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기본소득과 함께 떠나는 미래여행(8)

닥터 양 2019. 11. 25. 01:30

5장 소크라테스 다른 대안을 반박하다. (2) 사민주의

국가가 시민의 경제적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에 저도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그렇습니다. 국가의 의무는 국민의 삶 전체에 걸쳐 있다고 봐야 하니까요. 하지만 국가가 국민의 삶을 지켜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피고가 말한 것처럼 시민 모두에게 아무 조건 없이 충분한 액수의 기본소득을 나눠줘야 한다는 것이 유일한 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한 최선의 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또 다른 증인을 세우고자 합니다. 나와 주십시오.”

또 다른 증인이 등장하여 선서를 하고 증인석에 앉았다.

증인께서는 국가가 국민의 삶을 지켜주는 것에 대단히 관심이 많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국가의 역할을 정의하고 있으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국가의 역할이라기보다는 국민이 국가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국민과 국가가 하나가 되어 자신들을 지켜나간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이상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국민과 국가가 하나이기에 국가의 성격은 국민이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이 국가로 하여금 자신들을 모든 면에서 지켜주는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제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국가라 할 것입니다. ”

오 그것 참 멋진 이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맞습니다. 민주주의라면 당연히 국가는 국민이 결정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국가의 역할도 국민이 정합니다. 그런 국민의 역할을 가장 적극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증인의 생각이라 이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표현합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심지어 죽은 이후에도 국가는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여 지켜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국가 아닐까요? 왜냐하면 국민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니까요. 수단이란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국가는 수단이고 국민은 주인이라고 하는 것이군요?”

맞습니다. 맞고요. 그런데 그것을 거꾸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치 국민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

그렇다면 증인의 입장에서 볼 때 소크라테스 피고의 기본소득론은 어떻습니까? 어떻게 보면 비슷한 입장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제가 증인과 처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분명히 자신과 소크라테스피고의 방식은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다른가요?”

소크라테스씨의 기본소득론은 기본적인 생각에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국민이 주인이기에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국가이고 따라서 국민의 삶을 지켜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실제로 저의 생각을 실현하는 나라에서는 국민들에게 여러 가지 형태로 돈을 나눠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뭐가 근본적으로 다를까요?”

저희는 돈을 무조건 누구에게나 나눠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돈을 받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그 돈을 모으는데 당사자가 어느 정도 공헌을 했느냐 입니다. 공헌을 전혀 하지 않은 경우에는 돈을 받을 자격이 제한되거나 없습니다. 공헌을 많이 한 사람들은 보다 더 많이 돈을 받을 권리를 갖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방식은 구성원 모두가 각자 능력에 따라 공헌을 하고 그에 따라 필요한 상황이 오면 돈을 돌려받는 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소크라테스씨의 경우는 공헌에 관계없이 무조건 같은 액수를 받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 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증인이 말하는 제도라면 모두가 공헌을 해야 한다는 것이네요.. 그 공헌을 위해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그렇습니까?”

, 우리는 모두가 일을 한다는 전제로 그렇게 하도록 정한 것입니다.”

좋습니다. 소크라테스피고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저도 기본적으로는 증인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모두가 일을 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누구나 일을 할 수 있느냐 입니다. 아시다시피 노예들의 활용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들에 대한 교육이 철두철미하게 행하여지는 바람에 일반시민들이 일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을 해야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전제는 잘못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증인의 생각에는 누구나 일을 해야 한다는 노동윤리가 강력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노예들에게 일을 맡기고 자신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활동에 전념하고 있죠.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정치라든지 문화라든지 그런 것 말입니다.

  반대로 일을 하면서도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주부의 경우 일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로 인해 대가를 직접적으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녀들은 남편의 부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는 대가를 받는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의 경제력이 실제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정치활동은 무보수로 봉사하게 되어 있지만 매우 가치 있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절대적으로 진리도 아니고 의무도 아닌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 바뀌는 상황윤리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증인의 생각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식의 노동윤리에 얽매여 누구나 일을 하고 돈을 벌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윤리는 부자들이 일반시민들이나 노예를 착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들은 노동을 거부하고 있으니 모순이 아닌가요? 그렇게 신성한 노동이라면 자신들이 먼저 해야죠.

