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영화 ‘기생충’ 의 가족은 우리 사회의 그림자일까?

닥터 양 2019. 11. 23. 18:16

영화 기생충의 가족은 우리 사회의 그림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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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0대 부모가 40대 자식의 부양자?

2. 문제는 부모 자식간의 의존관계이다.

3. 사회를 기생충천국으로 만들어 버리는 의존관계

4. 이제 그만 아름다운 모정에서 벗어나자.

 

1. 70대 부모가 40대 자식의 부양자?

  부모가 자식을 평생 부양해야 하는 시대가 열렸다. 원래는 나이 어린 자식을 부모가 부양하고 나이든 부모를 자식이 부양하는 것이 맞다. 나이든 부모는 육체적으로 약해져 스스로를 부양하기 어려우니 젊은 자식들이 부양하는 것이 오랫동안 보편적인 불문율이었다. 그 자식들은 그들의 자식에게 다시 부양을 받고 그것이 릴레이처럼 이어진다면 늙음이 삶의 공포나 무게가 되지 않는다. 삼대가 함께 살며 서로를 돕는 모습은 불과 수 십년전만해도 그리 낯설은 풍경이 아니었다. 교과서나 드라마 영화에서도 자주 접할 수 있었던 모습이다.

  하지만 어느덧 관계가 역전이 되어 가고 있다. 외국에서는 고등학생정도만 되도 알바를 하며 용돈을 버는 것이 그리 낯선 모습은 아니고 대학생이 되면 비교적 윤택한 가정의 자녀라도 학비를 스스로 조달하는 경우가 흔한 일인데 우리는 학비는 물론 용돈까지도 다 챙겨주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의 학자금 대출제도는 미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잘 되어있어 졸업 후 정식 취업을 할 때까지 변제를 연기할 수 있으며 극단적으로 일생 취업을 못하거나 안 할 경우 갚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학자금 대출 이용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자식에게 빚을 물려 줄 수 없다고 하며 이용을 꺼린다. “노후자금은 있는 거야?”라는 질문에는 그리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데도 그렇다. 그렇게 한 번 주기 시작하면 죽을 때까지 자식 뒷바라지 해야 돼..그러니 라며 설득해도 소용이 없다. 나 자신도 학자금 대출을 받아(나이 들어 대학원을 다시 진학했다)공부를 했는데 젊은 자식들이 그렇게 하는 게 왜 문제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 자식 셋은 장학금과 학자금 대출로 학업을 마치거나 진행중이다. 그렇게 하니 자립심이 높아져 부모에게 의존하는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내 자식이 남보다 훌륭해서가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아이들이다. 그보다는 내가 외국에서 살며(일본)보고 듣고 느낀 바가 있어 자립을 강조한 것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용돈을 주더라도 계약을 맺어 낭비를 하지 않도록 지도했고 만일 비정상적인 요구를 해 올 경우 그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루도록 하였다. 취업을 한 후에는 식사비도 부담시킨다. 당연하지 않은가? 자식은 이제 돈이 들어오는 시기가 되었고 부모는 머지않아 돈이 안 들어오게 되었으니.

  하지만 내가 지도하던 대학생들의 이야기나 매스컴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종합해 보면 젊은이들의 자립심이 현격히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취준생이라는 이름으로 부모에게 마냥 신세를 지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들의 대학 시절에도 취준생이라는 이름은 없어도 졸업 후 취업을 위해 (대부분 더 좋은 자리를 위해)부모에게 신세를 지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신세를 진다고 해도 돈을 요구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다 큰 자식이 대학까지 마쳤는데 취업을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5년 심지어 10년이 넘게 취준생의 이름을 가지고 부모에게 신세지는 젊은이들이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예전에 고시공부를 하느냐고 오랫동안 신세를 진 경우는 들어 봤지만-당시의 고시 공부는 지금처럼 돈이 많이 들지 않았다 단지 취업을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부모에게 의지를 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허용하는 부모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도 놀랍다. 그들은 모두 대기업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든든한 노후자금도 마련된 사람들인가?

