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교량이 아니라 문명의 온실
목차
1. 한민족= 수난의 민족은 과장된 주장일까?
2. 반도=교량이라는 주장의 허구성
3. 문명의 온실이 된 한반도
4. ‘소중화’의식은 문명의 ‘온실’이 가져온 자연스러운 결과
5. 문명의 온실에서 기지로 변신하자.
1. 한민족= 수난의 민족은 과장된 주장일까?
어느 미국인 한국사학자가 우리 민족이 수난의 민족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가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수난의 역사’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정말 수난의 역사를 가진 민족들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하는 취지의 동영상 강의를 접했을 때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그는 고대 유대인이나 중국의 한족같이 외침을 많이 받은 민족들을 예를 들면 우리의 주장을 오해라고 비판하였다. ‘수난의 역사’ 등의 단어를 일부러 한국어로 말하기도 했는데 미국인의 발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유창한 것만큼 그의 주장에 공감이 느껴졌다.
한족(漢族)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들은 중원을 본거지로 오늘까지 중국사의 중심을 이루어 왔다. 중국 역사는 알다시피 중원과 북방의 다툼으로 점철되었다. 저 거대한 만리장성도 중원의 제국들이 북방민족을 막기 위해 세워져 오늘에 이르렀다. 북방의 민족이 만리장성을 돌파하고 중원을 침입하는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났고 그중에 몇 번은 중원을 자기 손에 넣기도 하였다. 5호16국시대의 북방의 왕조들 그를 잇는 수나라 당나라(지배자들이 이민족이라 함) 그리고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 마지막으로 여진족(만주족)의 청나라 등이 그것이다.
한족이야말로 거대한 천혜의 토지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수난의 역사’를 겪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북방의 춥고 건조한 토지에 비하여 중원은 적절한 기후와 강수량 기름진 토지를 가진 낙토였다. 오늘날 중국이 10억이 훨씬 넘는 인구를 가진 세계 최다의 인구대국이 된 것도 이러한 중원과 그곳에 4000년 이상 살며 확대하여 온 거대한 한족 때문이다. 당연히 그 땅과 인구는 북방 민족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그것은 결국 ‘수난의 역사’를 한족에게 강요한 것이다. 로마제국과 게르만의 관계도 이와 비슷했지만 로마제국은 사라지고 중원제국은 이어져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는 점에서 한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유대인의 역사도 비록 규모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지만 마찬가지이다. 유대인들이 고대 왕국을 세운 가나안(젖과 꿀이 흐르는 땅)지금의 이스라엘 땅은 주변 지역에 비해 농사와 목축에 적합한 곳이라 고대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이민족들과 전쟁이 벌여야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블레셋이라 불리던 민족과의 대결이었다. 구약성서에는 유대인과 불레셋과의 다툼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두 민족의 대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너무나 유명하다.
