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능력입니다
25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누가복음 10장 25-28절)
목 차
1. 믿음의 정의에 대한 고민이 가져온 선물
2. 그냥 믿어졌다는 말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요?
3. 믿음의 최종 도착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4. 천국에 가려고 하기 전에 지금 여기서 천국을 누리십시오.
1. 믿음의 정의에 대한 고민이 가져온 선물
신앙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가지고 있던 의문 그것은 매우 평범하면서도 중요한 것 ‘믿음이 도대체 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만 과연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쓰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 집사님 믿음이 참 좋아” “요즘 믿음이 많이 약해졌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목사님!”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특히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믿음과 행위의 관계였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행위가 없는 믿음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지만 행위가 없는 사랑이 사랑입니까? “난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사랑해”라고 고백하지만 아무 것도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과연 진짜 사랑이 그의 마음에 있기는 한 걸까요? “날 사랑하기는 하는 거니?”라는 힐난은 바로 사랑의 실체에 대한 의문인데 이를 믿음에 적용하면 “믿음이 있니는 하는 거니?”가 되겠지요.
하지만 믿음의 성장이 눈에 띄게 느껴지면서 믿음의 실체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시간이 길어지고 더욱 간절해지며 말씀에 대한 이해가 갑자기 깊어지며 믿음 생활이 더욱더 충실해지는 것에서 믿음이 실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믿음의 정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는데 그것은 제가 가진 ‘의심병’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인들은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정확한 정의를 구하고자 애쓰지 않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정상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굳이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의심 많은 도마’는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비판정신에 투철했던 저에게 그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정의도 모른 채 본질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믿는 것은 적어도 제겐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알 때까지 기다렸다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으니 의문을 가진 채 세월을 보내면서 믿음의 실재가 제 안에서 성장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일단 신앙행위를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믿음이 자라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제 신앙에 해가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언 듯 보면 그럴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보면 큰 유익이 되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저의 신앙생활에서 얻은 깨달음이나 감동 고통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곰 씹으면서 때론 글로 때론 마음판에 새겨왔기 때문입니다. 마치 신앙일기를 꾸준히 기록한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왔고 그 열매가 이 작품인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의 성장에 절대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을 그 과정을 통해 실감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믿음을 전하는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할 때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뭔가를 보다 잘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가르치려면 제대로 이해해야 하고 그렇게 애쓰는 것이 자신의 이해를 보다 철저하게 합니다. 애매하게 알면 가르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어느 정도 초보자 수준을 넘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가르치는 일을 시키는 것도 또 전도가 신앙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장10절)는 바로 그러한 효과를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믿는 것을 입으로 말하면 확신이 생기기 때문이죠.
저의 경우 하나님의 계획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평신도로서는 드물게 많은 설교를 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일본인 교회에서는 중직자들이 수요예배의 강단에 정기적으로 섰기 때문에 저는 여러 번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게 큰 은혜가 되었고 설교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었습니다. 누군가가 못하게 될 경우 땜빵이나 대타를 자원할 정도였으니까요. 학교에서 수시로 발표 수업을 했던 것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귀국 후 여러 교회의 교회학교 봉사를 하는 가운데에서 설교의 기회를 많이 얻었습니다. 중고등부에서 3년 유년주일학교 2년 도합 5년간 설교를 했으니 52주로 쳐도 250회 이상 설교를 한 셈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는 성인 대상으로 하기 보다는 어렵지만 일단 호흡이 맞춰지면서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설교자가 가장 은혜를 받는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런 과정을 통해 저는 믿음의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통해 말씀을 선포할 때 제가 가진 신앙일기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막연하게 신앙생활을 한 분들에게는 하기 어려운 좀 더 구체적인 신앙지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중고등부 사역에는 그것이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한창 학습능력을 키우는 아이들이니만치 아마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생각하고 깨달은 만큼 선포할 수 있으니까요.
2. 그냥 믿어졌다는 말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요?
믿음의 정의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저에게 어려웠던 것은 믿음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려서는 오히려 믿기가 쉬웠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죽은 사람이 살아는 기적 등등을 자연스럽게 믿었습니다.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말도 그냥 믿어졌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너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라고 전도를 하였죠. 우리 아이들도 특히 큰 딸아이는 비교적 이것을 잘 받아들여서 따랐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는 어렵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 것입니다. 저도 제 큰 딸아이도 성장하면서 신앙에서 멀어지는 듯한 삶을 살았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저는 비록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신앙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았지만 큰 딸아이는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중3일 때의 일입니다. 수련회를 보내기 위해 약간의 현금을 약속했는데 당일 아침이 되자 새벽 일찍 사라져 버렸습니다. 얼마나 가기 싫으면 그랬을까요? 이 정도면 짐작이 가실 겁니다. 주일학교 피아노 반주까지 하던 아이인데 그렇게 된 것은 제 책임도 크지만 그냥 믿어지는 것이 얼마나 기초가 허약한 믿음인지를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그나마 최근에 다시 교회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더 나았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장성하면서 기독교를 믿지 않기 위한 근거를 찾아 헤매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는 자만 천국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교리를 납득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1. 예수가 구세주라는 가르침을 전혀 접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 2.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 저는 기독교를 거부하고 싶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들었던 가르침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무조건 부정할 용기는 없었기에 부정할 근거를 찾아다닌 것입니다. 불교도 접하고 대순진리회라는 신흥종교에도 가보고 그렇게 신앙적인 방황을 하였죠.