  그것이 다가 아니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 70대 노파의 이야기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이들이 결혼해서 자립하면 마음을 놓지만 그것도 잠시야..10년 정도 지나면 부모에게 사업자금 대달라고 손을 벌린다네..귀를 의심하게하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런 일이 어쩌다 한 번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분의 이야기는 마치 일반적인 현상인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나중에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비슷한 기사를 발견하였기 때문에 그분의 말이 절대 특수한 상황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최근 잇달아 생활고를 비관한 가족의 동반자살 사건기사를 읽다가 이러한 사실이 사회적 관습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40대 후반의 여성과 자녀 둘 그들도 성인이다-의 동반자살 사건의 기사인데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40대 후반의 여성이 부양의무자인 전남편과 친부모의 금융정보 이용동의를 얻어야 했다고 한다. 이혼을 한 전남편도 그렇지만 친부모가 왜 50이 다 된 딸의 부양의무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40대 후반이라면 부모가 70대일 가능성이 높다. 70이 넘은 부모가 50이 다 된 자식을 부양하라는 것이 법에 명시되어 있는 셈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부양의무자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정서상 나이든 부모가 능력이 있다면 생활이 어려운 자식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혼한 남편이라도 자녀들이 비록 성인이 되어 양육비 의무가 없어져도 살아온 정 때문에 도움을 계속 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중의 도움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러한 동의서를 요구한다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부양의무자는 아니지 않나? 70대 노인이 왜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 후반의 자식에게 부양의 의무를 져야 하는가? 왜 이혼한 남편이 평생 전처의 삶을 그리고 성인이 된 자녀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가?

  내가 알기로는 부모가 미성년의 자식을 부양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으나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다고 해서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즉 이 말은 자식이 부모의 부양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부모에게 부양의무자의 책임을 지우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물론 성년 자식을 부양하지 않는다고 해서 처벌을 받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양의무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름이다. 그냥 경제적 원조를 해줄 가능성이 있으니까 알아봐야 한다는 정도면 되는데.

  비단 이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나라 결혼식의 호화로움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물론 부모의 지원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살 집까지 부모에게 손을 벌려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이 나라의 인습이다. 과거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던 시절의 관습이다. 하지만 부양도 하지 않는 자식들이 부모의 노후자금을 탈취하는 이 같은 인습이 언제까지 이어져야 할지 의문이다. 그것은 자식들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용인하는 부모 나아가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2. 문제는 부모 자식간의 의존관계이다.

  예전에 만난 어느 70대 할머니가 기막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생활보호대상자로 살아가는 할머니는 1년 전 남편과 사별하였다고 한다. 그로 인해 생활비 보조가 절반으로 줄어 무척 힘들다고 한다. 할머니의 일생은 제3자인 내가 들어도 너무나 기구했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자신이 두 번이나 큰 사고를 당한 것과 딸 셋이 모두 이혼했다는 것이다. 사고 때문에 모처럼 모아둔 재산이 다 날아가고 딸들이 어렵게 산다고 했다. 딸이 셋이면 아들 셋보다 훨씬 든든할 것 같은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좋은 일이라고 한결 같이 이혼을 한 것일까? 이유를 들어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 중 한 명이라도 잘 살아 주면 조금은 힘이 될 텐데. 게다가 나이보다 건강도 좋지 않아 지금도 병원에 자주 다닌다고 한다. 노인이 몸이 약한 것은 그렇다고 해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조차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나를 화나게 한 것은 딸들의 삶이었다. 그녀들의 나이는 40대이다. 40대라면 아직은 일을 하여 먹고 살 수 있는 연령이다. 그러나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그녀들은 생활보호대상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늙은 어머니에게 손을 벌리고 있다고 한다. 재산도 없고 생활보호에 의지해 살아가는 어머니를 부양하지는 못할망정 손을 벌리는 자식들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같이 사시지 그래요?”라고 묻자 그럼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 없어요라고 답하셨다. 생활보호대상자끼리 동거하면 큰 불이익이 생기는 것 같았다.