결국 유대인들은 외침에 견디지 못하고 이 지역에서 추방되어 세계를 떠돌게 된다. 앗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에 의해 지배를 받기도 하고 독립을 되찾기도 하던 유대인들은 마지막으로 세계의 제국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포용적 통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저항을 하였고 결국 서기 70년경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로마는 유대인을 뿌리뽑는 강경책을 취하였고 결국 예루살렘이 철저히 파괴되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에 살 수가 없게 추방되고 말았다. 그때 남았던 벽들이 오늘날 ‘통곡의 벽’이 되어 유대인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이 정도 살펴보면 우리 민족이 생각보다 외침을 많이 받지는 않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유사이래 우리 민족은 수 천 년간 민족과 국가를 보전했고 송두리째 지배를 당한 것은 일제 36년이 유일하였다. 한사군의 지배를 들 수도 있으나 그것은 일부에 대한 지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중원제국, 북방민족과의 다툼을 전개하며 국력을 신장시켰기 때문에 침략을 당할 기회가 많았으나 결국 고구려가 중원제국인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이어 일어난 발해도 거란족의 요나라에 의해 멸망하고부터는 이러한 북방의 패권쟁탈에서 소외되어 외침에 시달리는 일이 현격히 줄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활동 영역이 한반도에 한정된 시기 이후 북으로부터의 외침은 손에 꼽을 정도로 줄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난 정이 돌 맞는다”고 하지 않나? 한반도로 영역이 축소되고 나서는 돌 맞을 일이 줄어든 것이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의 요나라의 침략, 몽골족의 침략, 여진족의 후금과 청나라의 침략 정도이다. 북방이 아닌 남방의 침략으로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일본에 의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규모는 작지만 왜구에 의한 약탈이 빈번했기는 하지만 이것은 외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비슷한 케이스로 바이킹에 의한 침략을 들 수 있겠는데 바이킹처럼 이주와 식민을 노린 것은 아니기에 침략적인 성격이 약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리를 ‘수난의 민족’이라 여기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 근현대사의 수난이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난 150년간 우리는 너무나 많은 수난을 겪은 것이 사실이다. 열강의 위협과 일본의 침략 식민지지배 그리고 남북분단과 한국전쟁 그리고 오늘의 대치상황에 이르기까지 정신없이 보낸 150년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우리의 역사 전체를 ‘수난의 역사’로 기억하고 따라서 우리민족을 ‘수난의 민족’이라고 규정한 것은 아닐까 싶다.
수난의 민족은 두 가지 길을 걷게 되는 것 같다. 하나는 민족 자체가 소멸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사라진 민족을 무수히 볼 수가 있다. 중동에 있던 많은 민족들이 민족으로서의 생명을 잃고 사라졌다. 북방민족인 여진족 거란족 등도 오늘날 민족으로서의 존재를 찾아보기 어렵다. 또 하나는 한족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은 경우인데 이것은 그 민족이 강한 힘을 보유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족은 서양의 침략 이전에는 동아시아의 맹주였고 국력도 막강했다. 주변과의 싸움으로 강인한 민족으로 거듭날 경우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남아 오늘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이 두 가지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은 소멸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강인한 민족으로서 오늘까지 유지된 것도 아니다. 특히 조선 시대의 경우 우리 민족은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외침조차 스스로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허약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허약함의 끝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였다. 그 과정조차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였음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 민족=수난의 민족이라는 주장은 근현대사의 비극이 낳은 과장된 주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2. 반도=교량이라는 주장의 허구성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우리나라의 지형적인 조건인 반도가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식민지지배자들은 이것을 반도성이라는 것으로 규정하여 우리민족을 폄하하였다. 아마 그들은 우리가 섬도 아니고 대륙도 아닌 어정쩡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주변의 영향을 받아 주체적인 역사를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내용인 것 같다.
한편 우리는 우리가 수난의 민족이 된 것이 우리 민족의 무대인 한반도가 대륙과 해양의 교량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한반도가 해양세력이 대륙에 진출하거나 대륙세력이 해양으로 진출할 때 지나가는 다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해양세력 일본의 침략 대륙으로부터의 침략에 시달린 민족의 역사를 지리적 결정론으로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이 설명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기 어렵다. 해양세력이라고 해 봐야 일본 뿐이 없는데 그것을 가지고 일반화시키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까 싶다. 혹시 미국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면 이 역시 역사에 근거한 주장이 아닌 것 같다. 미국은 동아시아 대륙에 세력을 넓히려고 하지도 않거니와 과거 중국에 욕심을 가지고 있을 때조차 한반도를 경유하지는 않았다. 미국만이 아니라 일본을 제외한 다른 열강들도 굳이 한반도를 경유할 필요는 없었고 그런 시도도 없었다.
