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지도자 정주영의 탄생 -‘산업보국’으로 완성된 그의 삶(2)
3. 한국전쟁으로 애국애족을 느낀 정주영(85p)
4. 산업보국을 정주영에게 일깨워준 박정희(86p)
5. 민족주의적 기업가 정주영의 탄생 –기업가에서 지도자로(86p)
6. ‘경제에는 국경이 없으나 기업인에게는 있다’ 애국애족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87p)
3. 한국전쟁으로 애국애족을 느낀 정주영
미츠비시재벌의 성립과 발전의 모습에서 정주영의 현대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필자만일까? 물론 현대는 미츠비시처럼 국가의 강력한 지원을 통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조선소 불하 같은 특혜를 통해 성장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조선 사업도 자동차 사업도 또한 건설의 발전도 국가적 필요성에 부응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미츠비시와 마찬가지로 애국과 민족주의적 성격이 다른 재벌에 비하여 강하게 나타났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창업주 이와사키 야타로와 정주영이 밑바닥에서 기업을 일으켰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현대의 설립자 정주영이 애국이나 민족을 위해 기업을 시작했다는 근거는 찾기 힘들다. 그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자리잡고 살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농업으로는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기 어렵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쌀가게를 하고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면서 그가 애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찾아 볼 수 없다. 그저 식민지라는 특별한 환경에서 자신의 삶을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을 뿐이다. 그가 어머니를 모시고 총독부 앞에서 “언젠가는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한 것은 그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는 부자가 목표였지 민족이나 국가를 위해 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사의 회오리바람은 그로 하여금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로서의 삶을 살게 하였다. 일제에 의해 두 번이나 사업을 강탈당한 사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 아울러 해외진출을 통해 국가와 민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 등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6. 25로 인해 국가와 더불어 성장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자신과 가족 회사의 발전만을 의식하였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훗날 그는 “전쟁만 없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한국전쟁이 그에게 준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말해주고 있다. 국가가 잘못되면 모든 것이 허사라는 점을 깨달은 정주영에게 한국전쟁은 그의 마음에 애국애족의 정신을 어느 정도 심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4. 산업보국을 정주영에게 일깨워준 박정희
그런 그를 뒤에서 격려하고 질책한 것이 바로 박정희였다. 그들의 만남은 엄청난 시너즈 효과를 가져왔다. 박정희는 정주영을 통해 그의 원대한 구상을 실현시켰고 정주영은 박정희의 구상에 공감하고 앞장서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민족과 국가라는 것에 사로잡힌 인물이었으니 그의 영향이 정주영의 민족주의 사상을 키웠던 것이다. 정주영 역시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스스로 확고한 민족주의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긍정적 의미의 ‘정경유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환상의 듀엣으로서의.
정주영이 그렇게 민족주의적 기업인이 되어 ‘산업보국’을 외치게 된 것은 그가 가난한 집의 장남이자 장손으로서의 책임감과도 관계가 깊다. 정주영의 가출은 결코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부모와 형제들을 서울로 데리고 와 그들의 삶을 책임지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에게 일신의 안위가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한 책임의식이 국가지도자와의 만남으로 국가적인 규모의 책임감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정주영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산업에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뛰어들었던 것이다. 조선사업도 그렇고 자동차 산업도 그렇고 무리라고 만류했지만 그는 기어코 해낸 것은 일신과 가족 회사의 번영만을 생각하는 기업인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훗날 정주영은 정치에 대한 분노와 회의로 대선에 출마하는 초강수를 두게 된다. 그는 정치가에 대한 반감을 곳곳에서 유감없이 쏟아내었다.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칭찬한 정치가가 박정희이다. 그만큼 둘의 관계는 좋았고 그것은 민족과 국가의 앞날만을 걱정하는 박정희의 태도에 정주영이 느낀 감동 때문일 것이다. 그 감동이 그에게 민족주의의 혼을 불어넣었고 기업인 정주영을 민족주의자 정주영으로 바꾸어 놓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발전에 대한 집념과..그 총명함과 철저한 실행력을 존경하고 흠모했다. 사심없이 나라만 생각하는 대통령을 도와 한 푼이라도 적은 예산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시키는 목표 외에는 나에게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박정희에 대한 정주영의 마음이었다. 박정희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 하겠다. 그들은 연령으로 봐도 2살 터울이니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로서의 공감대도 컸을 것이다.
