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은 개고생? ‘별을 바라볼 때’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원토록 빛나리라 (다니엘사 12장 3절)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개죽음” ‘개떡“ 등등 우리는 나쁜 것을 말할 때 접두어로 ’개‘를 붙힙니다. 여기서 개란 우리가 키우는 개가 아니라 나쁜 것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개죽음‘이라는 말은 일본어에도 있는데 그것은 동물의 개를 의미하는 ’이누(犬)‘을 쓰기 때문에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개죽음의 개를 동물의 개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개가 죽었다고 무슨 의미나 가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개죽음‘은 곧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죽음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맞지 않습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에 대하여 크게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에 싫어도 예수를 믿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한 신앙생활이란 고난의 연속이며 마치 형벌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기보다)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평생을 살다가 죽어서 그 형벌을 면하고 천국에 갔을 때 비로서 행복해질 수 있다.” 이렇게 말이죠.
멕시코의 에스더권 선교사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신부인 우리를 위해 빨리 재림하시고 싶지만 아버지께서 아직 허락하시지 않는다. 신부를 너무너무 사랑하기에 예수님은 얼른 그들을 맞이하러 하신다. 왜냐하면 신부들이 너무 힘들어 하기 때문이다. 신부들은 외친다. 예수님 언제 오세요. 저희가 너무 힘들어요!” 이런 주장들에 의하면 지상에서의 삶은 이를 악물고 견디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분은 심술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심술쟁이라 우리가 편하게 구원받는 것을 못 봐주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을 받으며 견뎌내는 것을 즐기시고 바라신다. 우리가 지상에 태어난 것은 천국행 티켓을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며 거기에 더하면 전도를 통해 구원받을 자들을 늘리는 미션을 위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진 그리스 사람들처럼 기독교에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참고 견뎌라! 그리하면 지옥의 형벌을 피하고 천국에서의 영생복락을 누리리라! 이것이 기독교의 인생관이다”라고.
대부분의 크리스천은 믿음을 가진 것을 후회하거나 고통스럽게 여길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죽어간 구원받은 강도이다. 그는 평생 마음대로 살다가 마지막에 예수 믿고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갔으니 말이다. 나도 그렇게 구원받고 싶다”라고 하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신앙생활=개고생=천국을 위한 필요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신앙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 것이 되겠습니까? “내가 왜 이렇게 젊어서 예수를 믿었지? 다 늙어서 죽기 직전에 믿었으면 평생 하고 싶은 거 실컷 하고 살다가 마지막에 에수 믿고 구원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인생의 즐거움과 구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은 미련이 여러분들에게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과연 신앙생활=개고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산을 취미삼아 오릅니다. 저 같이 산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그렇게 할 일이 없나? 땀 뻘뻘 흘려가며 산에는 왜 올라? 어차피 내려 올 것인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 사람들은 등산을 좋아하며 아마도 레저 생활 중에서 1,2위를 다투고 있다고 합니다. 전철에 오르면 등산 가방을 등에 멘 분들을 자주 봅니다. 오죽하면 등산복과 등산화가 잘 팔려서 노스페이스 사장이 “한국이 도대체 어느 산에 있는 나라인가”라고 부하에게 물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노스페이스에게는 한국이 효자나라인 셈이죠.
하지만 정말 힘들기만 하면 그렇게 기를 쓰고 산에 오를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처럼 절대 안 갑니다. 설령 늙어서 시간과 여유가 많아져도 저는 등산을 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정치를 할 생각도 없으니 ‘민주산악회’ 같은 모임에 가입해 억지로 갈 일도 없을 테니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등산을 좋아하는 분들은 오늘도 기를 쓰고 산에 오릅니다.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존경스러운 건지 미련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등산은 좋은 취미입니다. 일단 체력향상에 도움이 되겠지요.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현대인이 헬스클럽에 가서 인위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보다는 자연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등산을 통해 체력을 단련한다면 건강을 위해 얼마나 좋은 걸까요? 게다가 가격이 저렴하니 가성비도 좋습니다. 다른 취미나 레저는 돈을 많이 쓰지만 등산이야 뭐 그리 돈을 쓸 일이 있겠습니까? 물론 하기에 따라서는 돈이 들 수도 있지만 얼마든지 비용을 낮출 수 있지요. 또 친한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시간을 버리기에는 제격이죠. 산을 오르내리면서 나누는 이야기도 정겹기 그지 없을 것이고. 이래저래 등산이 갖는 매력은 쾌 큰 것 같습니다.
등산 뿐이겠습니까? 각종 레저생활에는 그 나름대로의 비용과 노력이 들어갑니다. 저는 미식가들이 존경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어디 맛있는 거 있다면 불원천리하고 달려가서 줄을 서서라도 먹고 오는 분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것에 쓸 시간도 노력도 너무 아깝기만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하지만 그 분들에게는 그런 노력이 아깝지 않으니 그렇게까지 해서 먹고 오시는 것이겠지요?