반대로 대륙세력의 침략이 한반도를 교량으로 하였는가 하면 그 역시 역사적 사실에 부합된다고 보기 어렵다. 고대에 거슬러 가면 한반도를 거쳐 대륙세력이 일본으로 진출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이 그 대표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고대 이후 대륙세력이 한반도를 교량으로 이용하여 일본이나 태평양으로 진출하고자 시도한 사례는 없다. 기껏해야 몽골의 침입 정도인데 그 역시 진출이 아니라 그저 위세를 떨치려는 쿠빌라이의 허영심의 결과일 뿐이다.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중원제국(당나라의 고구려 멸망 이후 없다)이나 북방민족들의 경우도 그들이 해양진출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들의 목표는 한결같이 중원이었으며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도리어 우리는 한반도라는 천혜의 지형적인 조건 때문에 ‘수난의 민족’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지도를 보면 한반도는 대륙의 커다란 연결 가운데에서 제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주에서 중원으로 이어지는 대륙과 한반도는 분리 되어져 있는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하면 한반도가 대륙과 분리되어도 한반도와 대륙 양쪽 모두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않게 되어있다. 그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이야 어차피 섬이니 당연한 사실이지만 한반도는 대륙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그 사실을 발견하기 어렵다.
동아시아의 대립구조는 중원과 북방의 대립과 화합을 축으로 하고 있다. 중원의 제국이 강할 때는 북방민족들이 천자에게 복종하는 대신 무역 등을 통한 교류를 시도하였고 약해지면 중원을 향해 무기를 들었다. 갑자기 북방이 강해져 피바람이 불 때도 있었다. 청나라의 경우 두 가지가 겹쳐 중원을 정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북방과 중원 그 어느 쪽에도 지리적으로 속하지 않았다. 따라서 북방민족으로서는 한반도를 경유하지 않아도 중원으로 진출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민족의 존재를 무시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전쟁을 걸어온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정복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배후세력을 견제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중원국가에 사대를 해 온 우리민족이 북방민족에게는 중원국가와의 연합을 통해 협공을 가할지 모르는 세력이라 여겨졌고 따라서 중원과의 일전을 앞두고 그 가능성을 사전 봉쇄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 발해의 멸망 이후 우리 영역인 한반도를 목표로 하는 침략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심지어 도요토미의 침략조차 궁극적인 목표는 중원이었지 한반도는 아니었다.
3. 문명의 온실이 된 한반도
결과적으로 한반도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평화로운 지역이 되고 말았다. 북방민족과 중원국가의 대립, 북방민족끼리의 충돌, 중원 내에서의 잦은 내란과 왕조의 교체 등으로 대륙은 한반도만큼 평온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한 연결고리에서 벗어나 있던 한반도에는 참혹한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동아시아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당히 평화로운 지역이었던 것도 한반도의 평화에 중요한 원인이었다. 중원국가의 절대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한 이른바 조공체제가 기본적인 질서를 유지 시켜주었다. 중원국가들은 자신들의 풍부한 자원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문명의 유산으로 인해 이러한 질서를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강자의 여유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일방적인 희생은 아니었다. 질서와 평화는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열매였고 따라서 중원제국의 역할은 그 열매를 위한 대가였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지역과의 비교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유럽은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그러한 역할을 해 줄 제국이 나타나지 않아 춘추전국시대처럼 끊임없는 대립과 전쟁의 역사를 써야 했다. 일본 역시 고립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조공체제 밖의 존재로 머물렀기에 내부적인 혼란과 외부에 대한 배타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대립과 전쟁의 나라로 오랫동안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유럽에 제국이 없었다면 일본은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결국 평화를 유지시켜 줄 체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양 지역의 역사는 유사성을 갖게 되었다.
