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만 걷게 해서 되겠습니까? 고난을 어른들의 탓으로 돌리는 젊은이들!
목 차
1. 이겨내라고 한 말이 문제가 되는 사회
2. 살아남아서 해야 할 일
3. 꽃길만 걷게 해서 되겠습니까?
4.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 권리만 달라는 젊은이들
5. 시련을 이길 힘을 길러주는 것이 바른 교육
1. 이겨내라고 한 말이 문제가 되는 사회
최근 연예인들이 악플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교수가 그것에 대하여 다소 비판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악플러들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었죠.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구의 내용처럼 그도 어려움을 이겨내고 좌절하지 말고 이겨내며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어왔고 또한 해 왔습니다. 오프라윈프라같은 인물은 그러한 이야기를 통해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강렬한 체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10대 시절 성폭행을 당했지만 이겨내고 성공의 길을 살아온 그녀는 고통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큰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은 반발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소개한 내용은 간략했기에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악플러를 옹호하고 있다는 식으로 교수에게 공격을 가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 번 읽어 봐도 그런 주장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런 악한 사람들 때문에 선량한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라는 교수의 주장은 분명히 악플러를 ‘악한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니 특별히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오프라윈프라는 나쁜 사람입니다. 성폭행을 당했음에도 살아서 성공을 했으니 성폭행범에게 면죄부를 준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에게 해롭게 하고자 한 사람들의 시도를 이기고 성공을 하면 해롭게 하고자 한 사람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집니까?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 악행을 한 사람들을 옹호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의 저자 오히라 미쓰요가 할복자살을 기도했다가 살아나 열심히 살아 변호사가 되어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녀를 괴롭힌 사람들을 빛내주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교수를 비난한 학생들의 주장대로면 오히라는 잘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지않고 살았으니. 그녀가 살아남았으니 괴롭힌 사람들의 죄가 그대로 덮어졌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죽은 연예인들은 “그러니까 당신도 죽어’라는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요? 노무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떨어진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까요? 그들의 죽음은 그것대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제 생각에는 우리 국민을 각성시킨 사건입니다. 경제 살리기에 모든 것을 걸고 이명박이라는 인물을 대통령의 자리에 앉였던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그것은 단순히 대통령 선거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정말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6년의 촛불혁명은 어쩌면 노무현의 죽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여전히 먹고 사는 것이 전부 인냥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먹고 살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말이죠.
2. 살아남아서 해야 할 일
하지만 모두가 죽음을 택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노무현의 죽음에 뜻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극단적 선택을 했다면 혁명은 누가 합니까? 그의 유지를 이어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를 바르게 하고자 노력하였기에 혁명은 일어났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처럼 여러 번의 살해시도를 넘어서 ‘인동초’처럼 살아남아 민주화를 이루는데 공로를 세우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인물도 있습니다.
링컨대통령은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살아남은 자의 사명을 강조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87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서 자유 속에 잉태되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봉헌된 한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켰습니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고 우리 선조들 이 세운 나라가, 아니 그렇게 잉태되고 그렇게 봉헌된 어떤 나라가, 과연 이 지상에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받고 있습니다.(중략)우리는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마지막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그 싸움터의 일부를 헌납하고자 여기 왔습니다. (중략) 그들이 싸워서 그토록 고결하게 전진시킨, 그러나 미완으로 남긴 일을 수행하는 데 헌납되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들 살아 있는 자들입니 다. 우리 앞에 남겨진 그 미완의 큰 과업을 다 하기 위해 지금 여기 이곳에 바쳐져야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중략)그들이 헛되이 죽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굳게 굳게 다짐합니다. 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며,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출처: https://aggazc.tistory.com/68 [J's Memory])
예전에 어떤 학생이 강의 시간에 교수의 강의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다 서로 다툰 일이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자 교수는 학생에게 앙심을 품고 그의 성적을 F처리해 버렸습니다. 지금같으면 문제가 될 일인데 옛날이라 그게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 학생은 재수강을 했지만 교수는 시험결과에 관계없이 그를 낙제처리 했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긴 학과 조교가 몰래 성적을 정정해 처리하려다가 발각나 그마저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강의가 전공필수과목인데 담당자가 그 교수 한 명 뿐이기에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교수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으니 교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학생은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의 졸업장을 눈앞에 두고 좌절하여 생을 스스로 마감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분노했습니다. 그 교수에게 분노하기도 했지만 그 학생에게도 분노했습니다. 더욱 나를 분노하게 한 것은 그의 자살 소식에 교수는 “아 그래?” 한 마디 말 만 했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무엇을 했던 것일까요? 지금 같으면 당장 시위가 벌어졌을 법한 일인데 그것으로 끝난 것일까요? 자신의 취업길도 막힐까 봐 명색히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생들이 입을 다물었던 것일까요?
