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이다. ‘신의 개입’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른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마태복음 25장44절)
교육에 오랫동안 종사해오면서 가지게 된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가?’ ‘교육의 본질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여러 가지 고민이 있지만 가장 크게 저를 사로잡은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공교육과 사교육에 모두 관여했던 저이기에 느끼는 문제의식인지도 모릅니다. 공교육은 주로 교육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 같고 사교육은 실용적인 목적에 올인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런 역할분담이 과연 바람직한지 의문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공교육이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언 듯 바람직해 보이지만 현실을 너무나 무시하는 것 같고 사교육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도리어 현실적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최고의 성과를 올리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데 실제론 어느 쪽도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리 결과가 중요해도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는다면 비다 교육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최고의 결과를 내기는 어렵습니다. 사교육이든 공교육이든 대부분은 그러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돈을 벌고 싶으면 돈을 따라가지 말고 돈이 따라오도록 해야 한다는 말도 있지요? 사랑을 원한다면 사랑이 오도록 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부의 성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켄 베인의 명저 ‘최고의 공부’ (창의성의 천재들에 대한 30년간의 연구보고서)(와이즈베리, 2013)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눈 앞의 결과에 연연하여 하는 공부는 제대로 된 과정을 거쳐 한 공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입니다. 이것은 저자의 추상적 사유에 따른 판단만이 아니라 결과가 보여주는 엄연한 팩트입니다. 누가 나중에 사회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는가를 추적해 보니 제대로 된 공부를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뢰가 어느 정도 가시겠습니까?
공부의 목적은 눈앞의 성적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수긍하신다면 이 주장을 경청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느 교육강연에서 강사선생님이 그곳에 온 학부모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이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행복하게 살기 원하죠” “그렇죠?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죠?”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실지 모르나 실은 우리가 이 당연한 것을 잊고 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고요? 자녀의 행복이 목적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눈 앞의 성적이나 입시에 올인하여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눈 앞의 성적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해도 여전히 과정을 무시한 공부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대학입시에서 수석 만점자 등에게 듣는 전형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학교 수업에 충실했습니다.” 이 말을 그냥 인터뷰용 이야기로 흘려보내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다르다면 “저는 과외고 학원이고 일체 다니지 않았어요”라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원희룡이라는 정치가는 1981년에 실시된 학력고사(제1회이죠. 그 이전에는 예비고사였고 저는 1980년에 마지막으로 예비고사를 치뤘습니다)에서 전국 수석을 했는데 그는 진짜 사교육없이 수석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하지 않았던 학생은 오히려 소수인 것 같습니다. 사교육을 억제하고자 하는 당국의 권유(?)로 그런 인터뷰를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그럼 그렇지 사교육없이 어떻게 그런 성적을 내나’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학교 수업에 충실했다’는 말은 100% 정확한 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점에서 실패자입니다. 학교 수업시간에 딴 공부하며 입시준비하다가 폭망한 대표적 케이스이기 때문입니다. 학교 수업이 너무 쉽다고 생각해 그랬는데 그것은 패착이었습니다. 학교 수업은 특히 평준화 이후에는 모두에게 맞게 하기 위해 표준적 수준으로 수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기본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게다가 수업시간이 엄청나게 긴데 그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한다면 시간 낭비가 되지 않겠습니까?
고3 때 국어를 가르치신 홍성대라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이름이 수학의 정석을 지은 분과 같아 수학선생님이 아니냐는 농담을 자주 듣는 분인데 그분이 하신 말씀이 40년이 넘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자신이 예비고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방을 얻어 본고사를 준비했는데 그 때는 문제집을 집중적으로 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막상 시험장에 들어가자 생각나는 것은 문제집이 아니라 수업에서 배운 내용이라고 하시더군요, “정신이 멍했는데 선생님들이 가르쳐 주신 것이 생각나 답을 쓸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떻게 기억이 나느냐고요? 그 때만큼은 저도 수업에 집중(수업이라기보다는 공부법에 대한 강의라고 해야겠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 자신이 증거라고 할 수 있겠죠? 수업에 집중하는 것의 중요성을 증명해주는.
비단 이것만이 아닙니다. 수업시간에 들은 이야기를 당시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홍성대 선생님의 말씀도 그 때는 그러려니 했기에 저는 여전히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않고 딴 공부를 했고 그래서 더 기억에 남은 것 같습니다)나중에 그것이 이해되어 도움이 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나요?