한반도가 주요 활동무대가 되면서부터 우리 민족은 사대주의를 통해 이러한 질서의 최대의 수혜자가 되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이 굴종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은 부인하기 어려우나 그로 인해 문명과 평화를 제공받았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것은 북방민족들의 부침과 달리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서 오랜 역사를 써가며 오늘에 이른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평화로운 동아시아는 오랫동안 세계 문명의 첨단을 구가할 수 있었다. 넓은 땅과 높은 생산력 그것을 기반으로 한 많은 인구 이것으로 고도의 중원문명(중화문명)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중원문명은 동아시아 각국에 전달되어 지역적 특화를 거쳐 정착하게 되어 동아시아의 지역적 정체성인 ‘동아시아문명’으로 발전하였다. 마치 가족이 비록 완벽하게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지만 외부자의 눈에는 닮았다고 여겨지는 것과 같다. 모두가 한자를 사용하고 논어 맹자를 외웠으며 외부에서 들어온 불교를 동아시아의 것으로 만들어 숭배하는 등의 공통점은 동아시아 문명만의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동아시아의 평화라는 이중의 혜택을 누린 한반도는 문명을 가장 잘 실현시킬 수 있었다. 문명이란 야만의 반대일 것이다. 야만은 폭력 무질서 약육강식 침략과 지배 같은 것이라고 할 때 문명은 비폭력 질서 절제와 배려 평화 공존공영이라 할 수 있다.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인 중원국가들은 이러한 가치를 완벽하게 구현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의 평화는 자신들의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중원은 자신들의 문명을 지키기 위해 야만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가 없는 아이러니한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는 문명의 유지에 야만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우리 민족이 특별히 뛰어나거나 선하여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조건이 겹쳤기 때문에 찾아온 행운이었다. 아주 드물게 야만이 필요해져도 그것을 구현하기란 힘들었다. 그것은 문명이 너무나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 위기에 갑자기 폭력성을 발휘해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결국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굴종이나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고 그것은 실제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보존해 주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한반도는 동아시아문명의 온실이 되었다. 온실이란 춥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외부와 달리 식물을 안정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설비이다. 평온한 환경의 한반도는 그런 점에서 문명이라는 식물을 가져와 안정적으로 자라게 하는 역할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곳은 식물의 성장과 생존에 있어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온실처럼 문명에게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온실 속의 화초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외부로 뻗어나 갈 수 있는 강력함은 없었지만 문명으로서의 가치를 가장 잘 구현되고 있었다.
4. ‘소중화’의식은 문명의 ‘온실’이 가져온 자연스러운 결과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가졌던 ‘소중화’의식은 그런 시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중원국가 중에 가장 한반도국가와 유사했던 나라가 송나라이다. 송나라는 야만과는 완전히 거리를 둔 유일한 중원국가이다. 공교롭게도 송나라와 조선의 공통점은 성리학이다. 성리학을 꽃피운 송나라 그것을 이념으로 발전한 조선 그들이 구현하고자 한 것은 철두철미한 문명이었고 그래서 두 나라 모두 문약한 나라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리학은 동아시아 문명의 정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송의 뒤를 이어 문명을 지켜온 명-송나라만큼은 아니지만 이 역시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나라-의 멸망은 동아시아의 문명을 제대로 구현할 나라가 오직 자신들 뿐이라는 위기감을 조선의 지배층에게 갖게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큰 오해였다.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통해 우리를 짓밟았던 야만의 모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중원으로 들어가 주인이 되자 중원문명의 계승자를 자처하게 된다. 그것은 과거제를 거의 폐지하고 중원문명을 무시한 원나라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청나라가 300년 가까이 –사실 더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 서양이 나타나지 않았으면-유지된 비결은 바로 그것이었다.
