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기초를 세워라 – 민족 복음화의 올바른 방향
2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 3장 2절)
목 차
1.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 우리 민족
2. 허무주의와 쾌락주의에 지배되고 있는 대한민국
3. 극단적 이기주의로 인한 혐오사회의 등장
4. 믿음의 기초를 세워라 – 민족 복음화의 올바른 방향
1.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 우리 민족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애국가’ 중에서)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신령을 잘 모셔 왔습니다. 단군 신화를 봐도 환인 환웅이 인간을 이롭게 하겠다는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다스렸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고 단군은 이들의 뜻을 지상에서 실현시킨 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이념인 유교 성리학은 천명을 중시하여 천명을 어기면 비록 군주라도 역성역명으로 제거될 수 있다는 급진적인 것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서 이웃 일본보다 쉽게 정착하고 확대된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던 우리의 정신문화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하나님은 상식처럼 ‘하나 밖에 없는 님’이 아니라 ‘하ᄂᆞᆯ님’(하늘님)에서 온 말이며 이는 하늘을 두려워하던 마음이 기독교와 접목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의 존재와 하늘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못하고 또 불교의 강한 영향으로 우상숭배가 심했던 일본이 기독교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리학을 비난하지만 성리학이 없어 불교를 숭배하는 나라로 남아 있었다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가 일본처럼 어려웠을 것입니다. ‘불씨잡변’을 써 가면서 불교의 불합리함을 맹렬히 비난한 정도전 선생에게 감사라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리학은 신비주의적이고 다신교적인 우리 민족의 종교관을 합리주의적인 것으로 바꾸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하늘이라는 무형의 대상을 숭배하는 성리학은 하나님이라는 무형의 신을 섬기는 기독교와 많은 점에서 통합니다. 기독교도 합리주의적인 성격이 강한데 성리학은 그보다 더합니다. 우리가 무형의 하늘을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성리학으로 인해 다신교적인 사고를 일정 부분 혁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고도성장으로 민족중흥을 이루던 박정희 시절 우리의 전통적 이념과 종교관도 다시 살아났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이 신도를 중심으로 천황숭배사상을 가지고 국민을 단합시킨 것을 모델로 전통적 종교관과 이념을 통해 국민을 이끌어가는데 성공했습니다. 그것이 무서운 힘이 되어 한강의 기적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과정에서 무섭게 성장한 우리 기독교의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늘을 무서워하던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에게 향하는 순간 그 기세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힘이 되어 분출된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강대국들이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독교 국가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받드는 것은 곧 축복의 길인데 우리가 그것을 이룬 것은 바로 하늘을 무서워하는 우리의 전통이 크게 기여했다 하겠습니다.
그런 우리가 이제는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하늘 대신 땅을 바라보며 살고 있고 하늘의 보화가 아니라 땅의 재물을 훨씬 더 사모하는 민족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늘에 대한 경외감은 사라졌고 그것에 기반을 둔 기독교 역시 과거에 비해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서도 기독교는 형식화된 느낌입니다. 예배에 참가하고 기도를 한다해도 그 능력은 이미 과거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입니다.
이 모든 것이 민주화 특히 87민주화로 인하여 일어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는 68세대가 있다면 우리에겐 87세대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권위란 권위는 다 무너뜨리려고 덤벼들었고 비교적 큰 성과를 올리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하늘을 의지하던 우리의 모든 종교적 기반은 그와 함께 무너져 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라는 말을 삶 가운데에서 듣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2. 허무주의와 쾌락주의에 지배되고 있는 대한민국
성경에는 사람에게서 떠나간 귀신이 갈 곳이 없어 돌아와 보니 청소가 잘 되어 있어 일곱 귀신과 함께 그 사람에게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처음에 귀신이 들렸을 때보다 훨씬 상태가 나빠졌다고 했죠? 귀신이 떠나간 후에 그가 예수의 사랑과 은혜 말씀으로 자신을 채웠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하지 않고 비워둔 채 방치했기 때문에 결국 원래 있던 귀신 + 일곱 귀신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러한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민주화 독재타도 이런 좋은 명분으로 군부독재니 일당독재니 하는 것을 타도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것을 지탱할 종교적 기반과 그에 따른 도덕 윤리적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까지 큰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도 그런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상태 말입니다.
