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가끔은 머뭇거려야 인생 이란다
제3부 아름다운 삶 배우기
(4) 아들아 좋은 스승은 정신적 어버이란다.
아들아 요즘 아빠는 과거의 인연들과 만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단다. 추억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었던 과거의 인연들이 마치 미이라가 살아나듯이 아빠의 삶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에 그저 놀랍고 기쁠 뿐이야. 바라건데 그런 기적이 끝까지 좋은 것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구나.
그 중에 아빠는 두 분의 옛 스승과 인연을 회복하게 되었지. 한 분은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시고 또 한 분은 고등학교 1학년때 음악선생님이셨지. 두 분다 아빠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으신 분들이란다. 두 분과 연락이 닿고 뵙기도 하면서 과거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내 안에 있었음을 알고 또 한 번 놀랐구나. 마치 엔터키를 누르면 그에 관련된 정보가 무수히 떠오르듯이 말이야.
아들아 너의 삶에서도 많은 스승을 만났을 줄 안다. 초중고 12년 간의 학교생활에서 만난 스승만도 수 백 명은 되겠지? 게다가 학원이나 과외 등을 통해 만난 스승들도 꽤 있을 거야. 공부에 흥미를 잃었던 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난 수학과외 선생님 덕에 수학을 좋아하게 돼서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된 것은 참으로 너에게는 행운이었지. 최근까지 배운 선생님에게 너는 좋은 감정을 가졌었지. 그런 것도 행복한 추억이 될 거야.
아빠도 많은 분들의 제자였고 또한 제자를 다수 가르친 스승이기도 하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고 스승이 된 초기에는 제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워 고민을 많이 했지. 하지만 점차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단다. 그래서 좀 더 좋은 스승이 되고자 애써왔지만 그다지 성공한 것 같지는 않구나.
얼마 전 아빠의 제자 한 명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사과정의 졸업공연을 했기에 보러 갔단다. 그런데 그만 앞의 일정이 늦어져서 공연이 끝나고야 도착하고 말았단다. 너무 아쉬웠지만 그래도 제자의 얼굴을 보고 오랜만에 만난 정을 나눈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지. 공연은 나중에 보내준 DVD로 보았단다. 대학졸업공연은 여럿이 함께 하였는데 이번 공연은 단독공연이였기에 예술가로서 자립하게 된 모습이 확실히 나타나서 그저 대견하기만 했지.
아빠는 그 제자와 13년 전에 처음 만났단다. 모 학습지 회사 교사였던 아빠는 그 제자에게 영어와 국어를 가르치게 되었지. 학교가 끝나면 저녁 늦게까지 연습을 하고 돌아온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치기는 쉽지 않았지만 본인도 열심히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즐겁고 보람있는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단다. 그렇게 1년 2개월을 함께 하였지.
그리고 나서 11년이 지났단다. 중학생이던 제자는 이제 어엿한 대학원생이 되어 예술가로서의 꿈을 실현해가고 있지. 그 동안 주고받은 편지가 지금도 소중하게 서로의 책상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어. 힘들 때 읽어 보면 힘이 된다는 말에 아빠도 무척 기뻤단다. 물론 나도 그 제자의 편지를 읽는 것이 힘이 되곤 하였지. 바라건데 하늘이 아빠를 부를 때까지 좋은 인연을 이어갔으면 해.
그 제자 말고도 편지를 아빠에게 준 제자들은 꽤 있지. 박스로 하나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있는데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지. 보통은 새것이 가치가 더 큰데 쓴 것이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있지. 그중에 하나가 편지지란다. 새 편지지 보다 누군가가 정성어린 내용을 담아 보낸 ‘중고’편지지는 새 편지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어치가 있지.
아빠가 스승으로서 가장 기쁜 순간은 무엇인지 아니? 바로 아이가 변화했을 때란다. 좌절감과 무기력감에 빠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뭔가 할 수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는 순간 바로 그것이지. 그로 인해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게 될지도 모른단다. 얼마나 기쁘고 감동적인 순간이겠니?
아빠는 여러 번 그런 순간을 맛 보았고 그 때마다 아빠가 택한 길에 대하여 감사했지. 알파벳 밖에 모른 던 아이가 아빠의 극성스러운 지도로 조금씩 변화되어 영어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선생님 저 90점 받았어요 ”라고 하는 그 아이의 들뜬 목소리에 눈물이 흘러 나왔단다. 기초가 없어 헤매던 아이가 영어에 눈을 떠서 영어는 물론 다른 과목까지 좋아져서 우등생이 된 것도 그렇고. 그런 행복한 추억이 쌓이고 쌓여 아빠의 인생은 좀 더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 되었지.
