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이야기

예수의 경제학(10)예수 유효수요를 말하다. (하늘에 쌓아둔 보물)

닥터 양 2021. 4. 24. 00:18

예수의 경제학(10)예수 유효수요를 말하다. (하늘에 쌓아둔 보물)

 

(해설) 성경에는 경제에 대한 이야기가 엄청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서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빼면 부스러기만 남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이다. 그만큼 경제는 인간에게 중요한 부분이라는 의미로 마르크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의 경제관을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번 이야기는 예수의 설교 중에 가장 유명한 산상수훈의 하나로 전해지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산상수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산상수훈이란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설교인데 어디서 한 것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다만 예수가 산 위에서 군중을 향해 한 설교라고 되어 있어 산상(山上)에서 내려준 수훈(垂訓)이라는 의미에서 산상수훈이라고 불리고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구하라 얻을 것이다. 찾으라 찾을 것이다.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등의 유명한 가르침이 여기에 다 들어 있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치 혹은 교리가 이곳에 모두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문제는 이것을 교인이나 목회자나 실천하지도 할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세상이 혼란하고 각박한 것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하지 않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쉬운 것을 어렵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어렵게 이야기하면 뭔가 대단해 보이니 따르는 시늉이라도 하게 되는데 쉽게 말하면 권위가 없어 보이니까 무시하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물론 그 덕분에 성직자들이 밥 먹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땅에 보화를 쌓지 말고 하늘에 보화를 쌓아라. 거기는 벌레 먹거나 녹이 슬지 않는다여기서 하늘이란 무엇일까? 교회에서는 당연히 헌금을 의미한다고 가르친다.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그러니 수지맞는 투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씨 뿌리기 비유에서도 자주 나오는 말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헌금의 크기와 정성에 의해 축복을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3060100배도 축복의 크기로 여긴다.

  하지만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할 때는 갑자기 현실적 계산기가 작동되는 경우가 많다. 이건 경험담이니 믿어주기 바란다. 헌금하라 할 때는 신비주의 교회가 내야 할 때는 현실주의라는 이중적 사고가 버젓이 통하고 있다. 심지어 주일학교 행사를 할 때조차 그 좋던 신앙은 어디 갔는지 예산 타령만 하는 교회도 있었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며 헌금을 독촉하던 입으로 말이다. 교회에 뿌리면 하나님이 복을 주지만 교회가 뿌리면 그런 축복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가? 왜 교회가 돈을 쓸 때는 그런 좋은(?) 믿음이 사라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예외는 있다. 목회자에게 주는 사례나 기타 비용을 지출할 때는 다시 축복의 원리가 작동한다.

  하지만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이 헌금과 종교적 기부만이 아님은 성경을 조금만 읽어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다른 나라는 잘 모름) 기독교도들은 성경을 스스로 읽고 이해하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고 목사들의 가르침만으로 살아가니 그들의 잘못된 생각마저 습득하여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으니 신앙생활을 교회 생활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점을 이용해 목사들은 신도들을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들로 만드니까 빤쓰목사같은 터무니 없는 인간이 설쳐도 신천지가 나타나도 그저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믿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토록 비난하던 바리새파와 그들을 따르는 유대인들처럼. ‘맹인이 맹인을 따른다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구약의 율법부분을 읽어보면 이스라엘은 하나의 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야훼 라는 이름의 하나님은 마치 사회복지정책을 추진하는 정치가처럼 느껴진다. 율법은 그러한 야훼의 마음이 배여 있는 명령인 것이다.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구약의 하나님을 무섭고 엄한 존재로만 그리는 중상모략에 열중이다. 만일 구약의 하나님이 엄하고 무서운 존재이기만 했으면 이스라엘은 사라져도 열 번은 사라졌을 것이다. 필자는 구약을 수없이 읽으면서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사랑에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만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직접 세상을 통치를 해야 했으니 엄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바울이 이야기 한 대로 초등학문 수준의 백성을 다스리려니 매를 대고 호통을 쳐야 했고 그것이 엄하고 무서운 모습이라는 선입견을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성경에 대한 무지가 이렇게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는 그러한 구약의 공동체 정신을 되살리려고 하려고 애썼고 하늘에 쌓는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정신의 표현이다. 그가 말한 하늘에 쌓는다는 것은 가진 것을 나누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지 헌금을 많이 하라는 의미는 절대 아닌 것이다. 물론 교회라는 조직을 통해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 헌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교회헌금으로 등치 시켜 교회의 수입을 극대화시키려는 목회자는 적지 않다. 심지어 모교회에서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도움은 교회의 역할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 가르침에서 케인스의 유효수요이론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29년 뉴욕증시로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자 케인스이 유효수요이론이 각광을 받았다. 그 이전에는 물건이나 서비스를 공급하는 것이 중시되었으나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이 이루어지자 이제는 과잉생산에 의한 공황이나 불경기를 염려하게 되었고 케인스는 이를 발견하여 수요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이 기부나 각종 복지제도를 통한 소득의 재분배를 의미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소비를 할 능력이 생겨 유효수요가 증가하게 되기니 경제가 살아나게 된다. 스웨덴의 경우 세전소득격차는 세후에 반 가까이 감소하며 이는 낭비가 아니라 경제가 활성화되는 것에 쓰여지는 것이다. 사회복지가 유효수요를 확대시켜 경제를 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소득의 양극화로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가 되었다. 이를 시정하여 빈부격차를 줄이고 유효수요를 확대시킴으로서 경제를 활성화시킬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니 경제자체도 침체되어 버렸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국가들은 국민소득 10위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재분배시스템으로 유효수요의 확대가 큰 힘이 될 것이다. 우리도 저금리정책이나 공적자금 투여로 유효수요확대를 노리고 있으나 그 돈이 부자들에게만 몰리니 유효수요가 늘어나기 어렵다. 부자의 수는 적고 그들의 수요만으로 국가 경제가 획기적으로 활성화되기는 어렵다. 다수의 서민 경제가 살아나야 국가 경제가 살아나고 그러기 위해 그들이 유효수요가 되기 위한 소득을 얻어야 할 것이다.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은 이렇게 국가경제를 활성화시켜 궁극적으로는 부자들에게도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 경제가 살아나면 부자들의 소득도 당연히 올라가기 때문이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같은 위기에 도산하는 기업들의 오너들 역시 몰락하고 호경기에 그들도 대박을 맞는 것은 엄연한 현실 아닌가? 외환위기에 얼마나 많은 부자들이 몰락했는지를 되새겨보라.

  한국의 은행금고에는 돈이 넘치고 있지만 경제는 어둡다. 이 돈이 세상으로 나아가 돌고 돌면 경제는 살아난다. 그것을 소유한 부자들이 하늘에 재물을 쌓게 되면 가능한 일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바로 그런 것이었을지 모른다. 과거 이스라엘의 공동체 정신이 무너진 당시에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도록 하여 되살리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그것은 결국 민족경제를 되살려 부자들에게 몇 배의 이익이 되어 돌아갈 수 있음을 예수는 3060100배의 축복으로 표현한 것일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도 우리가 그렇게 판단할 수 있으면 된다. 코로나 시대에 무너지는 경제에는 이러한 원리의 구축이 더욱 절실할지 모른다. 우리 모두 은행강도가 되어 금고를 텅 비게 하고 경제를 살리도록 하자. 단 칼은 말고 카드나 통장을 들고 달려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