하늘을 무서워하던 우리는 87민주화 이전까지만 해도 사회를 지탱할 도덕적 윤리적 기반이 될 종교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록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전반적인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는 말은 구성원들을 통제하는 좋은 기준이 되었고 그러한 비판에 남녀노소가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독재타도를 외친 87민주화 운동의 흐름은 모든 권위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여겨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무엇을 해야 해” “무엇은 하면 안 돼”라는 말이 힘을 잃게 되고 나아가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가 그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그것이 즐거운 것이냐?” “그것이 재미있는 것이냐?” “그것이 편하게 해 주느냐”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즐겁고 재밌고 편하고 그래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가 가치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맹자는 이러한 이익중심의 사회에 대하여 맹렬한 비판을 하였습니다. 그가 위나라의 왕 양혜왕을 만났을 때 왕이 “우리 나라에 이익이 될 말씀을 해 주실렵니까?”라고 하자 “왜 꼭(하필)이익을 말씀 하십니까?(하필왈리 何必曰利)그저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有仁義而已矣)”라고 답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맹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두가 이익만을 찾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해치게 되어 나라가 혼란에 빠지나 서로가 인의를 찾으면 질서가 잡히고 기강이 바로 서기 때문에 나라가 강해집니다“라고. 특히 왕을 의식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의로운 사람이 어버이를 버리지 않는 것처럼 의로운 사람은 왕을 결코 배신 하지 않습니다“라고.
이 말과 비슷한 가르침을 성경에서 찾으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주시리라“라는 말을 들고 싶습니다. 맹자의 가르침과 다르다면 신의 개입여부인데 맹자도 천명을 중시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같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가 비인격신인 천(하늘)을 든 것에 비해 기독교는 인격신인 여호와를 들었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맹자가 예수님이 우려한 모습을(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는) 보이고 있습니다. 맹자는 이런 상태에서는 탐욕이 횡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욕심을 부려 남의 것을 빼앗게 되면 결국 모든 것을 얻어야 만족을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욕망의 끝없음을 믿음으로 제어하지 않으면 결코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고 하셨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에 마음을 빼앗길 때 생길 상황을 막고자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욕망의 노예가 된 인간이 어떤지 짐작이 가시겠죠.
그런데 우리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 모든 것을 집중합니다. 이른바 먹방이라는 방송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먹는 것을 보여주어 사람들의 식욕을 돋우어 그들로 하여금 먹는 것에 매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성적 포르노가 성욕을 부추기는 것처럼. 생각을 해 보십시오. 성적 포르노에 매달려 사는 사회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겠지요? 먹방은 다를까요? 먹는 것에 매달려 사는 사회 상상이 가십니까?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먹고 마시는 삶이 남는다고! “ 32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린도 전서 15장 32절) 내일이 없는 사람에게 쾌락 말고 무엇이 남겠습니까? 그러니까 꿈이 있어야 인간은 바르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내일이 없다면 지구가 어떻게 될지 염려하였던 것이죠.