  우리 사회에는 이토록 자립을 하지 않고 의지하려고만 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미국의 어느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쪽은 편부가정 한쪽은 편모가정인데 둘다 생활보호대상자라고 한다. 그런데 우연히 두 집의 가장인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졌다. 둘은 결혼을 원하나 그렇게 되면 생활보호를 덜 받거나 아예 받지 못한다(기억이 잘 안남)는 것 때문에 결혼은커녕 동거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나 여자나 건강에 이상이 있거나 장애인인 것은 아닌데 왜 저들은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가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저런 사람들이 생활보호대상자라는 것 자체도 이해가 가지 않고.

  그런데 우리도 그런 사회가 된 것 같다. 예전에 세모녀가 동반자살한 것으로 인해 세모녀법이 생겼다고 하는데도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제도의 문제가 아직 개선이 안 된 모양이다. 하지만 무엇이 아직 충분히 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지 알 수가 없다. 세모녀사건의 어머니는 70에 가까운 노인이니 그렇다고 쳐도 그녀의 딸들은 30대 초반과 20대의 젊은 여성들이다. 한참 일 할 수 있는 나이 아닌가? 나이가 많아 일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지만(나 자신도 그런 경험을 수도 없이 했다.) 20대나 30대는 노동시장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연령대이다. 더구나 젊은 여성의 경우 알아서 모셔간다고 해도 될 정도로 구인 사이트에 일자리가 넘친다.(나는 남자라는 이유로 거부당한 적도 여러 번 있다.)

  그것은 바로 어려서부터 자식을 부모에게 의존케 하는 악습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갓난아기는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우는 것 뿐이다. 그러기에 부모는 아이에게 100%의 도움을 줘야 한다. 하지만 연령이 높아가면 조금씩 자립할 능력이 생기니 부모는 그것을 스스로 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면 자립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이 정석이다. 적어도 대학을 졸업한 자녀라면 더 이상 부모를 기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취준생의 기한도 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대학이나 대학원의 학비정도는 자신이 조달하도록 해야 하고 그것이 과거에 비하면 과거 우리 대학 시절엔 학자금 대출 자체가 없었다-충분히 가능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들은 그런 것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가끔 조금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자립심을 키워주는 부모를 만나면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인간이란 기댈 수 있으면 누구라도 기대고 싶어진다. 그것을 끊는 것이 부모의 바른 자세가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려운 것은 결국 부모도 자식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자식이 부모를 의존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부모가 자식을 그것도 어린 자식에게 의존한다고 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의존관계는 강자가 약자에게 의존하는 방식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의존이란 결국 상대가 (사람이든 동물이든 혹은 물질이든)없으면 자신의 정상적인 삶을 살기 어렵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편 없이는 살아도 자식 없이는 못살아라는 여성들은 적지 않다. “마누라 없으면 못 살아라는 남성들도 꽤 많다. 모두가 의존관계이다.

  예전에 네 멋대로 해라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거기서 남자 주인공 고복수(양동근분)은 자신를 버리고 나간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른 동생(속된 말로 씨 다른 동생)을 찾게 되어 그들에게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주고 있었다. 그것이 습관이 되니 나중에는 돈을 안 주면 욕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줄려면 계속 줘야지 줬다 안 줬다 하는 건 뭐냐? 사람 가지고 장난하니?”라고 엄마(윤여정분)는 외친다. 자식을 버린 어머니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배려가 계속되면 권리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자 고복수는 이 닭집 내가 차려준 것으로 아는데 엄마가 나한테 그렇게 말 할 수가 있어?” 라고 반발했다.

고복수는 왜 그런 대접을 받아가며 자기를 버린 어머니에게 돈을 주는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의존이었다. 물론   어머니도 이미 의존관계에 빠졌지만 그것은 돈을 받는 입장에서 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돈을 주는 사람이 왜 의존관계에 빠진 것일까?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가족에 대한 절박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가 가출하고 아버지(신구분)는 그를 고아원에 맡겼다. 그리고 오랫동안 방치하다가 다 성장하고서야 둘은 다시 만나 같이 살게 되었다. 고복수에게 가족이란 다른 고아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나빠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도움이 되기는커녕 부담만 되는 어머니를 찾게 된다.

  하지만 그도 결국 의존관계를 탈피하게 된다. 누구 때문에 살지 마그는 동생에게 이별을 고하며 이렇게 외친다. “형 난 형 없으면 못 살아요고복수는 동생에게 그도 비슷한 피해자이다- 아버지 이상의 존재였다. 그래서 의존관계가 생긴 상태였기에 고복수의 이별 통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이렇게 외쳤다.

