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이야기

연합한다는 것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

닥터 양 2022. 6. 12. 12:36

연합한다는 것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편 1331)

 

 99마리의 양은 그대로 있지만 한 마리의 양이 사라졌을 때 목자는 어떻게 했을까요? 성경에는 그 목자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맨다고 했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누가복음 154)

  하지만 이에 대하여 반발할 사람은 많은 것입니다. ‘망나니 한 마리 양을 위해 99마리의 양을 포기하는 것.... 어리석은 짓인 듯...’이라는 글을 방금 읽었습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모방해 양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기다려도 망나니는 망나니일 뿐이니 포기하라는 주장을 합니다. 저도 처음에 이 비유에 선 듯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99마리보다 한 마리가 더 소중하다니 말이 되나 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숫자에 비중을 두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세상은 효율을 중시하고 성과를 평가의 기준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99마리의 양을 놔두고 1마리를 찾아 나선 틈에 늑대가 나타나 다른 양들을 헤쳐서 3마리가 잡혀 먹였다면 1-3= -2 결국 2마리가 손해가 된다는 계산을 합니다. 만일 그들이 흩어져 버려 10마리가 행방불명이 되면 9가 되니 더욱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방식이 훨씬 익숙하게 느껴지겠지요.

  하지만 주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양을 자녀에 비유해 봅시다. 여러분의 자녀가 5명이 있는데 한 명이 사라졌습니다. 4명이 남아 있으니 그 한 명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4명이나 남아 있으나 1명은 잊으라고누군가 이렇게 말하면 금방 납득하고 잊으시겠습니까? 저는 절대 안 됩니다. 아마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누구라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자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대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녀 한 명이 자살을 한 일로 슬퍼하던 사람에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그 아이는 없었던 걸로 생각해. 그래야 편해라고. 저는 이 말을 듣고 경악을 했습니다. 이걸 위로라고 할 수 있습니까? 위로는커녕 슬픔 아니 분노를 돋우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떨까요? 불난 데 기름 뿌린 격이 되겠지요.

하나님에게 우리는 바로 그러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 복음 112- 13)

  영접하는 자가 자녀라고 인정받는 말씀은 영접하지 않은 자는 자녀가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접이란 말하자면 법적 절차라 하겠습니다. 법적인 절차를 하지 않는다고 자녀가 남이 아닌 듯 영접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녀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고 그러기에 영접을 해야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죠. “난 당신 자녀가 아니야라고 우기는 사람에게 자녀로서의 권세를 줄 수 있습니까?

  자녀를 잃은 부모는 남아 있는 자녀로 그 상실감을 채울 수 없습니다. 저의 큰 딸이 5살 때 잠시 행방불명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불과 한 시간 남짓이었지만 저나 아내는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그 때 제 눈에 둘째 딸이 들어 왔습니다. 순간 저 아이를 위해서라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큰 애가 안 보이자 정말이지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정도로 상심이 컸기 때문에 잠시 둘째 딸의 존재를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큰 딸의 부재가 둘째 딸의 존재로 메워질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친구나 아내 남편이라면 아마 가능할지 모릅니다. 새로운 친구가 죽은 친구를 대신할지 모릅니다. 배우자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배우자와 마음이 맞게 되어 행복하게 산다면 아마 죽은 배우자를 조금은 쉽게 잊거나 추억 속에 묻어 버릴 수 있겠지요. 대체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녀란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자녀이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이 또한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들이 치고받고 싸우는데 행복할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반대로 사이좋은 자녀들을 보면서 흐믓한 미소를 짓지 않을 부모가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서로 연합하여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9)

  이 말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우리가 화평하게 지내기를 하나님이 얼마나 간절히 원하시는가를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녀들의 사이 좋은 모습을 기뻐하는 부모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화평하도록 하기 위해 화평을 가져오는 자에게 복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자녀 중에 서로를 사이좋게 하도록 하는 자녀가 있다면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바로 그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사역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 믿는 자를 늘려 구원에 이르게 한다면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실 겁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태복음 2819)의 말씀은 그러한 하나님의 소원을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그보다 더 바라시는 것이 있으십니다. 그것은 서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 35) “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위기 1918)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누가복음 1026-28)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시는 것이 율법의 핵심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도 같은 가르침은 있습니다. 십계명 자체도 4가지는 하나님을 6가지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사랑해야 인간이 타락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에 의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에게 가장 최종적인 목표는 바로 이웃 사랑 즉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부모는 자녀가 자신들을 사랑하기보다 먼저 자녀들끼리 사랑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나님도 같은 심정 아닐까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을 성경은 아름답다고 칭찬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형제의 연합과 동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형제끼리는 남보다 더 나쁜 사이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서로 얽인 관계이다 보니 다투거나 대립하기 쉽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연합과 동거가 더욱 빛이나고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연합은 때론 어떤 목적을 위해 이루어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역을 위하여 연합하는 것입니다. 교회끼리 교단끼리 연합하여 우리는 보다 큰 목표를 위해 함께 나아가기도 합니다. 한국에 선교를 한 외국인 사역자들의 뒤에는 여러 교단이나 교회가 하나로 연합하여 이루어진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연합은 큰 힘을 만들어 개별적으로 이루기 어려운 것을 이룹니다. 기독교가 이렇게 세계에 퍼진 뒤에는 바로 이러한 연합의 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연합 그 자체를 더 높이 평가하십니다. 연약한 형제자매를 끌어안아 주는 연합은 그 자체가 빛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목표도 중요하지만 함께 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아껴주며 사랑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소원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함께 뭔가를 해 결과를 낳는 것도 기뻐하지만 함께 서로를 배려하고 아껴주는 모습에 더 큰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99마리의 양은 1마리의 양을 찾으려 간 목자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뭐야? 우린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러게. 왜 말 안 듣는 녀석을 찾으러 가. 어이가 없네“ ”나도 이 참에 가출할까? 그럼 더 사랑받을 것 같은데“ ”그럴까? 나도 ...“ ”안 돼 둘이 나가면 사랑도 반쪽이니까“ ”뭐야? 너 혼자 사랑받겠다고? 이런 깍쟁이가 있나“ ”우리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할까?“ 이런 대화라도 나누고 있을까요? 잔뜩 불만을 품고.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잃어버린 양의 안위를 걱정하며 목자가 친구를 찾아 오기를 기도하시기 바랄 것입니다. 예전에 손버릇이 나쁜 제자를 끌어 안은 스승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손버릇이 나쁜 제자를 내보내달라고 다른 제자들이 부탁했으나 듣지 않자 그들은 자신들이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자네들은 어디 가도 잘 할 수 있지만 이 친구는 내가 아니면 누가 받아 주겠나?“며 스승은 그들을 보내려고 했습니다. 이런 스승의 모습에 손버릇 나쁜 제자는 자신의 습관을 버렸고 다른 제자들도 그 스승을 더 존경하게 되었답니다. 그 스승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연악한 형제 자매를 위해 기다려 주는 형제 자매의 사랑 우리는 그것을 실천해야 하고 하나님은 그러한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무엇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하며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아들여 서로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사랑으로 형제자매의 연합을 이룰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키워드 99마리의 양, 효율, 대체불가능한 존재, 법적 절차, 상실감, 절대적인 가치,

율법의 핵심, 형제의 연합과 동거, 얽힌 관계, 연합의 힘, 연약한 형제 자매,

손버릇

 

기도 하나님! 우리가 연약한 형제자매를 위하여 기다리고 인내할 줄 아는 사랑을 실천하게

하여 형제의 연합이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