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태어나서’ 시대적 사명을 다한 정주영(5)
9. 정주영의 유산을 이어갈 길
(1) 가야와 그리스는 왜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나? 외압과 통일
고대 그리스와 가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역사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두 가지를 바로 들 수 있다. 하나는 통일을 이루지 못한 점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번영하였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야 서양문명의 한 축인 헬레니즘을 만들어냈으니 그 위대함이야 누구나 다 아는 것이지만 가야 역시 철의 생산과 일본과의 무역으로 엄청나게 번영했음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끝내 로마나 페르시아와 같은 대제국은 물론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고대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이들 제국과 고대국가에게 멸망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 우리에겐 매우 석연치 않게 여겨지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는 먼저 질문 자체가 잘못되어 있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는 왜 통일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이 없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같은 지역에 조그만 나라가 셋이나 있는데 그들 주변의 독일 프랑스와 같은 대국이 포진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하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조금은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있지 않는가? 통일이란 절대적으로 해야 할 과제가 아님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이른바 베네룩스 3국)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들이 통일되지 않았다고 해서 큰 문제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의 통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멸망을 애석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야는 몰라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 철학을 꽃피우고 민주주의를 실현한 그리스는 우리에게 동경의 대상이기에 더욱 그렇다. 오늘의 그리스를 생각하면 ‘어떻게 찬란한 고대 문명을 꽃핀 나라가 저렇게 형편없어졌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을까 하는 분노가 생기고 그 때문에 ‘그때 그리스가 통일이 되어 로마에게 멸망당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그리스는 더 멋진 나라가 되었을 거야’라는 나름대로의 추론을 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오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문명은 그리스 도시국가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이어져 서양문명의 원천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로마제국의 황제로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지금의 이스탐블인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기고 자신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명명한 것을 상기해 보자.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물론 그 당시 그리스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 만일 로마의 지배로 그리스 문명이 파괴되거나 몰락했다면 로마 황제가 무엇이 아쉬워 그곳으로 수도를 옮겼겠는가? 우리로 치면 수도를 강원도 바닷가로 옮기는 일은 결코 없을 것처럼. 모름지기 수도라면 그 주변까지 어느 정도 받쳐 줘야 되는 곳이 아닌가? 현재 춘천이 강원도 도청소재지인데 그곳이 분지라 주변과 고립되어 있어 도민들의 불편이 매우 커서 원주로 옮기자는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한낱 도청소재지도 그런데 수도라면 어떨까? 궁예가 철원에 수도를 정한 것이 몰락의 원인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왕건이 송악으로 옮긴 것은 자신의 근거지라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빛은 동방에서’라는 서양의 오래된 말이 있다. 여기서 동방이란 지금의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지역을 말한다. 거기에 더한다면 그리스지역이 들어갈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서양하면 일단 서유럽과 미국을 떠오를 정도로 익숙해 있지만 미국은 물론 서유럽도 고대는 물론 중세까지도 문명의 중심에서 먼 변방에 불과하다. ‘어? 로마제국은 뭐야?’ 할지 모른다. 로마제국이 국위를 떨치고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그들이 문명의 중심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강대국이 곧 문명의 중심지는 아니다.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강대국이 되었지만 문화는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헨델 같은 인재를 영입하여 그것을 보충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생각해 보라. 영국 출신의 음악가나 화가의 이름이 떠오르는가? 철학자는? 그나마 사상가로서 버트란트 러셀, 프란시스 베이컨 등이 떠오른다. 이들을 철학자로 여겨도 칸트, 니체, 헤겔, 마르크스, 사르트르, 앙리 베르그송, 미셀푸코 같은 이름에 비하면 왠지 무게감이 떨어지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로마는 그리스문명에 얼마나 동경심을 가졌으면 신들까지 빌려와 쓰는가? 그만큼 로마의 문화수준은 동방의 그것에 훨씬 뒤진 상태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동로마제국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동로마제국이 서로마 멸망 후에도 천년이나 지속되었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 같지 않다. 그저 운이 좋아 아니면 쇠퇴의 방부제라도 써서? 뭐 이런 식 아닐까? 우리가 아는 중세=암흑기라는 주장은 현재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는 자들이 대부분 서유럽 출신이기에 생긴 편견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중세=암흑기라는 도식은 서유럽이라는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특수한 현상일 뿐이지 보편적인 역사를 반영할 근거는 서유럽 외에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동로마제국이 지배한 동방은 문명의 꽃을 피웠고 그것은 중동지역과 북아프리카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군이 공연히 이슬람에게 패했을까? 당시 이슬람제국의 과학 수준은 오늘까지 이어올 정도로 엄청났다. 이슬람제국이슬람 제국 하면 그저 무릎 꿇고 기도나 하는 모습 사막 이런 것을 연상할지 모르나 이슬람 제국의 번영은 로마제국을 능가하면 했지 못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도 서유럽의 무식한(?)학자들이 중동=뒤떨어진 지역으로 만들고 마치 중세에는 전 세계가 다 암흑기였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편견을 생산한 것이다.