  고복수가 의존관계를 벗어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다. 아들이 불치병인 뇌종양에 걸린 것을 안 아버지는 아들과의 이별을 두려워하며 자살하고 말았다. 그것은 고복수의 삶에 큰 충격이었다. 그와 아버지도 의존관계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자신의 의존관계를 해소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뇌종양으로 죽게 되었을 때 어머니와 동생이 겪을 충격을 덜어주고자 했을 것이다. 아버지처럼 자살을 택하지는 않을지라도 의존관계를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복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자식에게 바른 자세를 보이는 것은 의존관계에 놓인 부모에게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자식의 자립은 곧 자신의 의존대상이 사라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상대의 의존이 자신의 삶의 의미이기 때문에 의존을 하지 않게 되면 그 허탈감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워진다. 상대의 자립을 방해해서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싶은 욕망도 들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 물론 그것은 의도적이지는 않을 수 있다. 자신은 자식을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자식을 더 강한 의존관계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은 대부분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사랑은 의존관계이지만 그것이 도를 넘으면 서로를 불행하게 할 수 있다. 다 큰 자식을 놓아주지 못하는 부모 그래서 그 품을 벗어나지 못한 자식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다. 물론 부모자식만의 문제는 아니다. 남녀간에도 친구간에도 부부간에도 의존관계는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그런 관계가 도를 지나칠 때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이다.

  젊은이들을 비난하기 전에 부모들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단 것을 잔뜩 먹이면 아이는 단 것만 찾게 된다. 하지만 단 것과 쓴 것을 골고루 먹이면 아이는 두 가지를 다 먹을 수 있게 된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의존하는 자식에게는 반드시 의존하는 부모가 있으며 그 책임 역시 부모의 몫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3. 사회를 기생충천국으로 만들어 버리는 의존관계

  부모와의 의존관계로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의존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대부분) 나는 그런 점에서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우리 부모는 맞벌이(그 당시에는 드문일이지만)로 바빠 나를 의존관계에 빠뜨리는 데(?) 실패했다. 부모님 얼굴도 제대로 보기 어려운(약간 거짓말 조금 보태서)부모는 내게 머나먼 존재였다. 중학교 때까지는 부모님이 무척이나 그리웠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부터는 서서히 잊어버리게 되었다. 철들고 나서 내게 부모란 챙겨드려야 할 대상이지 의지할 대상은 아니었다. 너무 심해 부모에 대한 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나같은 경우에는 지나치게 자립해 버린 경우라 이 역시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덕에 마마보이 파파보이를 면했으니 그것만은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도 조금은 냉혹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주변을 보면 의존관계의 대물림’(?)이 심각하다. 중학교 3학년 아이에게 밥을 먹여주는 엄마를 본 적이 있다. 그 아이를 가르치기로 되어 있던 나는 쓰러질듯한 충격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그 아이에게 다소 엄한 훈계(?)를 하자 엄마는 학습을 중단시켰다. 나로서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붙들고 비위를 맞출 생각은 없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 엄마 역시 부모에게 의존관계를 이어받았을 것이다.

  경제가 발전하여 윤택해지면서 의존관계도 성장발전(?)한다. 과거에는 여유가 없고 아이들이 많아 빈곤했던 내용(?)이었는데 이제는 소득에 비례해 성장발전하는 것이다. 아직은 맞벌이 세대가 적은 것도 한 몫 한다. 우리 집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맞벌이 가정에서 특히 엄마는 의존관계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대개 돈으로 자녀와의 부족한 관계를 만회하려고 하니 자식들은 부모 알기를 돈으로 알게 된다. 그 덕분에(?)의존관계 중독(?)에 감염되지 않고 자립하게 된다. 하지만 중고년층 여성들의 맞벌이 비율이 현격히 떨어지는 데다 자녀 수도 적으니 엄마가 자녀에게 의존관계를 전염(?)시킬 시간은 얼마든지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감염을 사회는 예방하거나 치료하기는커녕 조장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른바 마더컴이라고도 불리는 의존관계를 아름다운 모정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기 바쁘다. 모든 어머니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신은 모든 곳에 있기 어려워 엄마를 만들었다등등 듣기 거북한 모정 찬양은 쉴새 없이 들려온다. 물론 외국이라고 그런 것이 없겠는가?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 일본에서 십년 거주하는 동안 저런 낯간지러운 찬양을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자식들이 특히 딸들이 입만 열면 엄마 타령하는 모습도 거의 본 적이 없다. 지금은 다행히(?)사라지고 있지만 여성들이 놀랄 때 엄마라고 하는 것이 세계공통의 풍습인가 했더니 일본에서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처음엔 다소 놀랐던 것 같다.