왜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 명나라는 이민족 국가 원을 내몰고(멸망시킨 것이 아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원의 멸망은 공식적으로는 청나라에 의해 이루어졌다) 중원을 지배한 나라이다. 물론 한족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나라이며 현재도 중국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한족입장에서)공교롭게도 명과 조선은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기에 조선에게 중원은 곧 명나라였다. 고려와 달리 중원의 문명에 철저히 지배된 조선에게 명나라의 멸망과 이민족 청나라의 중원지배는 그저 왕조의 교체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라도 소중한 중원문명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생긴 ‘소중화’의식은 동아시아 문명에 대한 수호자라는 자부심을 통해 문명의 온실역할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행하게 하였을 것이다. 종교와 사랑은 핍박하면 할수록 강해진다고 한다. 그들에게 의지할 곳이 없어진 이상 자신들은 문명의 최후의 보루가 된 셈이다. “우리가 지면 세상은 야만의 천국이 될 것이다”라는 위기의식은 자신들이야말로 문명의 유일한 수호자라는 자부심과 어울려 더욱더 온실의 열기를 올렸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피비린내나는 정쟁이 명분 싸움으로 점철된 것은 이러한 ‘소중화’의식과 무관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전기의 그것은 명분 싸움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권력투쟁이었다. 사화와 임진왜란 전의 당쟁에서 명분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후기의 당쟁에서는 명분만 보인다. 결국 당쟁의 최후승자가 율곡 이이라는 성리학의 대가의 후예들인 서인인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물론 명분이 나중에 수단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우암 송시열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러한 점을 살펴보자. 송시열은 비록 오늘날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한 때 ‘송자’라고 불리던 인물이다. 그것은 서인의 창시자 이이도 받지 못한 영광이었다. (이자라는 말이 이상해서인가?)그가 송자로 불린 것은 오직 하나 그들이 생각하는 명분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9도 장원을 한 천재 이이보다 송시열의 학문 수준이 높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그는 성리학의 명분을 위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점에서 이이보다 더한 존경을 받은 것 같다.(적어도 서인들에게는)
송시열이 살아간 길은 성리학의 창시자 주자의 그것처럼 오로지 유교적 가치라는 문명의 결정을 지키고자 한 길이었다. 그가 평생 관직에 있었던 기간도 그리 길지 않다. 주로 재야에서 서인 그리고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국 그가 사약을 받고 죽은 것도 이러한 가치 때문이었다.(엄밀하게 말하면 목졸려 죽었다. 사약을 두 사발 마셔도 죽지 않자 그렇게 했다고 한다. 80대 노인이 왜 그리 건강했는지) 성리학의 창시자 주자가 금나라에게 중원의 핵심부를 빼앗기고 세워진 송나라에서 문명의 핵심인 유교를 성리학을 통해 빛내려고 한 것과 ‘송자’가 중원이 야만의 청나라의 지배에 들어간 시대에 주자의 이념을 목숨 걸고 지키려고 한 것은 –한편 ‘중화의식’ 다른 한편은 ‘소중화의식’ 게다가 두 나라는 북벌론을 내세운 점에서도 같음-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 지배층의 정신적 시계는 송나라 주자의 시대에서 멈추었다. 그들은 공자의 정신을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이어받아 이를 전파한 주자에 의해 문명은 완성된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주자의 해석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이해하는가가 유일한 관심이었고 그렇지 못한 것은 이단이요 사문난적이라 여겼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공자의 말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것은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것’같이 위험하고 불순한 시도일 수 밖에 없었다.
온실은 창조가 아니라 평안한 환경을 통해 식물의 순조로운 성장을 도울 뿐이다. 동아시아 문명의 온실이 된 조선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는 정체를 의미할 수 있다. 양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은 제대로 된 성장이라고 보기 어렵다. 혁신이야말로 진정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하면 우리가 사는 21세기가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명에 비하여 더 훌륭한 정신문명을 소유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성리학의 구체적 주장은 오늘날과 맞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공자와 맹자 주자가 추구하려던 가치가 과연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인지는 의문이다. 힘과 권력에 의한 정치와 생활을 지양하고 인의도덕을 통해 모든 것을 결정하자는 그들의 주장이야말로 문명의 본질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만 그것을 실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대학과 대학원 시절 논어, 맹자. 대학을 두루 읽었다. 원래는 한문 공부를 위해 읽은 것이나 놀랍게 그 내용은 2천 년이 훨씬 지난 지금 읽어도 그리 위화감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에 와 닿았다. 마찬가지로 오래된 기독교 성경을 읽어도 마음에 와닿는 것처럼. 유교 경전은 기독교 성경과 달리 신비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오히려 더 현실적인 가르침이었다고 기억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맹자가 양혜왕에게 이익이 아니라 인의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설파한 대목으로 그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유교를 구태의연한 가르침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 경전을 제대로 읽어 본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문제는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소중화’사상은 문명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이를 구현하고자 한 의식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의 온실’의 관리자라면 자신이 가진 문명이라는 식물에 대한 무한정의 애착이 필요할 것이다. ‘중화’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조선의 지배층은 마지막 문명의 보루인 조선이 ‘소중화’로서 문명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감을 갖게 되었다. ‘소중화’의식을 그저 명나라라는 중원제국에 대한 맹목적 사대주의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물론 ‘소중화’의식은 조선후기의 역사를 교조주의적인 상태로 만들어 근대사의 비극을 가져왔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 야만의 국가로 전락하지 않게 한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5. 문명의 온실에서 기지로 변신하자.