스승과 제자는 조금은 특이한 관계란다. 부모자식처럼 형제처럼 혈연으로 맺어진 것은 아니지. 친구처럼 정이 맺어준 관계도 아니란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대단한 관계가 아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신기하구나. 잘 맺어진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부모자식관계보다 더 강한 유대를 맺을 수도 있음을 역사는 그리고 아빠의 체험은 말해주고 있지. 아빠에게 제자들은 자식만큼이나 소중한 존재란다. 아들아 그렇다고 서운해 하지는 말기바래.
엘리야라는 사람을 혹시 아니? 엘리야는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란다. 선지자란 말 그대로 先 먼저 知 아는 者 사람이지. 하나님에게 계시를 받아 미래의 일을 예언하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바꾸도록 가르치는 사람이 바로 선지자란다. 엘리야는 그런 선지자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이지. 특히 기적을 많이 일으켰던 선지자였기에 더욱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지.
엘리야에게는 제자들이 많았단다. 그는 선지자를 양성하는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 같아. 지금으로 치면 신학교겠지. 그 학교의 학생 중에 엘리사 라는 사람이 있었지. 엘리사는 엘리야의 가장 뛰어난 제자였던 것 같아. 그래서 나중에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어 많은 활약을 하지. 기적도 스승 엘리야 보다 더 많이 일으켰고.
엘리사는 엘리야가 하늘 나라로 올라 가려고 할 때 그랬지. “나에게 영력을 7배나 더 하여 주소서” 라고. 엘리야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살아서 하늘에 올라간 세 명 중의 하나이지. 에녹이라는 사람 그리고 예수 나머지 한명이 엘리야 였지. 엘리야가 승천하려고 할 때 엘리사가 그렇게 간절히 원했고 그 소원은 결국 이루어졌어. 엘리사는 뛰어난 영력으로 당시 우상숭배로 어지러웠던 북 이스라엘 (남쪽엔 유다왕국이 있었지. 지금 우리나라처럼 남북으로 분열 된 시대였지)의 사람들을 바르게 이끌었단다.
엘리사와 엘리야의 만남은 정말 멋진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지. 엘리야는 엘리사라는 훌륭한 제자를 두었기에 안심하고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을까? 엘리사 역시 엘리야를 만났기에 훌륭한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활약할 수 있었지. 그들의 관계가 부모 자식관계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을 거야. 아니 그 이상일 수 있지. 일생을 책임진 관계니까.
성경에 나오는 스승과 제자관계 중 최고는 뭘까? 바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아닐까 싶다. 아빠는 어렸을 때 성경을 읽다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어. 베드로라는 제자가 바다에서 (엄밀히 말하면 갈릴리 호수) 고기를 잡다가 예수가 와서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아 주겠다”고 하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갔다는 이야기지. 아니 뭘 믿고 그래 따라가지? 어린 아빠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 같았단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가 가는 구나.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 갔을 무렵 예수는 이미 상당한 유명인사였지. 그래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지금으로 치면 부흥회를 하고 있었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고 있었단다. 아마 그런 것을 통해 약간의 수입도 얻고 있었을 거야. 지금으로 치면 강사비라고 할까?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밤새 허탕을 친 다음 날 오전에도 예수는 갈릴리 호수근처에서 부흥회를 하려고 했단다. 그런데 군중이 너무 많이 몰려 설교를 할 곳이 마땅치 않았고 그래서 베드로의 배를 임대(?)하자고 했고 베드로는 쾌히 응했지. 그가 배에서 그물을 수리하는 동안 예수는 열정적인 설교를 하고 있었겠지. 물론 그도 귀가 들리니 전부 들었을 것이고. 아마 마음 속으로 놀랐을 거야 예수의 가르침에.
부흥회가 끝나고 예수가 뜬금없이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라” 고 제안했단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그렇게 말씀 하시니 한 번 해보죠” 라고 하며 그 말을 따랐단다. 전문어부인 그가 목수출신 예수의 말을 듣다니 놀랍지 않니?
하지만 놀랍게도 고기는 엄청나게 잡혔단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이 말이야. 베드로는 그만 놀라서 반쯤 얼이 빠졌을 거야. 그리고 예수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겠지? 아까 들은 말씀으로도 충분히 그런데 이런 기적까지 일으키시다니 라고. 친구들에게 도움까지 받으며 고기를 내린 베드로는 뜻 밖 의 선언을 하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곳을 떠나 주시기 바랍니다. ” 하며 무릎을 꿇었어. 그가 너무 놀라서 그렇게 말했을 거야. 이런 훌륭한 분을 자신은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그는 늘 마음 속으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있었을 것 같아. 그런 그이기에 그런 고백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베드로는 어부 중에서도 배를 소유한 자그마한 사업주였지. 아마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었을 거야. 조금은 여유있는 삶을 살았을 것 같구나. 그런 그에게 마음 속 에 느껴지는 공허감은 컸을 것 같아. “내 인생 이대로 좋은가? 먹고 마시고 그런 것으로 내 인생은 끝나는가?” 그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이 있었을 거야.