  문제는 이러한 찬양이 얼마나 큰 폐해(?)를 가져오는지를 우리 사회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나 같은 불량 자식(?)이 아니면 그런 게 웬 문제일까 할 것이다. 말이야 맞는 말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 그것도 엄마의 사랑 얼마나 좋은 것일까? 하지만 좋은 것도 지나치면 화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이름하여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모자란 것과 같다이다. 멀리 볼 것도 없다. 당장 조국사태를 보면 뜨거운 모정이 가져온 폐해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일본에서도 이러한 과유불급이 부른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학교진학에 에스컬레이트라는 것이 있다. 대학부속의 초등학교나 유치원에 들어가면 대학까지 자동으로 진학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로 치면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서울사대부중 부고를 거쳐 서울대에 그대로 진학한다는 것이 된다. 만일 우리나라에 그런 제도가 생기면? 생각하면 끔찍하다. 일본은 다행히 우리처럼 아름다운 모정이 없어서인지 생각보다 이런 제도를 이용하려는 부모가 적다. 그래서 유치원입시 초등학교 입시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모정이 일본이라고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긴 인간이 사는 곳에 뭔들 없을까? 어느 엄마가 옆 집 아이를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정 때문이었다. 그 아름다운 모정의 엄마의 아이와 옆 집 아이가 (불행한 엄마의 자녀라고 해야 하나?)같이 유치원시험을 보았는데 옆 집 아이는 합격의 영광을 누리고 아름다운 모정의 엄마 아이는 그만 낙방을 했다. (그러게 공부 좀 열심히 하지. 그랬으면 엄마도 좋고 옆집애도 좋았을텐데. 아이가 잘못 했네)그로 이해 분노를 느낀 아름다운 모정의 어엄마가 옆 집 아이를 살해한 것이다. (분노? 자기 자식이 공부 못해 떨어진 걸 왜 그래? 엄마도 잘못 했네)아름다운 모정은 아름답지 못한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전설입니다.! 참으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다.

  지금의 젊은 세대의 어머니들은 아름다운 모정으로 세상을 기생충으로 가득 차게 하는 주역(?)일지 모른다. 그녀들의 어머니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어려웠다. 가전제품도 없고 돈도 없고 정보도 없는 삼무시대의 엄마들은 자녀도 많고 여자에 대한 속박도 많고 시어머니의 잔소리도 많은삼다의 고충을 뚫고 의존관계를 전염시킬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가전제품도 많고 돈도 많고 정보도 많은’(오죽하면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아이 성적의 삼대요소라고 할까?) 삼다 시대(내용이 바뀜)의 엄마들은‘ ’자녀도 적고 여자에 대한 속박도 적고 시어머니의 잔소리도 적은‘ ’삼소의 혜택을 누리며 관계의존을 오늘도 자녀들에게 전염시켜 기생충을 사회에 감연시키고 있다.

  물론 애비들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만 전면에 나서지 않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다른 특명이 있다. ’할아버지의 경제력이라고 하지만 아버지의 경제력은 그저 보조적인 요소는 아니다. 실제로 할아버지가 경제력을 손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려면 여간 부자가 아니면 어렵다. 그런 할아버지는 매우 드물고 그러니 아버지의 경제력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 “가라가라가라 자상한 아빠 오라오라오라 돈 잘버는 아빠그들은 아름다운 모정실현과 의존관계감염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오늘도 매진하고 있다. S여고의 교무부장이나 조국법무장관처럼 든든한 빽이 되어주면 금상첨화이다.