  동양의 어느 나라에 유명한 사상가가 있는데 그가 어느 날 논쟁을 하였다고 합니다. 상대는 노동을 신성시하였고 특히 농사일을 천하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여 누구라도 농사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상가가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대들은 농기구를 직접 만드는가?”라 고. 상대는 그런 것을 만들면 농사에 지장이 있어서 만들지 않고 사서 쓴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사상가는 맞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본분이 있으니 그것에 충실하려면 농사를 지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그대들이 농기구를 사서 쓰는 것처럼 우리도 농산물을 사서 먹을 뿐이다라고 답하였답니다.

  노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도 편견이고 또 돈을 버는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 역시 편견입니다. 또 돈을 받고 하는 노동 중에는 값어치가 없고 오히려 사회에 유해한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노동과 소득에 의해 차별하려고 하는 증인의 생각은 진정한 의미로 국민의 수단으로서의 국가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을 하지 않아도 지급되는 것이 기본소득이라면 증인의 그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노동하지 않을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노동을 할 기회가 줄어드는 것도 있지만 노동 대신에 다른 것에 인생의 의미를 두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 그것이 증인의 노동중심주의와는 다릅니다. 국가가 국민의 수단이라면 국민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노동을 거부하고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은 국민에겐는 그런 것을 보장해주어야 진정한 국민의 수단이 되는 국가 아닐까요? ”

증인 소크라테스 피고인에게 반론을 제기하고 싶으신 점은 없으신가요?”

듣고 보니 소크라테스씨와 저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노동의 기회가 줄어드는 지금 노동과 연동해서 보장을 준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일 수 있다는 지적은 참으로 날카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 점이 고민이었는데 좋은 해결책을 주신 것 같습니다. 사실 노동의 기회를 아예 가지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아예 노동을 한 적이 없으니 노동에 따른 보장도 없는 거죠.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만일 기본소득이라는 형태로 국민의 삶을 보장해준다고 한다면 과연 충분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대안은 국민의 삶 전반에 보호막을 쳐주는 것입니다. 병이 들면 치료해 주고 집이 없으면 집을 제공하고 노동력을 상실하면 생활비를 제공하고 교육 등을 무료로 시켜주고 하는 식의 제도입니다. 그런데 그냥 돈을 쥐어주고 그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면 과연 그가 제대로 자신의 삶을 지켜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

좋은 질문입니다. 맞습니다. 돈을 주고 모든 것을 알아서 하라는 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몫 돈을 건네주고 알아서 그것을 활용하도록 하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제 동료 중에. 또 어떤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돈을 전해주고 모든 것을 끝내자고 합니다. 그게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한꺼번에 돈을 건네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만일 그가 그 돈을 잘 운용해서 더 큰 돈으로 만든다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현명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해야 현상유지이고 불행히도 돈을 까먹거나 아예 날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따라서 몫 돈을 주자는 생각은 절대 찬성할 수 없습니다. 기본소득은 삶을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에 죽는 날까지 정기적으로 전해주는 것이 맞습니다.

  돈을 주는 것으로 모든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 역시 곤란합니다. 일부 부자들 중에 기본소득에 동의하면서 그것을 빌미로 국가의 책임을 축소시키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차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면 돈 몇 푼 쥐어주고 끝내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것 같습니다. 엄밀히 계산하면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병이라도 나서 눕게 된다면 그의 소득은 전부 병원비로 사라질 것인데 그럼 그의 나머지 삶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 역시 증인처럼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정신에 동의합니다. 생노병사 그리고 교육 주택 등에 걸쳐 국가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 기반 위에 기본소득을 주어 그에게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국가의 책임의 종결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코 돈만 쥐어주고 끝내자는 생각은 없습니다. “

그렇다면 저와 소크라테스씨 사이에 이견은 그리 크지 않다고 봐야 할 것 같네요.”

그렇습니다. 노동을 절대시하는 것을 제외하면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마 저의 기본소득 생각은 증인의 생각을 보다 진화시킨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증인의 생각은 일자리가 넘치고 그래서 누구라도 노동을 할 권리를 누리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노동에 대한 대가가 커지니까 부자들은 노동 그 자체를 노예라고 하는 무보수노동자들에게 전가하여 노동의 대가를 치르기를 거부한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노동 없이 소득을 달라고 요구함으로써 그들의 꼼수에 대항하는 길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어쩌면 이런 일종의 장군멍군식으로 전개된 것이 아닐까요?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려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착취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수 싸움이 계속된 것이죠. 기본 소득은 노동비용 자체를 없애려는 부자들의 꼼수에 대한 신의 한수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