제가 그에게 분노한 것은 왜 문제해결을 위해 보다 철저한 투쟁을 하지 않았는가입니다. 아무리 민주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시절(1980년대)이라지만 방법이 정말 없었을까요? 소송을 걸거나 학생회를 찾아가 하소연을 해보거나(이 학교 학생회는 과격함으로 유명하죠)매스컴에게 제보를 해서 사회적 문제로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심지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이지만 그 교수를 살해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불가능했을까? 생을 스스로 마감할 용기와 결의가 있다면 왜 못 하겠습니까? 가끔 괴롭힘을 당하다가 자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 같으면 그 인간 죽이고 죽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악마일까요?
결국 그런 식의 죽음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가해자들을 용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용서라는 말은 어폐가 있지만 최소한 그들은 평안하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노무현의 죽음과는 의미가 다르죠. 무엇이 최선의 길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당신도 죽어’라는 말은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살아서 싸워라” “살아서 이겨내라” 이런 것이 가장 모범적인 정답은 아닐까요?
그런데 왜 젊은이들은 연예인의 죽음을 지지하고 있을까요? 왜 그것을 이기라는 말에 저항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이 대의명분을 위해 스스로 그 길을 택한 것도 아니고(매천 황현이나 민영환처럼. 설령 그들이라도 권할 생각은 안 나네요)말이죠. 어려움을 이겨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가 마치 악을 용인하는 말로 여겨지는 이유는 뭘까요?
3. 꽃길만 걷게 해서 되겠습니까?
교육일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의 눈에 보면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을 과보호하다 못해 아예 끼고 사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다녀야 할 학원을 부모가 다 세팅하는 것은 기본이고(나도 이런 부모 밑에서 공부했다면 더 좋은 대학 갔을까요? 어쨌든 부럽습니다. 내겐 그것이 얼마나 큰 고민이었는데) 봐야 할 참고서 문제집도 지정해 주고 대학선택도 교육컨설팅에게 맡겨 본인은 그냥 찍기만 하면 될 정도입니다. 대학 가면 수강신청 대행도 하고 학교문제 상담하러 교수 찾아가고. 심지어 회사 입사해도 상사를 찾아가 상담을 한답니다. 군대 가면 근처에 방얻어 상주하며 뒷바라지하고.
한마디로 귀찮고 가장 고민해야 할 문제를 정리해주는 역할을 부모가 다 합니다. 부모들이 하는 말 중에 정말 귀에 거슬리는 것이 있습니다. “아들아(딸아) 부디 꽃길만 걸어다오”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지 않습니까? 어려서부터 아이에게 세상의 바람을 맞지 않게 하려고 풀서비스로 봉사하는 부모입장에서 그들이 손길이 미치기 어려운 사회생활이 줄 수 있는 아픔을 걱정한 나머지 하는 소리일 것입니다.
‘꽃길만 걷는 인생’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재벌 아들이라면 모를까(이재용의 삶을 보면 재벌의 아들도 꽃길만 걷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혼에 투옥에 재판)보통사람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사회에 나간다면 온갖 비바람에 시달려야 할 운명이지요. 아니 대학만 가도 부모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한정적입니다. 대학을 위한 내신학원도 과외이 없으니까요. (혹시 있을지 모릅니다. 과제나 시험 도와주는. 자소서도 대신 써주는데 없을까요. 단 비용이 엄청나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이겠지요.)
차라리 이렇게 말한다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우리 아들(딸)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잘 성장해서 훌륭한 사회인이 되길 바래”라고. 물론 부모로서 자녀의 어려움이 안타까운 것은 저도 부모로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자식을 대신해서 그런 어려움을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길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꽃길만 걷도록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식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과보호속에 자란 젊은이들에게 고난을 이겨낼 힘이 부족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지켜줄 엄마 아빠는 모든 것을 정리해 줄 수 없습니다. ‘헬조선’ ‘삼포’ 이런 식의 자조는 현실의 암울함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이것을 이겨낼 힘이 없기에 하는 탄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결국 세상을 향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소리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넘어졌을 때 “엄마! 하며 우는 것처럼. 물론 그들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또 그냥 세상에 적응하고 말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적응에 몰두하는 청년들도 많습니다. 그들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포기하는 점에서는. 이래저래 그들은 좌절감에 빠지고 마는 것이죠.
국회의원이 대부분 기성세대라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언 듯 그럴 듯 해보이는 의견입니다. 실제로 국회의원 중 20대는 없고 30대도 손에 꼽힐 정도이고 40대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젊은이들의 의견이 반영되기 어려운 것 같이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어린이는 국회의원이 되지 못하니 보호받지 못합니까? 노인도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국회의원은 상대적으로 많지만 그렇다고 여성이 무시된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국회의원을 배출해야 이익이나 권리가 지켜진다면 어린이 청소년 장애인은 어떻게 될까요? 문제는 자신들의 의사를 얼마나 열심히 제시하고 이를 국정에 반영하게 하는 가입니다.