얼마 전 제가 맡은 학생이 면접시험을 보았는데 꽤 좋은 결과를 보였습니다. 아직 합격자 발표가 나지 않아 완전히 성공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저는 이 학생에게 이러한 생각을 기초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는 지난 번 면접에서 제대로 된 답도 못하고 나왔다고 합니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정답만 달달 외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은 머리가 비상하게 좋은 아니가 아니면 굉장히 위험한 방법입니다. 이해를 동반하지 않는 암기는 선택형 문제에는 나름대로 통할지 모르나 면접장에서 그것을 그대로 표현하기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공유하고 스스로 표현하도록 한 뒤에야 암기를 시켰더니 그 잔상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답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해가 제대로 되니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것이죠.
아이들이 공부를 싫어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암기 위주의 공부입니다. 이해도 안 되는 것을 암기하는 것은 소화가 안 되는 음식을 먹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체하죠. 그럼 다시는 먹고 싶지 않을텐데 부모나 교사가 강요를 하니 그것이 맛있겠습니까? 제대로 소화도 안 되겠지요. 가뜩이나 소화가 안 되는데 억지로 먹으니 말입니다. 공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이해를 통한 공부를 하지 않으니 공부가 끔찍할 정도로 싫어지고 그러니 자발적 학습은 생각하기 어렵고 그래서 더 사교육에 매달리는데 그게 공부를 더 싫어하기 합니다. 악순환이죠.
어느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학교는 지역에서 이른바 꼴통학교였습니다. 인문계가 아니라 실업계인데다가 그렇다고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울여상이나 덕수상고처럼 전통이 있는 명문 실업계 고등학교는 썩어도 준치라고 어느 정도의 수준을 유지했지만 그런 학교는 아니었기에 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그런 학교에 의욕이 넘치시는 교장선생님이 부임하여 한 일은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교과서는 잊어라. 각자 좋아하는 책을 읽는다. 실시!“ 그날부터 학생들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가져와 학교 수업시간에 그것을 주구장차 읽기 시작했습니다. 독해력이 좋을 리가 없는 학생들이니 심지어 초등학생용 동화책도 읽었는데 그것을 말리지는 않았습니다. 교사들은 수업에 들어가 수업대신 학생들의 독서지도를 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독서지도라고 해 봐야 잘 읽고 있나 딴 짓 하나 감시하는 것이 주요업무이고 가끔씩 질문에 답을 해주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6개월 후에 나타난 풍경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교과서를 다시 집어들었고 밤늦게까지 ‘열공모드’에 빠졌습니다. 물론 교장선생님이 ”이제 책 그만 읽고 공부해야지“라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교과서를 들고 와서 읽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교과서도 책이니 말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누군가가 교과서를 읽기 시작하자 너도 나도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더욱 놀라웠습니다. 그 지역에서 진학성적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왜 이런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책을 읽다보니 활자공포증에서 벗어났고 혼자 읽으니 자율학습능력이 생겼습니다. 이 두 가지 점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의 특징인데 그것을 극복하자 공부에 대한 의욕이 생겨났고 그래서 공부에 자발적으로 올인하니 좋은 결과가 따른 것입니다. 공부를 하니 성적이 좋아진다는 상식이 그대로 통한 것입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 중에 열심히 공부했지만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는 아이들을 보면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니라 공부 비스므리한 것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대로된 공부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암기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처음부터 암기만 하니 성적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죠. 여러분 주위에 이렇게 공부해서 우등생이 된 학생이 있나요? 그건 아마 천재나 수재급의 학생일 겁니다. 실제로 교과서를 한 번 읽고 시험에 만점을 맞는 천재급 학생은 있습니다.
우리가 왜 영어를 그렇게 공부해도 영어를 못하는 줄 아십니까? 회화를 안 배워서요? 듣기를 소홀히 해서요? 맞는 말일지 모르나 정답은 아닙니다. 저는 일본어를 공부할 때 회화를 거의 공부한 적이 없지만 일본 가자마자 회회를 유창하게 했습니다. 이유는 일본어 책을 무지막지하게 읽는 과정에서 표현이 몸에 배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회화에 필요한 단어는 그 과정에서 자연히 몸에 배었구요.