  그렇게 몸 속에 관계의존에 감염된 기생충들은 자녀들에게 그것을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감염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맞벌이를 해도 상관없다 그렇게 안 하면 내 자식만 쪽 팔리는 것 아니까 없는 시간을 내서 해야 한다. 안 되면 남편의 경제력을 믿고 경단녀가 되도 좋다. 내 자식이 남에게 지는 꼴은 절대 못 본다. 그녀들은 경쟁이라면 그녀의 엄마들보다 한 수 아니 세 수 정도는 위 아닌가? 대학진학율 20%도 안 되는 엄마세대의 여성들고 달리 그들은 어려서부터 입시를 달고 자란 세대니 오죽하랴. 맞벌이해서 실탄도 많겠다, 물량공세를 해서라도 내 아이들을 관계의존에 전염시켜야 하는 사명을 저버릴 수는 없다.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가족은 그러한 가족의 전형적인 집합이라 하겠다. 물론 봉준호 감독이 그런 의미로 기생충이라고 제목을 붙였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미안합니다! 봉감독님. 무단 오용해서. 잠시 저의 봉이 되어 주십시요)성인 4명만 있는 데 그들이 모두 백수라면 그들 모두가 기생충인 것은 명약관화하다. 50대 부부 20대 자녀 모두가 충분히 일 할 수 있는 나이인데 어떻게 모두가 그것도 동시에 백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20대 자녀가 결혼하면 또 다른 기생충이 탄생하겠지?

4. 이제 그만 아름다운 모정에서 벗어나자.

  ‘집밥타령이 한 창이다. TV에서도 집밥신문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집밥에 대한 합창이 울려퍼지고 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집밥을 먹어본 적이 별로 없을 것 같다. 우리 세대는 집밥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먹었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이른바 급식0’들이 많아 아마 집밥을 별로 먹어 보지 못해서인지 때 아닌 집밥 타령을 하고 있다. (우리는 급식 먹고 싶어 했을 정도 집밥을 먹었다)물론 집밥이란 그들에게 또 다른 외식이다. 절대로 자신들이 만들지는 않으니까. 직접 만들어 먹으면 손모가지라도 부러질 것처럼 싫어한다. ‘시간이 없다(?)“ 주말에 거리를 메우는 청춘남녀들은 다 백수인가? 백수가 감히 연애할 수 있는 나라는 아닐텐데.

