쟁을 수 없이 겪으며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조금은 표독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 그들도 많은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어느 의미로 피장파장이라 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난민의 발생도 유대인의 일방적인 잘못이 아니라 상호간의 대립과 투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 생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 가져온 성공
유대인들이 중동의 아랍국가들과의 싸움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생존에 대한 절실함이 적대감을 이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랍인들의 전쟁 이유는 적대감입니다. 물론 그것도 강한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미움은 나의 힘”이라는 말처럼 남을 미워하는 것이 악발이 같이 살아가는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선 사람의 생존에의 욕구보다는 약하다고 하겠습니다.
600만이 살해된 유대인은 더 이상 나라없는 민족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습니다. 히틀러는 극단적인 경우지만 드레픠스사건에서 알다시피(프랑스 장교 드레픠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스파이로 몰려 사형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나서 무죄방면 된 사건)유대인은 유럽에서 박해를 받고 살아온 민족입니다. 그들에게 팔레스타인 땅 그들의 인식대로라면 가나안 땅은 그야말로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그곳에서 물러나면 또 다시 차별과 박해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니 극강모드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것을 뒷받침하는 유대인 동료들의 지원과 경제력 그리고 강인함이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특이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토라와 탈무드를 배우고 자라나는 그들은 안식일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로 굳건한 민족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같이 자유와 평등에 투철한 나라에 살아도 그들은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세계 각국의 유대인들은 서로를 돕고 지켜주는 것에 힘을 다합니다. “진짜 유대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유대인들의 고통에 함께 괴로워할 줄 알아야 한다. 마치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온 몸이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그들은 세계 어디에서든 유대인이 당하는 고통을 좌시하지 않습니다.
3. 성공은 결국 시련이 가져다 주는 선물
이러한 것은 아무나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를 보십시오. 독립운동가들끼리 총질하며 서로를 죽이던 민족입니다. 상해 임시정부도 분열로 지리멸렬하였습니다. 유대인이라면 아마 하나로 뭉쳐 독립군을 조직해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전개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민족정신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과거의 전통은 말살되다시피하였지만 그렇다고 서양문화를 충실히 소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대로 “왕이 없으니 자신이 옳다는 대로 살았다”는 상태에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가 한중일 삼국 중 미국에 이민 가서 동포끼리 싸워대는 것은 우리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한국인이 미국에서 야채가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국인이 와서 바로 앞에서 야채가게를 하였습니다. 그것 자체도 이상하지만 그리고 나서 둘은 경쟁을 벌였습니다. 일본인이나 중국인 같으면 서로 타협을 했을 텐데 그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한쪽이 과로로 죽고 나서야 그 경쟁은 끝났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이미 언급한 대로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내외적으로 평화를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외적의 침입도 적었고 내부적으로는 오랫동안 통일국가를 이루며 안정된 사회를 구축하여 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나라는 고도의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이 역시 큰 약점을 만들어냈습니다.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단결하는 것이 어려워져 외부적인 시련에 약하였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끊임없는 내전으로 중국은 내우외환으로 민족이나 집단의 이름으로 단결하는 것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 자체는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나 외부적인 시련이 있을 때 큰 힘을 발휘합니다. 아주 나쁘게 말하면 우리는 고생을 너무 안해서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는 힘이 약하고 오직 가족만이 구심점이 된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가지고 우리나라와 민족을 무조건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만큼 우리는 평소의 삶이 평화롭고 행복했다는 것이니까요. 일본이나 중국처럼 내우외환에 시달리면서 단결력을 키운 것은 평소의 삶이 고되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은 이러한 환경속에서 성장한 것이니 그 자체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지요. 반대로 일본인과 중국인의 호전성은 반대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유대인의 성공은 결국 민족의 길고 험한 시련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지금도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앞에 서서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통곡을 하겠습니까? 구약성경에는 유대인이 겪은 엄청난 시련의 역사가 적혀 있습니다. 게다가 로마에 의해 결국 모든 유대인은 디아스포라를 강요당하고 2천년간 나라없는 민족으로 온갖 박해와 차별을 당했습니다. 그들에게 유대교는 희망이었고 토라(모세오경 또는 구약성경)와 탈무드는 삶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자신들과 다르다고 온갖 박해를 가한 자들이 문제이지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베니스의 상인에는 표독한 유대인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실상이라기보다는 편견의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런 유대인도 있었겠지만.