레저만 그렇습니까? 학생들이 대학진학과 취업을 위해 얼마나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투자합니까? 그것을 ‘개고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수능시험 날이 되면 우리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입시에 관심을 가지고 주시합니다. 수험생을 보면 격려의 말 한 마디라도 해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지요. 늦은 수험생에게는 경찰까지 초법적인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경찰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하는가?”라며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요. 지나가는 다른 차들도 경찰의 그런 행위를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지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 노력과 시간과 비용을 아낌없이 쓸 줄 압니다. 그것은 결코 ‘개고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등산을 하며 땀을 흘리는 사람들도 먼 곳에 있는 맛집에 가기 위해 적지 않는 기름값과 고속도로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행위를 ‘개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과도 과정도 즐겁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수험생도 내일의 합격과 그것이 주는 특권을 위해 아낌없이 그렇게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다를까요? 만일 ‘개고생’이라고 한다면 에수님의 다음 말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아니 신아앵활을 하면 없던 고생도 더 하게 되는데 ‘쉬게 하리라’가 말이 됩니까? 오죽하면 되도록 늦게 할 수만 있다면 죽기 직전에 믿고 싶어 할까요? 엄청난 모순인가요? 예수님은 고도의 사긴꾼인가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해놓고 짐만 잔뜩 더 지게 하여 고통을 강요하는. 에스더권 선교사의 말대로 빨리 예수님이 오셔서 짐을 덜어주기 바라며 우리는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일 뿐이라는 말입니까?
저는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더 일찍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예수 믿고 거듭나서 느끼는 그 풍성하고 평안하며 기쁜 삶을 제대로 안다면 그렇습니다.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도 결코 헛된 선언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그러한 삶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지 여러분은 정녕 모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대가로 개고생을 시키는 심술쟁이가 아니라 우리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믿으십니까? 아버지는 사랑하기에 자녀에게 징계를 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녀를 사랑하고 그의 삶을 염려해서이지 괴롭히기 위해서는 결코 압니다. 적어도 상식이 있는 아버지라면. “징계가 없으며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필자가 인용한 본문에는 ‘지혜 있는 자’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완벽한 존재로 만드셔서 죄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빛의 자녀로서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고통은 등산을 하는 과정에서 맛 집을 찾기 위해 다니는 과정에서 입시공부를 위해서 드는 노력과 비용과 같은 것입니다. 그저 편하자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서 뒹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결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만남이 가져오는 풍성한 삶의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는 애처러움이 느껴집니다. 사탄의 노예가 되어 하지도 않아도 될 고통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합니다. 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살아가야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주리라”고 선언하신 것처럼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때문에 염려할 일이 없습니다. “기도 할 수 있는데 왜 걱정 하십니까?”라는 찬양처럼 우리는 믿는 구석이 있기에 일상의 삶에서 별다른 염려 없이 평안을 유지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추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서도 나타납니다. 미국에서 조사한 바로는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5년 정도 길다고 합니다. 오래사는 것이 다는 아니겠지만 일단 긍정적인 결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스트레스 지수 등에서도 훨씬 나은 결과를 보였다고 합니다. 종교가 다 기독교는 아니지 않냐고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조사한 결과라면 기독교가 다수일 가능성이 매우 크겠지요?
우리는 결코 이 세상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목이 빠져라하고 천국에 갈 생각으로 고통을 이겨내며 힘들게 살아야 할 운명을 타고 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주안에서 자유롭고 진리를 통해 자유롭습니다. 우상과 각종 죄의 유혹에 승리하면서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리면서 성장하여 언젠가는 천국백성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되는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삶이 아닌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을 때 “보기에 좋았더라”고 기뻐하셨습니다. 물론 그로부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세상이 나빠졌고 또 노아의 홍수로 더 한 번 나빠져 인간의 수명이 1,000살 가까웠다가 10세 이하로 줄어 버리게 되었지만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이라는 찬양처럼 주님의 세계는 여전히 아름답고 훌륭합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그러한 아름다움을 행복하게 누려야 하며 누릴 권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겐 신앙생활이 행복 그 자체입니다. “아 내가 에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삶이 얼마나 삭막하고 힘들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아찔합니다. 예수님이 있으시기에 그를 믿고 따르기에 날마다의 삶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며 범사가 감사하기에 합당한 것이 됩니다. 죄의 유혹을 이겨내고 그 속박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고 자유로운 삶이지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면서 느끼는 속박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과연 자유로운 삶일까요?
언젠가 마약에 중독되어 흐느적 거리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물론 사진에서. 그들에게 자유가 있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그들은 마약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기에 마약이 주인이고 자신은 종 일 뿐입니다. 마약은 그들에게 결코 사랑을 주지 않고 오히려 파멸로 이끌 뿐입니다. 마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바로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자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가르쳐줍니다. 그렇습니다. 참다운 자유란 무절제한 삶이 아니라 절제를 통해 얻어진 자기 통제력을 바탕으로 삶을 이끌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걸음 한 걸음 이끄시는 친절한 아버지입니다. 그러한 과정은 잠깐의 고통과 길고 긴 안식의 삶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여 “지혜 있는 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가 됨으로써 “별과 같이 영원원토록 빛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의 영광에 비할 바가 아니다”라고 했는데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과정도 결과도 행복한 것이며 그래야 합니다. 혹시라도 신앙생활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일방적으로 개고생 당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면 생각을 고치십시오. 여러분이 누리는 자유와 기쁨 평안을 마약중독자가 잠깐 누리는 쾌락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마약 중독자의 미래는 파멸이지만 우리의 미래는 밝고 평안하며 빛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이 주는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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