  기성세대의 엄마표 밥상 타령도 지긋지긋하다. ‘급식0’들의 출현으로 집밥 만들 기회도 거의 없을 텐데 무슨 엄마표 밥상타령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좋으면 배워서 좀 급식0‘에게 집밥의 지겨움을 선사해도 될텐데 집밥에 중독되어 외식을 못하게 되면 사회생활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는 눈물겨운 배려 때문인지 영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가끔 먹이는 집밥도 그냥 집에서 먹는 밥일 뿐이다. 제조원은 근처 식당 아니면 냉동식품회사이다. 가끔은 엄마표도 먹이기는 하다. 그 엄마란 할머니를 말한다. “엄마 김치 언제 갖다 줄거야라고 하면 총알같이 배달되는 엄마표 집밥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모정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예전에 아름다운 모정은 몸으로 실천되었지만 요즘은 돈으로 실천된다. 어차피 모음은 같다. 그러니 같은 모정인 것이다. 예전에는 시간이 없어 돈으로 때웠지만(우리 부모님처럼) 요즘은 시간이 넘쳐도 돈으로 해결한다. 대신 함께 시간도 나누니 관계의존감염작전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 동요 어른들은 몰라요의 가사와 달리 장난감만 사주지도 예쁜 옷만 입혀주지도 않는다. 군에 간 아들을 위해 근처에 방을 얻어 진을 치고 돌보는 것이 오늘날의 아름다운 모정인 것이다. 애비는 그 비용을 위해 오늘도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다. 그게 그의 역할이고. 관계의존의 대물림을 위한 부부합동작전은 그렇게 오늘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아름다운 모정에서 벗어나 자립의 길을 가야할 때이다. 세상은 바뀌었는데 마르크스의 이론은 변함없이 오늘에도 적용되고 있는지 의식의 변화는 느리기만 하다. 노후대책도 없이 퍼주는 자식사랑이 가져올 리스크를 그들은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생충가족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세 모녀 자살 사건 등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가족의 동반자살사건을 그저 어려운 이웃의 고통이라고 여기는 것에 나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더욱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이번엔 가족만이 아니라 딸의 친구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기사를 읽으며 왜 이 아이가 남의 가족의 동반자살에 연루되었는지 알고 싶어 안광이 지배를 철함’(눈빛으로 종이가 뚫어질 만큼)철저히 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있다는 게 고작 아이가 늘 같이 다녀서 그 집 딸인 줄 알았다라는 것 뿐이었다. 그럴 수 있지만-가끔 남의 집이 더 편하다고 하는 아이들이 있다. 일종의 관계결핍이라고 해야 할까?- 그 아이에게도 가족이 있을 텐데 가족 이야기는 왜 안 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관계의존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부모와의 관계가 감염(?)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가족에 의해 감염되어 끝내 죽음도 함께 한. 그렇지 않고서야 어린 아이가 뭐가 답답해 남의 가족의 동반자살에 동반자가 되었겠는가? 무섭구나. 관계의존이여! 사악한 가족이구나. 남의 딸을 동반한 그대들은. 부디 저승의 심판이 있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모정의 폐해는 이런 특별한 일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예전에 있었던 일이다. 딸의 결혼비용으로 몫돈을 대출받은 부부가 돈을 제대로 갚지 못해 동반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자살은 극단적이지만 결혼비용을 대주기 위해 노후자금을 깨는 경우는 비일비재한 것 같다. 자식에게 전 재산을 다 양도하고 부양을 부탁했는데 배신당하고 거리에서 폐휴지를 줍는 엄마의 애끓는 이야기도 결코 낯설지만은 않다. 사업한다고 하여 빌려준 돈을 아들이 날려 아버지는 경비원으로 엄마는 청소부로 나서 늙은 몸을 이끌고 고생해야 하는 부부의 이야기도 남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하지만 그 고통이 자신들만의 것이라면 아직은 괜찮을 것이다. 옆 집 아이를 죽인 일본의 아름다운 모정같이 남을 해쳐버리는 수준이 되면 정말 곤란하다. 하지만 이런 일은 의외로 많다. 원래 자기자식을 위해서는 남을 해쳐도 좋다는 것이 모정 아닌가? 계모의 횡포는 있어도 계부의 횡포가 적은 것은 다른 이유도 있지만 모정이 너무 뜨거운 탓에 그 빛이 자칫 남의 자식에게 화상을 입히거나 심지어 태워죽이는 일까지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재혼한 여자가 애를 낳자 전처의 자식에게는 간식도 못 먹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모정이란 양날의 칼인데 우리처럼 맹목적으로 찬양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현상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마음은 다 같다라고 우리는 쉽게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렇다. 마음은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특권과 반칙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아름다운 모정이라는 이름으로 미화시키는 것은 더욱 더 큰 문제이다.

  ‘미운 우리새끼같은 방송은 사라져야 한다. 다 큰 자식을 자신에게 의지하게 하여 삶의 보람을 느끼는 의존도 그로 인해 부모에게 언제까지나 요구만 하는 덜 떨어진 자식이 되는 것도 이제 끝내자. 그리고 공적인 문제에 아빠 찬스’ ‘엄마 찬스를 통해 불법적인 특혜를 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모의 노후를 불행하게 만드는 불효를 자식들이 범하지 않도록 모정을 억제하도록 하자. 그런 잘못된 모정, 부모의 사랑을 찬양하는 풍토부터 없애자.

  사랑은 보편적 기준에서 이루어질 때만이 아름답다. 사랑이라면 뭐든 허용된다는 생각은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다. 부모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언제까지 가족의 이름으로 이 사회가 기생충으로 가득한 곳이 되어야 하는가? 온갖 불법과 탈법이 미화되어야 하는가? 부모’ ‘어머니나는 그 이름이 그렇게 아름답게만 들리지 않는다. 온갖 비리와 문제를 안고 있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말이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내가 비정상일까? 제발 그것이 비정상인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