그런 그에게 예수가 나타난 거지. 그러니 그의 오랫동안 간직했던 갈급함이 그런 고백을 하게 하지 않았을까? 세리와 창녀가 한 것처럼 그는 헛되게 살아온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 회개를 한 거야. “당신 앞에서 무엇을 더 숨기겠습니까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을 모실 자격이 없으니 떠나 주세요” 라 고.
그것으로 그는 예수의 제자가 될 자격을 보여준 거야. 진실한 회개 그것이 예수의 제자가 될 자격이었어. 컵이 비워져 있지 않으면 새로운 물을 채울 수가 없잖니? 위선과 허위로 가득차 있던 종교지도자들은 그래서 예수를 배척한 거지. 자신들의 더러운 삶이 그에 의해 심판 될 것이 두려워서. 세리와 창녀들은 새로운 물 즉 새로운 가르침을 위해 자신들의 컵을 깨긋이 비웠지만( 회개했지만)
아들아! 훌륭한 스승을 만나고 싶니? 그럼 너 자신을 비워라. 컵이 비워지지 않으면 새로운 물을 부을 수가 없단다. 아빠는 여러 명의 제자를 두었지만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제자는 그런 제자란다. 자신을 비우고 가르침을 기다리는 제자. 똑똑한 제자보다 그런 제자가 훨씬 사랑스럽구나. 쥐꼬리만한 지식과 어줍잖은 총명을 무기로 스승과 맞짱 뜨겠다고 하는 제자 스승을 우습게 여기는 제자는 가르칠 가치가 없어 보이는 구나.
그렇게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그의 삶은 평범한 어부의 그것에서 세계 종교사에 길이 빛나는 위대한 인물의 삶으로 바뀌었단다. 공자가 한 말이라고 기억하는데 인생의 가장 큰 행복 중에 하나가 뛰어난 제자를 만나는 것이라고. 안회라는 뛰어난 제자가 죽었을 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구나” 라 고 통곡을 하였단다. 그만큼 자기의 뜻을 이어줄 제자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
예수가 뛰어난 인물임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아빠에게는 메시아 즉 구세주이니) 그의 제자들 역시 예수의 뜻을 이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머리도 아니고 힘도 아니고 모든 것을 사명을 위해 바칠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버려야 했지.
예수의 제자 중에 가장 극적으로 제자가 된 사람이 바울이었어. 바울은 원래 예수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다녔지. 그런 그가 예수의 제자가 되다니 놀랍지 않니? 원래 미움과 사랑은 하나라고 했던가?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지. 격렬하게 미워하는 것은 그에 대한 사랑을 숨기고 있는 지 몰라.
바울이 예수의 무리를 싫어하고 박해한 것은 그의 유대교에 대한 투철한 믿음 때문이지. 그는 고백했어. “나는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던 사람이다. ”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유대민족을 이민족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서 완벽하게 지키겠다는 것은 물론 아니야.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자신들도 알아. 하지만 최소한 성의라도 제대로 보이면 하나님이 그걸 보아서 구세주를 통해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었지.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그게 아니었단다. 하나님의 구원약속은 기껏해야 유대민족을 정치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죄의 속박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이었지. 그 방법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을 속죄제물인 구세주를 보내어 그의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용서받게 하는 것이지. 그것은 이미 구약성경 곳곳에서 예언 되었지만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눈이 가려지고 귀가 어둡기에 ”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거야. 바울도 마찬가지고.
그런 그가 예수의 무리를 미워한 것은 당연하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에게 율법으로가 아니라 자신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니겠어? 감히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다니. 불경도 이런 불경이 어디 있어? 유대민족의 구원을 방해하는 저 사악한 무리를 제거하라 고 바울은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그는 그것을 위해 다메섹이라는 곳을 향해 가던 도중 예수의 목소리를 들었단다. “사울아 사울아(사울은 바울의 히브리어발음이란다. 교회서는 사울이 회개하여 바울이 되었다는 잘못된 이야기를 하지)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시니까” “ 나는 네가 그토록 핍박하던 예수니라” 그걸로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단다. 예수의 핍박자에서 전도자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던 거야.
바울은 기독교 역사에서 베드로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란다. 혹자는 바울을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할 정도니 말이야.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나팔이 아무리 좋은 소리를 내도 훌륭한 나팔수가 없으면 그냥 쇠 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하지만 그가 신약성경 27권 중 13권을 집필하고 서방세계 곳곳에 교회를 세운 것을 생각하면 인간으로서 가장 큰 일을 한 인물이라 하겠지.