4. 생계형 성공은 침략을 부르지 않는다. - 한국과 유대인의 성공
유대인의 성공은 한마디로 말해 ‘생계형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로 상업과 금융업 그리고 학업에 열중했습니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니 제조업이나 농업(토지)에 종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학업은 미움을 덜 받을 것이고 지식은 죽지 않는 한 어디 가서도 쓸 수 있는 자산입니다. 노벨상수상자가 많은 것은 학습에 대한 전통이 강한 그들이 정치나 군사 같은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지식연구에 매달렸기에 나타난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닐가요? 국가가 있는 민족들은 영재들이 정치나 사회에서 리더가 되지만 유대인은 연구에 보다 많은 영재들이 집중했다는 것이죠. (차별 때문에라도 정치 같은 분야에 진출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우리는 상식처럼 시련이 인간에게 성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이라도 해도 다르지 않음을 유대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난한 집 아이들이 헝그리정신으로 공부한다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가난한 집이 대부분이니 우수한 아이들도 많았다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가난한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기 어려운데 그것은 가난한 아이들이 적어졌기 때문에 우수한 아이가 적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헝그리정신은 성공의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대인의 성공 역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 역시 비슷한 경험을 최근에 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경제대국 군사대국이 된 것은 근현대사의 비극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외부의 적이 나타나서 시련을 주니 살아남기 위해서 저항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성과를 올린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의 근현대사는 매우 불행하였다 할 것입니다.
학생이 시험을 보아야 한다는 것은 실력향상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업적에 대한 평가는 일을 열심히 할 동기를 부여합니다. 주부라는 일이 어려운 것은 시험이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적당한 보상이 주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련은 개인이나 민족에게 시험이나 평가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모든 민족이 시련을 통해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아니 오히려 대다수의 민족이 아닐까)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쇠퇴하거나 멸망하여 갑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앗시리아의 군대가 유대왕국에 침공하였을 때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민족과 나라를 짓밟아 버렸는지를 알리며 항복을 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유대왕국의 왕 히스기야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항전하여 독립을 지켜낸다. 성경은 이를 그들의 신 야훼의 기적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왔을까요? 토인비의 표현대로 ‘도전과 응전’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도전과 응전이 적당히 어울러질 때 문명이 탄생하고 성장합니다. 도전이 너무 강하면 또는 응전이 약하면 문명은 탄생하지 못하거나 소멸될 것입니다. 나중에 유대왕국은 결국 신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멸망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고구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대륙과 연결된 지역에서 발생하여 성장하였기에 삼국 중 가장 강한 나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들은 대륙을 통일한 당대 세계 최강의 제국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도 막아낼 정도로 강성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우방국 백제가 망하고 신라가 당나라의 침략에 대하여 후방원조를 하면서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도전이 더 거세게 쉴새 없이 이어지니 결국 응전할 수 없게 된 것이죠.
반면 조선은 오랜 평화로 인해 도전을 받지 않았기에 국력을 성장시키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기에 도요토미의 침략과 청나라의 침략에 쉽게 허물어지고 말았죠. 그나마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의 도움과 청나라의 대륙에 대한 야심 때문이었습니다. 시험이나 평가 없이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처럼 도전 없이 국력을 키운다는 것은 동기면에서 매우 힘들 것 입니다.
생계형 성공의 바람직한 점은 침략적인 성격이 약하거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나 유대인에게는 세계정복이나 침략에 대한 열망 따위가 보이지 않습니다. 출발이 생존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아울러 성공은 침략이나 지배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에 대한 반증이기도 합니다. 성공을 이유로 악행을 합리화시키는 것은 잘못임을 이러한 사례를 가지고 강력히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더 큰 성공을 이룬다면 다음에 소개하는 팽창형 성공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입니다. 독일은 생계형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팽창형으로 발전하여 끔찍한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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