기독교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 중의 하나가 은혜이다. 은혜란 대가를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무상으로 제공되는 선물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이 은혜이니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한 그 은혜를 모두와 나눠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 중 하나이다. 가장 큰 은혜란 바로 구원이다. 인간은 모두 죄를 지었기에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었지만 독생자인 예수로 하여금 십자가에 죽게 하여 죄값을 치루게 하였으니 이를 믿는 자는 죄가 용서되어 지옥이 아닌 천국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 바로 구원의 은혜인 것이다.
우리 민족은 그런 의미에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평화라는 은혜를 받아 그로 인해 문명의 온실이 될 수 있었다. 우리의 평화는 우리의 위대함이나 선함의 대가가 아니라 그야말로 거저 얻은 은혜인 것이다. 문명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문명의 제조원은 우리가 아니라는 점도 은혜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남의 것을 가지고 운좋게 그것을 잘 보관하여 발전시켰으니 이중 삼중의 은혜를 입은 셈이다. 누구에게? 그건 모른다. 하나님일까? 알라일까? 아니면 그것도 아니고 절대정신일까? 적어도 마르크스가 말한 물질은 아닐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도 그렇듯이 우리의 은혜도 받는 것은 공짜이지만 그것을 잘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대가는 없지만 의무는 있다면 이 역시 대가성인가? 하나님이 아닌 제 삼자에게 나누라고 하면 제3자 뇌물공여죄에 해당되는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런 뇌물이라면 무소불위의 대한민국 검찰도 눈감아 줄 것 같다.
우리는 은혜를 거저 받았지만 그 은혜를 누리면서 많은 고난도 받아야 했다. “은혜에는 고난이 따른다”는 것 역시 기독교 교리이다. 우리는 문명의 온실을 지키고자 외침을 받고 식민지가 되었다. 또 남북이 갈라지고 전쟁을 겪었으며 오늘도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외세의 간섭에 시달리고 있다. 자기 나라의 일을 완전히 자주적으로 정하는 나라는 세상에 없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라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너무 없다. 우리 제사에 배 놓아라 감 놓아라 하며 오지랖을 떠는 자들이 너무 많다. 답답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문명의 온실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국력을 침략적으로 상요하지 않았음에도 세계적인 강국의 대열에 들어섰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들이 사고에 침략이나 지배란 단어는 일상적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남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것도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에서도 이런 나라는 없다. 전략적 사고보다 윤리적 도덕적 사고를 중시하는 나라 이런 나라 또 없습니다. “세상에 없는 차칸 나라”인 셈이다. 물론 이 착함은 우리의 선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산물이니 겸손히 이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제 세계를 향해 문명을 전하는 기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고 소극적으로 온실 속의 화초만 재배할 것인가? 은혜를 지키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의무는 바로 전하는 것이다. “향기롭구나 전하는 자의 발걸음이여” 세계는 문명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 길의 선봉에 서서 좀 더 빠르게 문명이 세계를 지배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거이 거저 받은 은혜인 평화와 문명에 대한 우리의 의무인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심판을 받을지 모른다. 우리에게 은혜를 준 존재에게. 그것이 하나님이든 알라든 절대 정신이든..그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부지런한 종아. 너에게 축복의 잔치의 자리를 주겠노라”고 칭찬받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 그것은 힘이나 권력에 의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문명의 은혜가 주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에의 믿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 능하지 못한 것이 없다”라는 말을 믿고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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