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어떻게 해야 하나?(7) 진정 보호해야 할 대상
일본 근현대 경제사에 있어서 분기점이 되는 시기가 1930년대이다. 1929년 뉴욕 증시 폭락으로 시작된 세계대공황이 일본을 습격한 것과 함께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이후 일본은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과의 태평양전쟁을 치루는 이른바 ‘15년 전쟁’기를 맞이했다. 만주사변과 중일 전쟁 사이에는 5년 정도의 공백이 있기에 ‘15년 전쟁’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프랑스와 영국 간의 ‘100년 전쟁’도 100년간 지속적으로 전쟁을 한 것이 아님에도 ‘100년 전쟁’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세 가지 전쟁은 원인과 경과 등에서 하나로 이어지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근대 이래 추구하던 대륙 정복의 야망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전쟁이라는 점에서.
노구치 유키오 교수가 ‘1940년 체제’라는 책에서 ‘15년 전쟁’이 일본경제를 민간주도에서 국가주도로 바뀌었다는 주장을 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1920년대까지 일본경제는 영국이나 미국처럼 자유주의시장경제가 지배적이었는데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공황의 수습도 겸하여)국가가 경제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고 그것이 ‘1940년 체제’로 완성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본경제의 특징으로 남아 1990년대까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버블경제 붕괴로 어려움을 겪던 당시에 제기된 국가 주도적인 경제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 제기되었다. 노구치 교수는 ‘1940년 체제’의 영향으로 형성된 국가주도 경제로부터의 탈피야말로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필자도 그의 의견에 공감하였고 박사 논문 역시 그러한 취지로 집필하였다. 필자는 일본 산업혁명기(1880년대 후반에서 1910년 전후)의 정부의 산업정책을 분석한 결과 국가의 개입은 의외로 적었으며 민간이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통계로나 사료상으로도 명백함을 밝히고 이를 한국의 경제 발전기와 비교함으로써 일본의 산업화는 오늘날의 개발도상국보다는 선진국의 유형에 가깝다고 결론지었다.
노구치 교수나 필자의 주장이 사실 여부를 떠나 1930년대 이후 일본경제에 국가의 개입이 보다 강력하게 실현되었다는 점에는 어느 쪽에서도 이의가 없는 듯 하다. ‘1940년 체제’란 한 마디로 전쟁에서의 승리를 최고의 목표로 정하고 이를 위해 이른바 ‘총력전 체제’를 구축한 것을 의미한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군부는 현대전에서는 전방과 후방이 없는 ‘총력전 체제’구축의 절실함을 느꼈고 이를 위해 꾸준히 준비를 하여 왔고 이를 만주사변과 세계 대공황을 계기로 정책과제가 되도록 밀어부쳐 그 실현에 성공한 것이다. 이는 1910-20년대의 자유주의적 분위기에서 성립된 의원내각제라는 민주주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일련의 테러와 쿠데타 음모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이제 정권은 군부, 정당, 관료의 연합세력의 몫이 되었고 그들은 군부에 의해 조성된 전쟁 모드의 완성을 위해 국가의 경제개입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에게는 매우 친숙한 전쟁체제의 구축 과정에서 의외일지 모르나 경제적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정책이 대폭적으로 도입되었다. 이것은 파시즘 체제의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도 일어난 현상인데 그들이 추구하는 국가사회주의란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계급투쟁에 의한 피착취민중의 해방이라는 목표를 국가가 어느 정도 실현시켜줌으로써 사회주의적 혁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의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전쟁의 승리를 위해 천황을 정점으로 하나로 뭉쳐야 하는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천황의 적자’인 민중에 대한 착취를 허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목적은 다르지만 스웨덴의 ‘국민의 집’ 운동과 같이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여긴다는 전제하에 차별이나 착취를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이 과정에서 토지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오늘날 일본의 부동산에 대한 제도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 세입자는 철저히 보호를 받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말해 특별한 문제-임대료의 장기적 미납, 주택에 대한 고의적 파손 행위 등-를 일으키지 않는 한 영구히 거주가 가능하며 임대료 인상도 철저히 제한받고 있다. 임대인이 개축공사나 신축을 하고 싶어도 세입자들의 동의가 없으면 거의 불가능하며 (자신이 거주하겠다거나 자식을 들이겠다는 것도 불가)상가의 경우도 30년까지 법적 보호를 받는데 그 이후에도 세입자를 내보내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기에 주택과 마찬가지로 영구적 보호를 받고 있다 할 수 있다.
일본사람들의 자산에서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예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바로 지주나 건물주의 권리가 우리보다 훨씬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바로 전쟁경제체제하에서 국민의 철저한 협력을 구해야 했던 일본 정부가 실시한 경제적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조치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무라이의 나라 일본에서 전쟁은 절대적인 과제이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집중하여 온 그들에게는 이러한 혁신은 자연스러운 결과일지 모른다. 고려시대 후반 이래 스스로 나라를 지켜낸 경험이 없는 우리가 한국전쟁을 수행하면서도 적전분열을 한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전쟁 역시 남의 힘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오늘날에도 국가 안보를 남의 손에 맡기고 있는 우리에게는 생각하기 어려운 변화라 하겠다. 훗날 박정희는 안보와 경제를 위해 자신이 배운 일본의 총력전 체제를 도입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일본의 경험에서 진정 보호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배워야 할 것이다. 건물주나 임대업자의 손해는 세입자의 피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 하나만 생각해도 그렇다. 세입자들이 엄청난 비용과 노력으로 일군 결과를 건물주가 날로 먹는 행위는 허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려면 땀 흘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로소득을 챙기는 사람들보다 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수 대에 걸쳐 유지되는 전통적인 점포가 존재하는 것은 이러한 원칙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지주중심주의’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양반지주들이 권력을 바탕으로 막대한 토지를 사유화하고 이를 통해 부귀영화를 누리던 전통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외치는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다. 그들이 외치는 자유지상주의로 인해 도리어 제대로 된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호해야 할 대상을 잘못 찾으면 아담스미스가 통탄해 마지 않던 권력에 의한 시장원리의 훼손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도 좋은가?
일본의 어느 저자가 한국을 가리켜 ‘무덤에 지배되는 나라’라고 하였다. ‘무덤’이란 전통적 인습을 상징한다. 제사나 장례와 같은 죽음에 관한.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부동산 (토지)에 지배되는 나라라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는 봉건적인 시대의 사고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봉건제의 핵심은 토지에 대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은 서양을 토지에서 해방시킨 혁명이었다. 우리도 ’토지에서의 해방‘을 선언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 본다. 그 날에 우리의 경제는 더 높이 날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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