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이야기

예수의 경제학(8) 예수 글로벌 경제를 말하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닥터 양 2021. 4. 11. 00:33

예수의 경제학(8) 예수 글로벌 경제를 말하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해설) 성경에는 경제에 대한 이야기가 엄청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서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빼면 부스러기만 남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이다. 그만큼 경제는 인간에게 중요한 부분이라는 의미로 마르크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의 경제관을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번 이야기는 예수의 이웃 사랑에 있어서 이웃이 누구인가를 놓고 예수와 바리새파와의 논쟁이다. 시도 때도 없이 예수의 명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논쟁을 걸어온 바리새파인들은 예수가 가장 강조하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파고든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손 댈 수 없는 금기이니 논쟁의 주제는 이웃 사랑인데 그렇다고 이웃 사랑 자체를 부정하기 어려우니 이웃이 도대체 누구인가를 물고 늘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이웃이란 말이 옆집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이웃의 범위를 어디까지 넓혀야 하는가? 고대사회에서 더구나 민족 간의 다툼이 가장 치열한 지역 중 하나인 중동에서 이것은 매우 민감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질문은 예수가 맞닥트린 난문 중에서도 손꼽히는 난문이었다. 자칫하면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그동안 쌓아온 명성이 와르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이런 상황에서도 놀라운 답변으로 상대를 굴복시켰다. 그래서 나온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유명한 이야기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자선을 위한 모임에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영국에서 활동중인 세계적인 경제학자 장하준은 나쁜 사마리아인이라는 저서를 내기도 하였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이야기를 역으로 이용한 것인데 아마 이 이름으로 책이 훨씬 더 팔렸을 것 같다. 당장 필자도 그 제목이 끌려 책을 보았을 정도이니. 너무나 유명해지니 갖가지 해석이 범람한 것은 물론이다.

  예수의 이야기는 한 유대인의 여행으로 인해 비롯되었다. 가는 길에 그는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긴 것은 물론이고 거의 죽도록 매를 맞고 길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곁을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모두 그를 모른 척하고 지나가버렸다. 제사장은 성직자에 해당되고 있고 레위인은 지금으로 치면 교회직원에 해당된다. 그런 그들이 죽어가는 동족을 외면하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이웃사랑을 실천할 사람들인데.

  그리고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지나가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발견하고 치료와 함께 가까운 주막으로 가 주인에게 남은 치료를 부탁하고 돈까지 건넨다. 아울러 만일 돈이 더 들거든 돌아오는 길에 내가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사마리아인이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어 있을 때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 당한 후 이민정책에 의해 혼혈이 다수 발생한 지역의 사람들을 말한다. 유대인에게 그들은 이방인보다 더 혐오스러운 존재들이었고 그런 인식에 분노한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을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다. 우리와 일본 이상으로 견원지간이었는데 놀랍게도 이 이야기의 사마리아인은 쓰러진 유대인을 정성껏 돌보았던 것이다.

  예수의 이웃에 대한 답은 한마디로 누구나였다. 즉 예수는 당시로서는 매우 담대하다 할 인류애를 주장한 것이다.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라는 예수의 질문에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는 답이 나왔다. “그럼 자네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예수는 당부한다. 원수지간인 사마리아인이 사랑을 베풀었으니 이웃이라면 다른 민족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편협한 민족주의로 뭉쳐진 유대인들에게 이는 놀라운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예수가 그냥 모든 인류가 이웃이다라고 했다면 이 논쟁은 시시하게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비유를 통해 국적이나 민족을 뛰어넘는 인류애를 생생하게 가르쳐준 셈이다.

  이 비유는 자칫 불쌍한 사람을 도우라는 자선적 의미로 해석되기 쉽다. 물론 그것도 틀린 답은 아니나 의미가 너무 협소해진다. 예수는 수도 없이 자선을 이야기 했는데 이것은 조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의 차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선을 이야기할 것이면 굳이 사마리아인이라는 정체성을 들먹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국적 민족을 초월한 인류애임을 명확히 하고자 한 것이다. 가히 중동의 종교사에 빛나는 혁명적 선언이 아니겠는가?

  글로벌시대라고 하지만 우리의 사고는 여전히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틀에 머물고 있다. 필자가 그것을 뼈저리게 느낀 에피소드가 있다. 필자의 장녀가 일본에서 태어나 살다가 먼저 엄마와 함께 귀국하여 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자신은 태어난 것이 일본이니 일본사람인 줄 알았는데 담임 선생님이 부모님이 한국 사람이니 너는 한국 사람이라고 하여 혼란에 빠진 일이 있다. 고민 끝에 내린 필자의 답은 너의 조국은 한국이기도 하고 일본이기도 하지였다. 이제 그 딸이 성장하여 일본인과 결혼하여 일본에서 살면서 아이를 낳았으니 과연 이 아이는 일본인일까 한국인일까? 여전히 국적은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글로벌 경제시대에 알맞은 정신구조의 중요성을 일러주는 것 같다. 중국은 한국전쟁 때 우리와 전쟁을 한 적국이지만 지금은 가장 경제적으로 교류가 활발한 나라이다.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이 쓰러져 있는 유대인을 민족적 정체성을 무시하고 치료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글로벌 경제에는 글로벌 마인드라는 구호를 2천년 전에 외친 셈이다.

 이러한 정신이 아마 유대인들이 세계를 누비며 비즈니스를 하여 성공한 원인은 아닐까? 아울러 수많은 유대인들이 국적에 관계 없이 활약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떨친 것일지 모른다.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혁명처럼 인류의 보편적 정신을 위한 사건이 유대인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의 표어도 유대인의 솜씨이다.

  우리는 유대인에 비해 이러한 글로벌정신이 형편없이 뒤떨어져 있음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과거에도 해외에서의 다국적 모임에서 한국인들은 끼리끼리 모여 놀곤 하였지만 지금도 우리는 배타적이고 편협한 민족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유대인의 민족주의는 매우 견고하나 그렇다고 배타적인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도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정신이 필요하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속편을 쓴다면 그가 유대인과 의형제가 되어 서로의 사업을 도와 둘 다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세계는 넓고 사람은 많다라는 마음으로 세계를 누벼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