바로 이런 상태에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그러기에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며 전도를 하면 엄청나게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을 즐기고 싶은데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꺼림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그냥 하루 하루 때우는 것이 삶이고 그러기 위해 즐거움을 찾아 헤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전에 섬기던 교회의 목사님이 이를 ”그날 그날 살아가기“라고 하셨는데 명답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톨스토이가 말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와는 전혀 다른 생각입니다. 톨스토이가 말한 것은 미래나 과거에 사로잡혀 오늘을 소홀히 하면 과거와 미래가 후회스럽게 된다는 의미로 지금은 소중히 하라고 했죠. 하지만 쾌락주의는 미래에 대한 생각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이니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고 그래서 그냥 때우는 것입니다. ’순삭‘이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시간 때우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말은 더 이상 힘을 가지지 못하고 시간은 귀찮으니 때우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미래가 없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이상이나 꿈을 가지게 하는 정신적 자산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없고 개념이 없으니 할 것이 떠오르지 않고 꿈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시간은 삭제해야 할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할까요? 바로 본능을 자극하는 즐거움 재미 그것을 보다 편하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쾌락주의는 종교적 기반이 무너져 인간에게 할 것과 하지 말 것을 제대로 알려주는 가르침이 힘을 잃으면서 생긴 허무주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권위를 가진 종교 도덕 철학이 모두 힘을 잃어 우리는 삶의 지침을 가질 수 없게 되어 각자 알아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사사기에 나온 ”25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장 25절) 라는 말처럼 된 것입니다.
3. 극단적 이기주의로 인한 혐오사회의 등장
쾌락주의와 허무주의가 결혼하면 어떤 자녀가 태어나겠습니까? 바로 브레이크 없는 욕망의 전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전차는 브레이크가 없기 때문에 끝없이 달리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전기가 끊임없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기를 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그 전차는 범죄라는 이름의 전차로 바뀌게 됩니다.
욕망이 극도록 추구되면 결국 자신의 욕망만이 보이는 극단적 이기주의적 상태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찬송이 있죠? 이것은 은혜 받은 마음을 노래한 곡입니다. 그렇다면 욕망에 사로잡혀 그 은혜를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과 평화는 간 곳 없고 날 위한 욕망만 보이도다“라고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는 맹자가 말하는 극단적 욕망추구의 사회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르바 ’N번 방사건‘을 비롯한 성적 범죄 혐오 범죄 영유아 학대사건 등등 이러한 사건의 배후에는 눈이 먼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추악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즐거우면 돼! 재미있으면 돼! 편하면 돼! 이것 말고 무엇이 꺼리낄 것이 되겠는가? 즐겨라! 재미를 찾아라! 편하게 살자!“ 이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구호라고 한다면 지나칠까요? 여러분! 이 사회에서 들려오는 수 많은 말들 중에 이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것이 있나요?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욕망추구가 삶의 목표이니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적이 됩니다. 종교? 도덕? 그런 게 뭔데. 왜 내가 그런 것을 따라야 하는데? 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거야.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무슨 헛소리인가? 누가 누굴 통제하는데? 내 인생은 나의 것이고 우리는 자유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어 그러니 다 집어치우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데로 살면 돼! 이것이 우리를 지배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존재가 얼마나 눈의 가시처럼 여겨질까요?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아마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같다. 그러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라고. 이런 마인드가 우리 사회에서 (그의 조국 영국에서보다)더 팽배하고 있습니다. 정작 영국에서는 도킨스를 견제하는 사람들이 많아 쉽게 실현시킬 수 없는 그의 생각이 우리 사회에서 막대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불난데 부채질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적 작가 도킨스가 그랬으니 괜찮은 거야”라고.
도킨스정도면 아직 낫습니다. 연예인 스포츠 선수 등등이 마치 롤모델인냥 사치와 낭비를 미화시키면서 욕망을 부추기는 방송이 하루에도 여러번 텔레비전을 비롯하여 인터넷 포털 사이트 등을 메웁니다. 먹방도 그렇고 이른바 예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딴따라라고 불리면서 경멸을 받던 그들이 왜 롤모델처럼 각광을 받고 있을까요? 그것이 허무주의에서 비롯된 쾌락주의의 영향입니다. ‘즐겁고 재밌고 편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세상을 본다면 종교니 철학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은 그저 낡아빠진 구시대의 유물일 뿐입니다. 그러니 딴따라가 영웅이 되고 롤모델이 되어 모두가 그들을 열심히 따라하게 된 것입니다.