영어를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영어를 공부하지 않고 영어공부 비스므리한 공부만 하기 때문이죠. 영어문장을 많이 읽고 듣고 하는 대신에 문법의 요령 시험 문제 풀기 요령만 공부하는데 무슨 재주로 영어를 합니까? 게다가 영어수업시간이래봐야 일주일 4시간 정도이니 절대양도 턱없이 부족하고. 우리가 모국어를 배울 때 얼마나 많은 시간 모국어에 노출되어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또 서론이 길어지고 말았습니다. 용두사미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 전문분야와 관련이 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음을 양해 바랍니다. 오늘의 필자는 자신이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한 차가운 태도를 자책하며 회개합니다. 그것은 마치 최후의 심판의 날에 염소의 무리가 되어 지옥에 가게된 무리의 하소연과 같습니다. ”제가 언제 주님을 외면했습니까?“ 이들과 반대로 행동한 사람들이 양의 무리로 분류된 사람들인데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는데 그것은 천사라는 사실을 알아서가 아니라 그가 평소에 하던 대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임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시험을 위해 요점만 외운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공부를 한 학생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제대로 답을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율법을 비롯하여 각종 계시에는 나그네 과부 고아를 소중히 여기고 이들을 도우라고 하는 말씀이 수도 없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율법을 받지 못했지만 그것을 스스로 알고 실천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고아 과부 나그네는 그 사회에서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존재이니 그들을 돌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겠습니까?
양의 무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실천했으니 주님의 말씀대로 산 것이고 염소의 무리는 구원만을 위해 살았으니 실패한 것입니다. 염소의 무리는 시험 잘 보려고 그래서 좋은 성적을 편하게 올리려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나와 답을 제대로 쓰지 못한 격입니다. 설령 시험을 잘 보았다고 해도 그들의 공부가 평생 그들을 지켜줄 수 있을까요? 사회에서는 실력이 가장 중요한 데 정작 실전에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제가 동생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재수를 하던 여동생은 좋은 수학선생님을 만나 수학에 대한 흥미를 되찾았습니다. 그래서 수학에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그 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자신은 요령없이 제대로 수학을 공부한 덕에 졸업할 때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고. 시험 때 벼락치기를 한 친구들은 당장은 성적이 좋았지만 결국은 자신에게 뒤떨어졌다고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요즘 신천지에 빠진 분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과정에서 사람이 왜 이단에 빠지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요령있게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장거리 경주이기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싫은 사람들은 요령을 원합니다. 왕도말이죠. 그러니 신천지에는 계시록강의만 있지 다른 성경부분에 대하여는 가르침이 상대적으로 빈곤합니다. 제가 다른 부분에 대한 동영상을 요구하자 보내 온 것은 빈약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그러더니 ”지금은 계시록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라고 강변합니다. ‘역시 그랬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단들의 공통점은 종말론을 필요이상으로 강조하여 상대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와야 구원받는다’고 하면 그대로 넘어갈 가능성이 커지죠. 마치 ‘이거 지금 안 사면 못사. 다 팔려가고 있어’하면 사고 싶어지는 것처럼.
여러분은 구원이나 축복을 위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연조가 짧아 아직 어린 신앙이라면 그렇게라도 해서 신앙생활에 집중하십시오. 기복신앙이 나쁜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장성한 신앙인이 되려면 더 이상 그런 것이 최종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른 신앙 그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부를 제대로 하면 시험공부만 한 사람보다(물론 시험공부는 필요하기는 합니다. 시험 시간에 집중해서 시력이 아닌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서)결과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처럼 제대로 신앙생활은 결국 구원과 축복을 가져옵니다.
오늘의 필자는 뒤늦게라도 회개하고 자신의 삶을 바꾸기로 했지만 여러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렇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오로지 축복과 구원에만 관심이 있는 성도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존재에 감사하고 따르는 성도와 누구에게 더 축복을 주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에게 구원도 축복도 수단에 불과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 같다“고 한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인간의 구원과 축복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때와 그 방법은 하나님만 아시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 조차 모르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 때를 알면 마치 도둑이 예고하고 찾아올 때처럼 철저히 대비를 (시험공부처럼)할 테니 하나님에게는 안 될 말이지요.
그분은 우리가 진정으로 변하기를 바라십니다. 사랑과 은혜로 넘치는 완전한 인간으로 말입니다. 축복이니 구원이니 하는 것은 결국 그것을 위한 일종의 당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냥 하는 말이니 양해 바랍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변해 진정한 행복과 기쁨 평안을 누리면서 살다 죽는다면 구원이 없다 해도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요? 반대로 평생 죄나 지으면서 괴롭게 살다가 죽는다면 지옥이 없다 해도 그 삶은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지었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가벼운 짐만 지었으니 비교가 됩니까?
하지만 구원과 축복만 노리고(?)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에게는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지요.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만일 목적이 오로지 구원과 축복이었는데 그렇게 원하던 축복도 구원도 못 받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믿음은 그 자체로 고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안내인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 그 자체를 제대로 하십시오. 그것이 결국은 구원과 축복도 얻는 지름길이라면 지름길이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신앙생활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그 상급도 제대로 받을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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