서로마제국이 망하고 서유럽은 몰락했다기보다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나마 동방의 문명을 열심히 퍼 날라 그럴듯하게 꾸몄던 서로마제국이 망하고 야만적인 게르만족의 세상이 되자 로마문명은 쇠퇴하고 과거의 야만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은 로마를 포함하여 한 번도 문명의 중심이 된 적이 없으며 서양문명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동방-그리스, 중동, 아프리카 북부였다. 비록 그리스라는 나라는 망했으나 문명적으로는 로마제국을 지배했고 콘스탄티노플 황제는 동방의 높은 문명에 끌려 수도를 이전했던 것이다. ‘나 시골에(로마) 살기 싫어’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동방의 문명은 서유럽이 르네상스를 통해 고대 문명을 회복하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 동로마제국이 망하고 숨어있던 많은 동로마의 지식인들이 르네상스를 일으키는데 기여한 것이다. 그것은 동로마가 천년 이상 고대 문명을 유지발전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동로마제국의 공식언어가 헤라클리우스(575년 – 641년) 재위 시에 이미 라틴어에서 헬라어로 바뀌었을 정도로 동방문화는 수준 높은 것이었다. 중세유럽에서 라틴어가 공통어라는 생각도 사실은 서유럽의 이야기일 뿐 동유럽에는 전혀 관계없는 사실 임도 알아야 한다. 문명은 국가와 하나는 아니었다.
그런 훌륭한 문명을 구축한 그리스 그리고 가야가 통일을 못 이룬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압박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로 일본을 들 수 있다. 일본은 700년 무렵 율령국가를 완성하여 통일을 이루었으나 400년 정도 지난 1180년 경에 무사의 정권인 막부가 세워지면서 분열이 공식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일본 국내는 천황과 조정의 지배지역과 막부의 지배지역으로 나뉘었고 그나마도 정부의 공식지배가 미치는 곳은 드물었다. 대부분은 무사나 귀족 황실에 의해 개인적으로 지배되었으니 사실상 분열된 상태였다.
그것이 15세기에서 16세기의 전국시대를 거쳐 완전한 분열로 이어졌고 이를 통일한 것이 바로 도요토미이다. 물론 도요토미의 통일은 중앙집권국가의 부활이 아니라 끊임없이 벌어진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유지하게 된 것이며 도요토미는 영주의 리더로서 군림할 뿐이었다.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통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가 서유럽의 중세를 보편적 현상이라고 여기게 된 것은 일본 학자들의 영향이 컸을지 모른다. 일본과 서유럽은 상당히 유사한 발전을 해 왔다. 고대국가인 율령제 국가의 해체와 중세봉건제의 성립으로 인한 분열 문명의 쇠퇴라는 점에서 놀랄 정도로 서유럽의 그것과 닮았다. 일종의 축소판 (일본이 서유럽보다 훨씬 작으니까)이라 할 수 있다.
가야의 경우를 살펴보자. 가야는 김해평야지대의 풍부한 생산력을 발판으로 일어난 나라들의 연합체이다. 거기에 풍부한 철의 생산지이기에 더욱 번영을 하였다. 당시 한반도에는 많은 소국들이 존재했고 가야도 그렇게 형성되었다. 마한이나 진한 변한 그런 나라들은 그렇게 소국들이 연합하여 세워진 일종의 연맹체로 오랫동안 남아 있게 된다. 가야도 그런 연맹체였다. 그것은 가야만의 특징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 일부가 통합되어 고대국가인 신라 고구려 백제 등을 이루었다. 그중 고구려 백제가 가장 강성했고 그래서 주변 국가들을 통합해 갔다. 이들이 강성해진 것은 그들 나라를 세운 시조들이 부여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주몽 온조 비류는 부여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고 당연히 북방기마민족이다. 그들은 각각의 지역에서 토착민들을 물리치고 왕국을 세워 주변 국가를 복속시켜 갔다. 동예 옥저 등과 같은 연맹체 수준의 지역에 대한 정벌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4세기에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을 멸하면서 두 나라가 접경을 하게 되어 치열한 패권다툼이 벌어지게 된다. 그 중심에 근초고왕과 고국원왕 그리고 광개토왕 장수왕이 있다.