혐오범죄는 그러한 욕망추구의 극단적 실현이 가져온 반갑지 않은 산물입니다. 성관계를 거부한 여자친구를 17층인가 하는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죽인 남성, 입양한 아이를 매일 같이 학대하여 죽인 양부모 낙태를 합법화하려고 하여 태아의 생명을 자유롭게 죽이도록 하는 사람들 이 모두가 욕망의 방해물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을 없애려고 한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분노가 어떤 계층이나 집단에게 향하여 질 때 우리는 그것을 혐오라고 하고 그 혐오를 실현시키는 행위를 혐오범죄라고 합니다. 그것이 이념의 포장을 두르면 이념대립이고요. 이념은 이념대립의 중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욕망을 미화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세월호 사건 때 보여진 민심 코로나 사태에서 보여진 인심 모두가 이념이나 가치로 포장되어 있지만 욕망의 표출이었습니다. ’지겹다 시체팔이 하지 말라‘ 이것은 세월호 유족이 받을 거액의 보상금에 대한 질시의 표현이 아닐까요? 하지만 정작 세월호 유족들에게 보상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로또일까요? 자식 죽어 돈 받으면 행복하십니까? 자영업자에게 주는 알량한 보상금에도 배 아파하는 우리의 현 상태! 이게 정상입니까? 얼마나 많은 자영업자들이 빚을 떠 안은채 애써 키운 사업장을 떠나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시간을 돌려 1990년대로 돌아가 봅시다. 삼풍 백화점 붕괴 성수 대교 붕괴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철저한 보상과 사죄가 이루어질 때 ’시체 팔이‘ 라는 말이 들렸던가요? 하긴 대한항공 폭파사건때 어떤 분이 ”남편 죽어 팔자 고쳤다“는 말을 하였지만 그걸 대놓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지금은 말합니다. 자식 죽어 계 탔다고. 이러한 변화의 이유를 아십니까? 바로 브레이크 없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그로 인한 극단적 이기주의가 아닙니까? 죽은 자식은 눈에 안 들어오고 오로지 그로 인해 받는 돈에만 관심이 갈 정도로 우리는 욕망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4. 믿음의 기초를 세워라 – 민족 복음화의 올바른 방향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허무주의와 쾌락주의를 척결하는 것입니다. 몸은 즐거움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13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고린도 전서 6장 13절)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내 몸은 내 것이다, 그러니 내 몸에 관하여는 내가 결정한다“ 그래서 음란도 쾌락도 낙태도 마음대로라고 합니다.
낙태의 명분이 내 몸은 내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럼 아이의 생명도 당신 것입니까 라고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태중의 아이를 몸에 붙은 혹이나 뭐 그런 것 정도 아는 모양입니다. 인권을 주장하면서 또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짖밟습니다. 왜냐고요? 쾌락을 위해서이지요. 쾌락을 절제하면 문제가 해결될 텐데 그것이 싫으니 낙태라는 범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태아의 인권을 짓밟는 것입니다. 이것이 극단적 이기주의가 낳은 범죄입니다.
어느 유부녀가 아이를 갖자 남편에게 상의도 없이 낙태를 했다고 합시다. 그러다 들키자 ”내 몸은 내 것이니 어때?“라고 한다고 합시다. 과연 이것이 맞는 말일까요? 그 아이가 그 여성의 소유물인가요? 아이가 태어나면 남편은 아빠가 되어 그 아이에 대한 부양의무를 지는데 그래도 남편은 아이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없나요?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로 인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느낄 수 있는데 그래도 아이는 여성의 몸인가요?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생각에 젖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이는 인권의 대상이 아닌 거죠. 왜냐고요? 어른이라는 힘 센 권력자들의 쾌락이 아이들이 인권보다 훨씬 더 중요하니까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우리는 교육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재미있고 즐겁고 편하게‘라는 교육의 목표를 종교에 바탕을 둔 윤리와 도덕의 기반 위에서 새롭게 세워야 합니다. 내가 존중받기 위해서 남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은 하늘이 무섭다는 생각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 이러한 것을 제대로 세워주는 영성적인 기초를 필요로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사로잡히면 결국 한계에 부딪힙니다.