5. 민족주의적 기업가 정주영의 탄생 –기업가에서 지도자로
정주영의 민족주의적 사고가 극렬하게 드러난 것은 자동차산업의 육성과정에서였다. 미국 자동차 회사의 조립공장으로서 편하게 사업을 하라는 압력에 대하여 정주영이 보여준 단호한 태도가 그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자동차를 잘 만들면 그 자동차가 돌아다니는 국기입니다. 내가 건설에서 번 돈을 다 들이고 실패한다고 해도 우리들이 자동차 공업을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디딤돌을 내가 몇 개 놓을 수 있다면 나는 실패해도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정주영이 이미 단순한 기업가가 아니라 민족의 지도자로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배불리 먹고 잘 살겠다고 서울로 올라온 그가 사업가를 넘어서 민족적 지도자가 되었고 그것이 그의 사업인생의 후반기를 장식했다는 사실을 이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기 하나 잘 살라고 그렇게는 못합니다. 애국심이 있으니까 가능한 것이죠. 자신을 위해서는 못하고 누군가의 도움이 되기 위해 합니다” 농가의 장손 정주영의 책임감이 가족을 넘어 민족과 국가로 확대되었고 그것이 그에게 보다 높은 이상을 향하게 했음을 이토록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그가 마음에 새겼던 격물치지(格物致知부딪히면서 깨닫게 된다)가 훌륭하게 실천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정주영이 인생의 후반기에 벌였던 각종 사업은 그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서산의 간척사업과 농장건설, 대북사업, 소련에 대한 관심 등은 이윤만을 추구하는 사업가에게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실행한 자원외교가 실은 정주영의 생각을 이어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목적은 180도 다르지만)정주영은 소련의 무한한 자원 특히 천연가스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활용하려고 애썼다. 그것이 단지 현대라는 재벌그룹의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1001마리의 소를 이끌고 휴전선을 넘어가는 최초의 민간인이 된 것도 그의 민족주의자로서의 모습을 극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하겠다. 그것은 전쟁으로 나라가 망가진 경험을 통해 얻은 평화주의자로서의 모습이었다. 현대가 대북사업으로 얻은 것이 정몽헌 회장의 죽음 뿐이라고 하면 지나칠지 모르나 오늘날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정주영의 뜻이 남북화해와 통일에 있었다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곧 민족주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치가는 물론 경제인들도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전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웃나라 일본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제국주의의 침략위협에 맞서고자 정치가도 기업인도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뭉쳐야 했기 때문이다. ‘산업보국’은 그렇게 한중일의 경제인들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본에 시부사와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정주영이 있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비록 정주영이 시부사와처럼 처음부터 애국을 목적으로 기업을 일으킨 것은 아니나 궁극적으로는 그 역시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업활동을 자신의 생의 목표로 삼게 된 점에서는 시부사와에 뒤지지 않는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고 생각한다. 시부사와가 ‘일본자본주의의 아버지’라면 정주영도 ‘한국경제의 지도자’ 정도의 평가는 받아도 되지 않을가 싶다.
6. ‘경제에는 국경이 없으나 기업인에게는 있다’ 애국애족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일 양국은 시부사와도 정주영도 잊혀진 채 기업의 이윤과 기업가의 부귀영화만이 중시되고 있는 풍토에 젖어버린 느낌이다. 민족과 국가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을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으로 치부하고 이른바 ‘욜로’라는 이름으로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버린 것 같다. 과거의 역사를 모르는 젊은이들은 오늘날의 번영이 결코 민족과 국가를 앞세운 기업가들의 헌신적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사실에 그다지 동의하는 것 같지 않다. 오로지 내 가족과 자신의 행복에만 몰두하는 현실이 염려스럽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하지만 세계는 겉보기와는 달리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치열한 경제전쟁을 치루고 있다. 세계화니 글로벌 시대니 하여도 여전히 국가와 국경은 견고히 유지되고 있다. “경제에는 국경이 없지만 기업과 기업인에게는 국경이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확인된다. 삼성이 국제자본과의 싸움을 위해 애국심을 주주들에게 호소한 것은 그것을 상징한다. 국가와 민족이 망한다면 우리는 또 다시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주영의 ‘산업보국’정신은 결코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이 아님을 상기해 보자. 일본에서 시부사와가 다시 각광을 받는 것처럼 우리는 정주영의 정신을 되새기고 이를 교훈삼아 미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 태어난’ 우리의 사명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 백범 김구 선생이 민족주의를 제일로 내세운 것은 결코 폐쇄적 민족주의를 통해 침략과 착취를 일삼는 나라가 되기를 바래서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민족주의를 통해 우리가 강성해지고 문화대국이 되어 세계와 인류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정주영의 민족주의도 다르지 않고 박정희의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국민교육헌장의 서두에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민족의 힘을 키워 인류공영에 이바지하자는 것이 국민교육헌장이 지향하는 목표인 것이다. 김구선생이 문화국가가 되어 세계에 우리의 훌륭한 문화를 전파하자는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위대한 지도자들의 뜻을 우리 세대가 받들어 대한민국의 국민이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인류에 공헌하는 미래를 다 함께 걸아 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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