하지만 가야의 인접 국가인 신라는 그렇지 못했다. 신라는 기마민족과 토착민족이 함께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혁거세의 신화를 보면 혁거세와 주변의 세력가들이 협력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토착민과 이주민의 연합을 의미한다. 신라가 골품제도, 화백회의와 같은 제도와 기구를 둔 것도 이러한 타협으로 국가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고구려와 백제에는 그런 타협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느닷없이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나마 주몽이 졸본 지역의 가문과 혼인을 한다는 식의 타협적 요소가 보이나 신라처럼 ‘협치’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백제와 고구려가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에도 한반도의 남부는 –충청, 전라. 경상지역-은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가 유지되었다. 근초고왕이 마한과 가야를 정벌했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간접지배였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특히 가야에는 거의 완벽한 자치권을 주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독립 국가였다. 근초고왕이 간접지배에 만족해야 했던 것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남한지역의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일본과도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써 국력을 고구려와의 다툼에 집중하고자 했던 것이다.
만일 백제나 신라가 가야에 압박을 가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실제로 6세기에 신라가 가야를 압박한다. 신라는 백제의 패권에 저항하여 동맹국을 고구려로 갈아타고 이를 알아차린 백제의 보복으로 왜군이 쳐들어오자 고구려의 도움을 청해 광개토왕의 55만 대군이 출동한다. 하지만 고구려는 그 대가로 신라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요구하게 되고 신라는 이번에는 다시 백제로 동맹국을 갈아탔으니 이것이 유명한 나제 동맹이다.. 그런데 막상 동맹의 힘으로 한강유역을 차지하자 다시 배신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빼앗는 배신을 하였다.
신라의 역사는 배신의 역사이며 신라는 배신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신라가 자리 잡은 경북지역의 경지가 적고 생산력도 낮기 때문에(지금의 경북을 생각하라)국력을 키우기 어렵고 게다가 중국 대륙과의 직접적 통교도 힘들어 발달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왜 가야 등과의 동맹으로 나라를 유지하려고 했는데 그러기에 상황에 따라 동맹국을 갈아타곤 하였다. (약소국의 서러움. 오늘의 우리 같다)
신라가 가야에 지배하게 된 것은 신라의 배신으로 백제가 잠시 주춤하던 6세기 중반이었다. 한강유역을 차지하여 중국과 통교가 자유로워지고 국력이 신장되자 신라는 가야를 차지하고자 압박을 가하게 된다. 그 이전부터 신라의 압박을 받아 이미 금관가야가 스스로 항복을 하여 대가야가 중심이 되었으나 562년에 대가야도 진흥왕에 의해 멸망당하고 나머지 가야연맹국가들도 신라에 복속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왜 그런 상황에서 하나가 되어 신라의 압력에 대처하지 않았는가?’라 고.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춘추전국시대 말기 강대해진 진나라에 대항하여 6국이 세운 ‘합종책’이 실패한 것과 같다. 대등한 나라들끼리의 연합이 어렵기도 하고 진나라의 방해공작도 만만치 않았다. 각국은 그 방해공작으로 하나로 마음을 모으기 어려웠다. 상대가 진과 짜고 자신들을 속이려는 것이라는 불신도 컸다. 결국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차례로 진나라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가야 역시 마찬가지이다. 차라리 신라와 백제가 가야를 보다 일찍 압박하여 지배하려고 했다면 그렇게 되었을지 모르나 이미 독립성이 강한 연맹이 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쉽게 하나가 되기 어려웠다. 신라의 경우도 중국에서 건너온 흉노의 후손인 김알지의 후손이 왕이 되면서 강력한 권력이 형성되고 그것이 가야에 대한 압박을 가하게 된 원인이라고 한다. 신라는 그런 극적인 변화가 있었기에 그나마 통일왕국을 이루었지만 가야에는 그런 계기는 없었고 끝내 연맹체로 남아 있다가 결국 망한 것이다.
그리스의 경우도 비슷한 이유 때문에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우리는 페르시아 전쟁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가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스는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에 외부의 침략을 거의 받은 적이 없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특별한 예외이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야심을 갖고 벌인 전쟁이었으나 그리스는 단결하여 물리쳤다.
이 전쟁으로 그리스는 통일의 움직임을 보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 결과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일어난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었다. 그들은 너무 오랜 세월 독립된 도시국가를 유지해 왔기에 한 번의 위기로 하나가 되기는 불가능했다. 마치 유럽에서 나폴레옹이나 히틀러 샤를 대제나 오토 대제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 로마제국의 부활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것과 같다. 결국 유럽을 하나로 만든 것은 두 번의 대전이라는 내전을 거치고 냉전으로 찾아온 위기의식이었다. 소련에 대비하기 위해 유럽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서독 수상 아데나워의 주장이 결국 오늘의 유럽연합을 이루었다. 하지만 페르시아 전쟁에 승리한 그리스 시민들에게 통일이 절박한 과제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 때의 통일 노력은 그렇게 무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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