민주화에서 비롯된 탈권위 자유방임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귀신이 나간 자리에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생이란 그저 즐겁고 재밌고 편하면 된다는 대단히 그릇된 가치관을 올바른 가치관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전국민적인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벌거벗은 민주주의에 옷을 입히자. (양의모)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에 옷을 입히자.
종교의 비단옷을 입히자. 윤리 도덕의 속옷을 입히자
사랑의 바지를 입히자. 자비의 코트도 입히자.
인의의 목덜이도 씌우자.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벌거벗고 떨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그에게 옷을 입히자.
그리고 함께 평화와 행복으로 가득찬 길을 걸어가자.
우리는 학교에서 아무렇지 않게 진화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진화론만 가르칩니다.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오직 진화론만 가르칩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치관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진화론은 우주의 생성과 인간의 역사에서 신이라는 절대자를 완전히 배제한 주장입니다. 진화론이 학교 교육을 지배한다는 것은 곧 우리 사회에 무신론을 체계적으로 주입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는 주장은 인간에 고유한 영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생령이라고 하는데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는 전제에서는 이것은 있을 수 없는 거짓이라 해야 합니다.
진화론 만이 아닙니다. 편향된 생각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현재의 학교입니다. 페미니즘 동성애 낙태 등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무시하고 특정 이념에 편중된 교육만 시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종교 특히 기독교는 배쳑해야 할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인정되어야 기독교가 성립되는데 신은 없고 만들어진 가짜이고 인간은 인생의 주인이니까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식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일방적으로 특정 종교를 가르치는 교육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특정 사상이나 이념으로 도배가 된 교육에 균형을 되찾아 주자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허점투성이의 유사과학일 수 있다는 전제도 학생들이 알아야 하며 동성애는 찬성자도 있지만 반대하는 의견도 있으니 들려줘야 하며 페미니즘은 남녀의 평등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여성의 편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등등을 학생들에게 제대로 알려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다양성을 제대로 살리자는 것일 뿐이지 기독교라는 이름하에 또 다른 편향적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 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머리를 맞대고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특정 종교적 이념이나 교리에 치우치지 않게 다양하게 종교적 가르침이 반영된 교육을 통해 적어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사람은 즐겁고 재밌고 편하게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가르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특정 종교에 대한 선택은 개인의 자유이며 그것을 강요할 하등의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을 통해 우리는 무너진 믿음의 기초를 회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믿음의 전파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전도를 하면서 느낀 것은 영적 믿음의 기초가 얼마나 심하게 무너졌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맹신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도 느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만 인정하나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도 많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참담한 상황을 교육의 개혁을 통한 믿음의 기초를 회복시키는 것에서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키워드 -
단군 신화 환웅 환인 홍익인간 역성혁명, 성리학, 하늘님과 하나님 정도전 다신교적 사고 87민주화 맹자 인격적인 신과 비인격적인 신 하필왈리 욕망의 노예 성적 포르노 먹방, 허무주의와 쾌락주의 일곱 귀신 이익중심사회 순삭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그날 그날 살아가기 욕망의 표출, 혐오범죄, 극단적 이기주의 (브레이크 없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영성적 기초, 탈 권위적 자유방임적인 사고 진화론, 허점 투성이의 유사과학
기도 하나님!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허무주의와 쾌락주의가 가져온 극단적 이기주의와 혐오범죄로 인한 모든 문제를 믿음의 기초를 회복함으로써 근본적으로 혁신할 수 있도록 교육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교육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도움을 제한하지 마세요. - 주님의 나의 5분 대기조 (0) | 2022.06.07 |
---|---|
아름다운 믿음 소망 사랑이 만들어줄 아름다운 세상 (0) | 2022.06.06 |
新しいワインは新しい袋に!共同体教会という新しい袋 (0) | 2022.05.29 |
성장 과정 없는 성숙은 없습니다. ‘변태’ (0) | 2022.05.29 |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 하지 마세요 ‘한없는 사랑’ (0) | 2022.0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