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이 조커를 죽이지 않는 ‘진짜’ 이유
“꿈보다 해몽이 좋다”라는 말이 있다. 비단 꿈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책이나 영화 그림 정치가의 발언 등에 대하여 원작자의 의도나 전체적인 맥락과는 상관없이 그럴 듯하게 해석을 해 대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그걸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유혹을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아마도 진실이 아닐까 싶다. 이영희 선생이 “내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고 싶은 것은 국가가 아니라 진실”이라고 말 할 정도로 소중히 지키려던 진실 말이다.
조선일보 10월25일자 컬럼 ‘베트맨이 조커를 죽이지 않는 이유’(문화부 정상혁집필)는 진실을 죽이면서까지 자신의 견해를 강변한 ‘꿈보다 좋은 해몽’의 전형적인 사례라 하겠다. 어디까지가 팩트고 어디까지가 자기주장인지 애매해서 비판하기도 어렵지만 오류를 각오하고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주장이 너무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식’을 동원하여 기반을 다진 그의 주장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만을 당할는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부득이 펜을 들어야 할 정도였다.
제목과는 달리 ‘조커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그다지 비중이 없이 다뤄지고 있고 그 내용도 “낚였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깊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거리의 처형이 아닌 사법질서의 회복”이라고 한다. ‘법’ ‘질서’ 언 듯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법과 질서를 빙자한 착취와 억압이 무수히 존재하는 세상에서 법과 질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저항’이라는 약자의 무기를 빼앗아 버리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그는 모르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묻고 싶어졌다. 강자들이 제멋대로 만들어 놓은 법과 질서 그나마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약자에게는 엄하게 강자에게는 관대하게 적용되는 세상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고 싶었던 핵심적 주장은 그것이 아닌 것 같다. 곳곳에 배치된 지뢰를 피하느냐 진땀을 흘려야 했을 정도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타당한 주장’들이 등장한다. “세금 낭비 없이 무료자경단으로 활동” “누구도 그를 위해 촛불을 들지 않는다”라는 문장에서 필자의 진의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세금 없이’가 아니라(굳이 세금을 들먹일 필요가 있나?) ‘세금 낭비 없이’에서 시민운동을 ‘세금 낭비’로 비꼬며 치안이라는 절대 필요한 공공재조차 ‘무료봉사’로 때우라는 신자유주의의 냄새를 느꼈다. ‘촛불’의 언급에서는 촛불 혁명이 결코 정의로운 편에서 일어나지 않았음을 비아냥대는 것이 엿보인 것은 나 역시 “꿈보다 해몽이 좋다”라는 과오를 범한 것일까?
이 컬럼에서 하이라이트가 되는 부분은 “어릴 때 강도의 총에 부모를 잃은 그 날 이후 범죄 척결에 뛰어든 ‘끔찍한 하루’를 알고 있는 이상, 수 많은 조커의 자기변명은 궤설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이다. 극소수의 성공자 – 많은 고난 속에서도 노력을 거듭하여 성공한 사람들-를 끄집어내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나 문제를 전부 ‘변명’으로 폄하하는 것 말이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조커의 주장은 부모를 잃고 정의의 사도로 변신한 배트맨의 주장 앞에서는 그저 변명에 불과할 뿐이라는 이 주장은 신물이 나도록 들어온 보수의 전형적 레퍼토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 묻겠다. 우리 모두가 슈퍼맨이 되어야 하는가 라고. 마가렛 대처가 “사회는 없다”고 주장한 것처럼 사회는 개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모든 것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식으로 개인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방기하고 모든 것을 개인의 노력의 결과로 치부하는 슈퍼맨적인 사고를 우리는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가? 사회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무책임한 개인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평범한 명제를 전제로 한 사회문제에의 접근에 불과하다고 얼마나 더 큰 소리로 외쳐야 그는 이해할 수 있을까?
배트맨이 조커를 죽이지 않는 ‘진짜’ 이유는 뭐냐고?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조커가 죽으면 배트맨도 쓸모가 없어지니 이야기가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야 돈벌이가 안 되지 않는가? 하지만 이것이 실제상황이라면 당연히 죽여야 한다. 그렇게 오래 끌다가는 무고한 희생자만 양산할 뿐이기 때문이다. 본 회퍼의 말대로 “미친 운전사가 승객을 참변으로 이끄는 데” ‘법질서’를 설교해 봐야 소용없는 것 아닌가? 그깟 픽션 하나 가지고 ‘호들갑’ 떨지 말고 좀 더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하라고 충고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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