그 모든 것이 스승 예수로 인해 가능했단다. 반대로 예수 없는 바울은 그냥 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유대교 랍비로 끝났을 사람이지. 그 역시 진리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었던 점은 베드로와 마찬가지란다. 다만 그가 보다 학문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기에 성경의 집필자로서 복음전파자로서 보다 큰 일을 한 것이지. 예수의 제자 중에 몇 안 되는 지식인이었지. 바울은.
아빠 역시 예수의 충실한 제자가 되고 싶구나. 그래서 성경을 읽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한단다. 예수만한 스승은 아빠의 일생에 없을 것이다. 그런 예수를 만나 것을 늘 감사하며 살고 있지. 예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을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싶구나.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까.
아빠에게는 예수 다음으로 영향을 준 스승이 있어. 아빠가 일본에서 유학할 때 다니던 일본인 교회의 목사님이었던 아사야마 마사하루목사님이지. 아빠는 일본에 가기 전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리 깊은 믿음을 갖지 못했지. 아빠가 대학을 다니고 이성을 배우고 나서 믿음이라는 것이 바보같이 여겨졌단다. 그래서 신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었지.
그러다 일본유학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아사야마 목사님과 만나게 되었단다. 그의 설교 가르침은 이성이 결코 믿음과 모순이 아님을 깨우쳐 주었단다.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모방할 생각은 없지만 그런 깨달음은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지. 아빠가 완전한 신앙인이 된 것은 다른 여러 가지 계기가 필요했지만 아사야마목사님은 나를 예수에게 안내 해준 좋은 스승이었단다. 그가 없었다면 아빠는 영원히 예수의 제자가 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야.
아사야마목사는 성경을 다시 읽고 깨닫게 하여 주었단다. 상식과 맹목으로 가득 찬 한국교회의 목사들의 가르침과 달리 깨어서 생각하며 성경을 읽도록 늘 격려 해 주셨단다. 내가 늘 남과 다른 성경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에 대한 선입견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지. 그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 아사야마 목사님이란다.
아빠는 그 후로 그런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지. 목사는 많지만 스승은 없었단다. 이런 말은 좀 실례일지 모르나 먹고 살기 위해 목회를 하는 사람들만 만났던 것 같아. 진정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목사를 만나지 못했단다. 아빠의 잘못된 판단일지 모르지만.
하지만 이제 새로운 스승을 만난 것 같구나. 물론 세상에는 스승이 될 만 한 목사님이 많이 계시겠지만 직접 만난 분 중에는 없었거든. 그런데 이번에 만난 것 같구나. 그 분의 말씀을 자주 들을 수 있음을 감사드린다.
그 분은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님이란다. 목사님의 설교는 화려하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재미있지도 않아. 설교 잘하는 목사님들처럼 때론 웃기고 때론 감동적인 그런 멋진 설교는 아니야. 어찌 보면 모범생의 평범한 설교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의 설교를 감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삶이지. 그의 신앙관이고. 나는 그의 설교에서 예수의 마음을 읽는다. 예수의 가르침이 바르게 전파되고 있음을 읽는다. 아빠가 성경을 읽다가 ‘유레카’를 외치게 한 그 하나님의 음성을 그에게서 듣는다. 그래서 나는 그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단다.
그는 말씀을 실천하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고 있지. 위선과 거짓에 가득 찬 큰 아들이 아니라 탕자로서 살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과 같은 삶을 그는 살고 있어. 한 번도 방탕한 삶을 산 적이 없지만 그는 그럼에도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구나.
아들아! 선생도 많고 목사도 많지만 진정한 스승을 만나기는 쉽지 않단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기 위해서는 너에게 그런 것을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베드로도 바울도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았단다. 그래서 참 스승을 만났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제자가 될 수 있었지.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찾아온 부자가 있었지. 그는 율법을 잘 지키고 살아 왔단다. 그런 그가 에수를 찾아온 것은 제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입으로는 제자가 되고자 했지만 마음은 “나 잘 살고 있죠?” 라고 말하고 있었지. 그런 그에게 “모든 재산을 팔고 나를 따르라” 고 예수가 말했지. 그러자 그는 떠나 버렸지. 그에겐 간절함이 없었단다.
진정한 스승을 원하면 너의 삶 가운데에서 그 간절함을 간직하며 살아다오. 그것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아름다운 삶에 대한 간절함이다. 현재의 삶을 인정하고 성장을 바라지 않는 자에게 간절함은 기대할 수 없단다. 아들아! 몸의 비게덩어리를 제거하고 눈을 밝게 한 뒤 나침반을 들었으니 너를 이끌어 줄 인도자를 찾아야 하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