이러한 방황이 영적인 탕자의 삶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말해 저의 신앙에 매우 유익했다고 생각합니다. 탕자의 방황이 그랬던 것처럼.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처럼 ‘영적 탕자’의 삶 역시 순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 뷔페에서 맛 본 타 종교의 맛은 기독교를 따라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타 종교를 기웃거릴수록 아버지의 집이 더욱 그리워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돌아왔지만 곧바로 믿음이 성장하여 확고해진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정의에 대한 고민만큼이나 그것은 저를 괴로혔습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격투를 벌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다 찾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고민이 되는 문제가 많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격투는 계속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냥 믿어졌다는 사람들에 비하면 저의 신앙은 훨씬 깊어지고 커졌다고 자부합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의 이야기는 그냥 믿기에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지옥과 천국이 있고 등등...최근엔 계시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계시록을 읽고 그냥 믿어진다면 정상이 아니겠지요. 제 후배 하나는 “계시록만 없어도 기독교를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저는 아직도 계시록이 상징적인 의미의 책이라는 주장에 일정 부분 동감을 할 정도로 글자 그대로 믿는 것에 저항을 느낌니다. 또 얼마나 많은 이단사이비가 계시록을 가지고 미혹을 해 왔는가를 생각하면 더욱 그럴 수 밖에요.
그런데 그 어려운 것을 그냥 믿어졌다고 하니 저는 그 말 자체를 그냥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믿음이 튼튼한 기초가 있을지 대단히 의심스럽습니다. 마치 아무 것도 몰라 믿었던 어린 시절의 믿음처럼 쉽게 무너질 신앙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은 추측이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는 말입니다. 믿음이라기도 보다는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어제 저는 황당한 경험을 했습니다. 어느 단톡방에서 제가 기독교에 대한 자료나 글을 계속 올렸습니다. 그러자 어떤 분이 자기가 운영진이라고 소개하며 종교적인 것을 올리지 말라 합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누가 뭐라 합니까?“라고 묻자 ”아니요’라고 답하였습니다. 즉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기독교인이라는 사람이 자진해서 그것을 규제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경악할 노릇 아닙니까? 불신자들이 문제 제기를 해도 이를 막아야 할 기독교인이 자진해서 이런 규제를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고민 끝에 저는 이러 글을 올렸습니다. “여러분 방금 운영진에서 종교적인 글이나 자료를 올리지 말라고 했는데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니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모두가 그 의견에 동의 하시면 저는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저는 운영진을 재단본부에 신고하겠습니다. 종교탄압으로” 재단 본부란 그 단톡방에 참여한 사람들이 활동하는 재단의 본부를 말합니다. 저는 내심 제 생각이 관철되어 운영진의 규제를 백지화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경악할 일이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연이어 운영진을 지지하는 글이 올라 왔는데 문제는 그들이 대부분 교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가 찰 노릇이 아닙니까? 제 생각에 지지를 보내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자진해서 규제를 하라고 주장을 합니까? 자신들이 가만이 있으면 제 생각이 관철될 분위기였는데 그로 인해 저는 궁지에 물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사과를 표명하고 규제에 동의하기로 해야 했습니다.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원통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사자들에게 개인톡으로 “어떻게 기독교인이 앞장서 이럴 수 있는가? ”라는 취지의 글을 보냈습니다. 답은 없었고요. 도대체 왜 불신자들은 침묵을 지키는데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취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뒤통수를 얻어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차라리 교인이라고 말하지 말든지. 중보기도를 하려던 저는 계획을 바꾸어 이 문제를 놓고 눈물의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쩌다 이 나라가 이렇게 되었습니까?’라고 통곡을 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은 그냥 믿어진 사람들이라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사실상 믿음이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고민없이 시련없이 간절없이 그냥 믿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믿음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특별은사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하지만 그런 일이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지요. 대부분은 믿음의 실체도 내용도 정의도 모른 채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인행세를 하며 이런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3. 믿음의 최종 도착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설마 제가 믿음에 대한 최종적인 답을 찾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정의가 무엇이며 믿음을 가지기가 어려워 격투를 벌인 결과로 얻어진 귀중한 깨달음을 소개하고자 과감히 펜 아니 자판을 들었다기보다 두들겼습니다. 그나마 글쟁이로 살면서 익힌 재주가 이것뿐이라 그렇습니다. 목사도 전도사도 아닌 평신도 주제에 교만하다는 욕은 이미 각오합니다. 하지만 제 안에 계신 성령님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지 몰라도 안 쓰고는 못 배겼을 정도로 쓰고 싶었고 부끄럽지만 모두와 나누고 싶어져서 세상에 공개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세상을 놀라게 할 간증거리를 가진 신앙의 슈퍼스타도 신데렐라도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 신앙생활을 꾸준히 해 온 흔하디 흔한 기독교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어디에도 눈이 번쩍 뜨일 간증거리가 실려있지는 않습니다. 일반인들이 보면 놀라울지 모르나 기독교 세계에서는 일상적이라할 체험은 좀 했지만 그걸 가지고 책을 써서 간증을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저도 껌을 좀 씹었다고 할 수준이죠.
