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우물을 덮은 쓰레기를 치우십시오.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이유

닥터 양 2022. 7. 24. 08:02

우물을 덮은 쓰레기를 치우십시오.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이유

17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18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창세기 26-28)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우선시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거기에만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유명한 학자분은 자신의 분야가 아닌 학회모임에는 일체 참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선택과 집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때론 불이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사회란 인맥이 매우 중요한 곳인데 그렇게 해서 인맥을 제대로 쌓지 못한다면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그가 무엇보다도 연구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선택과 집중을 어느 정도 하고 계십니까? 선택과 집중에는 이미 언급한 대로 확고한 신념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자신만의 가치관이 필요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삶을 쾌락주의로 채우는 것은 그러한 가치관에 따른 신념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물질주의적 욕구를 채우는 것이 지상과제인 것처럼 배웠고 그 결과 막상 물질을 손에 넣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손쉽고 가장 빠른 길인 쾌락주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할 수 있는.

  결정장애라는 말을 아실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선택을 의지하며 자란 세대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부모님이 대신 선택을 해 줄 수는 없겠지요. 결국 선택을 할 일은 점점 늘어나게 되는데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데 그것이 쉽지 않게 되니 선택 장애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택이란 곧 다른 것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곧 포기를 의미하는데 포기에는 아까 언급한 학자처럼 희생을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희생이 싫어서 선택을 망설이는 것은 자신 안에 확고한 신념과 가치관이 없기에 정확한 판단기준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결정장애가 젊은이들만의 문제일까요? 결정장애란 눈에 보이게 선택을 망설이는 것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여도 명백한 결정장애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주로 기성세대에게 잘 나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은 삶의 내용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필요 없이 분주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도 결정장애의 결과라 하겠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하든 필요하지 않든 이것저것에 관여하고 그것을 위해 바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만족감을 얻지만 그것은 결국 중요하 선택을 놓치게 되는 악수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는 말은 바빠서입니다 바쁘니까 정작 필요한 것을 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저 남의 눈에 들려고 살아가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블렛셋 사람들이 우물을 쓰레기로 메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들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남도 쓰지 못하게 메운 것입니다. 심술쟁이들이라 그럴까요? 제 생각에는 다른 세력이 쉽게 정착하지 못하도록 한 것 같습니다. 그들로서는 새로운 세력이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 골치 아플테니까.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이 이 우물처럼 쓰레기로 가득 차서 물을 찾기 어렵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별로 의미없는 일로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는 바람에 정작 해야 할 것 소중한 것을 찾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삶과 같습니다. 자신의 확고한 신념과 그것을 뒷받침할 가치관이 없다면 우리는 이런 상태에 놓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은 중대한 선택과 집중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은 주일성수를 떠올립니다. 그것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서 에배를 드리겠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선택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철저히 함으로써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려옵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단지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삶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과의 동행 교제를 위해 방해되는 쓰레기를 제거하여 삶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이루어져야 우리는 제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쓰레기를 모두 갖고 있다면 우리는 역시 선택장애에 빠져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 아시죠. 마르다는 대접에 분주했고 마리아는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대접이 무의미하거나 필요없으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성경에도 손대접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되어 있고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여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힜습니다. 우리에겐 육의 양식도 필요합니다.

  이 이야기의 본질은 우리가 보다 중요한 것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주일예배후의 공동식사는 매우 중요한 성도의 교제시간이고 그것을 위해 분주한 것은 부득이 하나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중요성을 훼손시키는 것은 문제겠지요. 그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것들에 자칫 빠져 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선택을 통해 바로 그러한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마태복음 137)

  씨 뿌리는 이야기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중에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의 예를 봅시다. 가시떨기는 이삭이 발견한 우물을 메운 쓰레기와 같습니다. 세상일에 의해 주님의 존재 말씀이 가려집니다. 그러니 아무리 말씀을 먹고 예배를 드려도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살아 움직이지 못합니다. 잠시 마음에 들어와도 결국 그대로 죽어 버리죠.

  우리는 이러한 가시나무도 제거해야 합니다. 각종 모임 각종 오락 각종 취미생활 등등 우리의 삶에 있는 가시떨기를 하나하나 제거해 말씀이 제대로 우리를 인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우리의 신앙은 더 이상 자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그대로 놔두고 살아가니 신앙은 항상 제자리 걸음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많은 쓰레기 가시떨기가 있었습니다. 비록 불건전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들이지만 그것은 저의 신앙에 장애물이었습니다. 문화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죠. 영화 연극은 물론 노래방, 세상 음악 스포츠 관람 등등 거기에 여러 사람과의 만남으로 분주한 삶까지 그런 것들로 제 삶을 채우니 주님이 제 안에 들어오는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래도 제 나름대로 노력을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저에게서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가져가셨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이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기도를 많이 했지만 그런 기도를 한 기억은 없습니다. “000을 제거해 달라고그럼에도 하나님은 저의 필요를 아시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삶이 정리되자 시간과 여유가 남아돌게 되어 저는 말씀과 기도 찬양을 통해 주님과 더 깊이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앙이 부쩍 성장하게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주님은 때로 필요한 것도 잠시 거둬가셨습니다. 예를 들면 일자리입니다. 저에게 실직은 곧 주님과의 교제를 깊이 하는 시간이 되었고 그 역시 신앙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간과 여유가 있다고 그게 가능할까요? 제가 주님과의 교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단지 시간과 여유가 생겼기 때문은 아닙니다. 주님이 제게 쓰레기를 제거해 주시는 동안 그런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도록 해 주셨고 그것에 대해 저는 순종했습니다. 그냥 없어졌다면 아마 다른 것을 찾았겠지요. 하지만 저는 대체품을 찾는 시간에 주님을 더 찾았습니다.

  노후에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살면서도 취미나 사교 등으로 스스로 쓰레기를 불러오시는 분은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것을 알리는 SNS로 알리는 분들을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비단 노후가 아니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주님과의 교제를 이야기 하면 바뻐서라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쁘십니까? 스스로 바쁘게 만든 것은 아닌지요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쓰레기를 제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그런 걸 1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니까. 다만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라는 것이니까요.

  이제 결단의 시간입니다. 지금처럼 걸정장애자처럼 선택과 집중을 하지 못하고 이것저것으로 분주하게 살아가느냐 주님의 존재가 우선순위가 되지 못하여 신앙의 정체를 그대로 방치할지 과감히 쓰레기를 치우고 자신의 삶에서 주님을 우선순위로 하는 선택과 집중을 통하여 신앙의 성장을 이룰 것인지 말입나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우선시 하고 집중하는 선택을 통해 크고 놀라운 신앙의 성장을 이루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키워드 선택과 집중, 인맥, 확고한 신념, 자신만의 가치관, 물질적인 욕구, 쾌락주의,

결정장애, 블레셋 사람들, 주일설교, 동행교제, 쓰레기, 마리아와 마르다, 공동식사

성도의 교제시간, 가시떨기, 대체품, 결단의 시간

 

기도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인 쓰레기를 제거하여 보다 긴밀하게

주님과 교제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