그보다는 믿음의 여정에서 느낀 작지만 매우 소중한 깨달음 그것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기억하여 쌓아올린 믿음의 탑에 대한 기쁨과 감격이 이 책의 핵심이라 할 것입니다. 누구보다 믿음을 거부하고 믿음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깨닫지 못했을 것들을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자그마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에서 모아 보았습니다. 한 개인의 의견이니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마시고 각자의 삶에서 적용해 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리면 믿음은 바로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평범한 내용이라 실망하셨을지 모르지만 기본적인 것이 다를 수는 없기에 그렇게 말씀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믿음 소망 사랑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는 말이 얼마나 소중한 가르침임을 모든 것을 마친 이 시점에서도 격하게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을 여러차레 넘나들며 느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 라는 말씀은 성경 66권을 꿰뚫는 진리라고 감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로마서 8장32절) 아들을 내어주는 사랑이라면 무엇인들 못 주시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하시려고 믿음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따를 수 없고 흉내낼 수 도 없습니다. 마음에 죄악이 가득차고 온통 욕심으로 더럽혀진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같은 죄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끄시기 위해 어제도 오늘도 동일하게 천년을 하루 같이 일하십니다. 그것도 전체를 한 꺼번에 움직이게 하는 편리한 방법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님을 보내시어 하루 하루 한 해 한 해 변화시켜주시면서 따르도록 하시니 그 수고야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그 모든 것을 견뎌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론 혹독한 시련도 때론 감동적인 축복도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시련으로 자기를 내려놓고 순종하며 축복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느끼고 그것을 통해 나는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모습만이 내 안에 남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난 축복 자기부인 순종 주님과의 교제(동행) 기도 맡김 이 모든 것이 그것을 위한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마치 소금에 절인 배추가 숨이 죽어 양념을 흡수하여 맛좋은 김치로 거듭나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명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은 이 모든 것을 통해 완성되어지는 최종적인 선물이라 할 것입니다. 곧 하나님과 하나되기 라고 해야 할까요?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 전서 13장 4-7절)
너무나도 유명한 이 구절들 하지만 얼마나 실천하시며 사셨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니 우리가 감히 흉내내기도 어려운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결혼식장에서 자주 들려오던 이 구절은 인간의 힘으로 도달할 영역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되어 간다면 멀고 먼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러한 사랑에 가까운 삶을 살아내셨음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주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4. 천국에 가려고 하기 전에 지금 여기서 천국을 누리십시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매우 불행합니다. 자살률은 선진국 1,2위를 다투며 과거에 비하여도 엄청나게 높습니다. 행복지수는 그 반대로 최하위권입니다. 가난하던 시절에도 누리던 행복을 지금은 도리어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도대채 우리가 누리는 경제적 풍요는 왜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행복을 외부에서 찾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많아야 좋은 집에 살아야 큰 차를 타고 다녀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것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애쓰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합니다. 설령 손에 넣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욕구에 사로잡혀 사는 한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욕망에 끝은 결코 없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 아닙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마태복음 5장3절)이라는 말이 그저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옛 사람의 구습에 빠진“사람은 바로 욕망에 노예가 된 사람을 말합니다. 그에게 영원한 만족감이란 없습니다. 천하를 다 가진다고 해도 인간의 욕망은 채울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가 불행한 것은 채울 수 없는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결국엔 좌절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천국에 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곳에서도 욕망을 채우겠다고 나선다면 천국이 천국이 되겠습니까? 그곳에서도 싸우고 난장판을 벌이게 될 텐데. 천국에 아무리 보석이 가득하여도 우리의 옛 사람이 살아 있는데 그곳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끔직합니다. 저는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며 천국에서의 삶을 걱정했습니다. 인간들이 들어차는 순간 천국이 지옥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까 싶어. 지옥도 영원하지만 천국에서도 영생을 하니 그럼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 아닌가 해서.
종말론으로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계시록 강의 잘 들어 천국가겠다고 벼락치기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한숨이 나옵니다. 썩어가는 옛 사람의 구습을 안고 가는 천국 어떤 곳이 될지 상상이 갑니까?
저는 단언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옛 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길고 긴 여정이며 이를 잘 통과할 때 비로서 천국백성의 자격이 있다고. 그렇다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의 마음에 천국이 들어서지 않는다면 천국에 가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천국을 사모하십니까? 그렇다면 이곳에서 미리 천국을 누리십시오. 그것은 외부적인 조건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제가 마음 속에서 행복의 조건을 누릴 때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기 위해 우리를 신앙생활을 통해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지상에서 천국을 누리면서 살아감으로써 언젠가 가게 될 하늘 위의 천국에서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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