4.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 권리만 달라는 젊은이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젊은이들은 얼마나 적극적일까요? 까놓고 이야기해서 투표율도 2030이 가장 낮지 않습니까? 2018년 지방선거의 경우 70대가 74.5% 60대가 72.5% 50대가 63.3%로 비교적 높았지만 나머지 연령대는 전체 투표율 60%를 밑돌았습니다. 40대가 58.6%, 30대가 54.3% 20대가 52% 19세가 54.5%입니다. 특히 20대는 19세보다도 투표율이 낮아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간접적으로 잘 보여주었습니다. 사전투표라는 방식으로 날짜를 분산시켜 주었음에도 여전히 이렇게 낮은 투표율을 보여준다는 것은 사회변화에 대한 의지가 약함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일본의 경우에 젊은이들의 낮은 투표율이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017년 중의원선거에서 연령별 투표율은 18~19세 40.49% 20대 33.85% 30대 44.75% 40대 53.52% 50대 63.32% 60대 72.04% 70대 이상 60.94%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심한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고령화가 심해져 많은 예산이 고령자에게 쏠려 젊은 세대가 큰 피해를 보고 있다는 주장이 줄기차게 제기되어도 투표율은 별로 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더 호갱이(?)취급을 받죠..저 같아도 이렇게 투표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세우지는 않을 겁니다. 그나마 취업률이 높아지고 정규직 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의 임금격차가 우리보다 훨씬 나으니까 버틸 수 있지만 이대로 가면 일본 젊은이들의 미래는 어두울 것 같습니다.
요즘 미래통합당의 김종인씨가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과거 김영삼 김대중 같은 검루 정치인들이 아직 40대이던 시절 그들은 40대 기수론을 들고나와 정치판에 세대교체를 이루었습니다. 아마 그것을 재현하고자 하는 것 같은데 1970년대 생으로 경제에 밝은 대선후보를 내고 싶다고 그는 말합니다. 과연 가능할까요? 60대 50대가 주를 이루는 정계에서.
예전에 많은 정치가들이 20대에 정치판에 뛰어들었습니다. 국회의원의 비서가 전형적인 길이지만 지역에서의 활동을 기반으로 정치에 입문하기도 하였습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도 결과적으로는 정치에 입문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것을 노리고 운동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눈물 젖은 빵을 씹으며 밑바닥부터 위로 올라가 정치인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아는 정치가들 –김문수, 노회찬, 심상정, 이인영, 이해찬 등등-이 그런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투표율은 낮고 정치지망생도 별로 없습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은 더 이상 20대의 주요관심사가 아닙니다. 스팩쌓아 좋은 직장에 취업하여 인생을 즐기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물론 옛날이라고 모두가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소수가 그러한 운동을 할 때 다수가 이를 지지하고 도와주었습니다. 대학생들에게 정치는 필수교양이었고 투표는 의무였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정치란 투표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러면서 국회의원 자리만 달라고 그럽니다. “엄마 아빠가 다 해 줄거니까 넌 공부만 해” 라는 식으로 키워졌으니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노력은 없고 결과만 바랍니다. 그렇게 억지를 부리면 어른들이 기성세대가 돗자리나 레드카펫을 깔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긴 그렇게 대접받았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김영삼 김대중 시절에도 그랬을까요? 그들은 40대 기수론을 제기하고 꽃길을 걸었을까요? ‘구상유취론(口尙乳臭論)이라는 말이 기존의 지도자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입에서 젖비린내 난다는 말로 이는 젊은 그들을 비아냥대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소신을 관철시켰습니다. 김김영삼은 물론 김대중도 다선의 의원으로서 당내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이런 대접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이겨냈느냐입니다.
젊은 세대를 비례대표로 또는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구에 배정하여 당선시키면 젊은이들의 문제가 해결될까요? 표창원이라는 초선의원이 있습니다. 그는 경찰대 교수였고 꽤나 유명한 프로파일러입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가 재선을 포기하고 국회를 떠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정치판이 얼마나 험한 곳인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젊고 경험도 별로 없는데다가 정치적 경험도 없는 인물들을 편하게 국회에 입성시킨다면 표창원의원보다 더 낫게 국회활동을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국회가 젊은이의 권익을 좀 더 보호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요?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준석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미래통합당 최고위원이지만 이제 나이는 30대입니다. 그가 미래통합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에 들어온 것은 박근혜의 영입인사 때문입니다. 그때는 20대였죠. 하지만 그는 자신의 힘으로 최고위원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번 선거에서도 지역구에 나가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그가 나간 지역구인 노원병은 17대에서 21대까지의 국회의원선거에서 18대를 제외하고는 보수가 승리한 적이 없는 험지입니다. 18대의 경우조차 당시 보수당인 한나라당을 비롯하여 보수세력이 210석을 석권한 때이며 진보신당의 거물 노회찬의원과 민주당 후보의 분열로 표가 분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홍정욱 후보의 득표율은 겨우 2위인 노회찬 후보보다 2%남짓 앞서는 박빙의 승부였습니다. 만일 후보 단일화를 했다면 보수진영은 이명박 당선으로 보수열풍이 불던 시대임에도 아마 패배했을 것입니다. 그런 험지에 그를 보낸 것은 그를 국회에 보낼 의지가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중진의원 중에도 초선이 비례인 인물이 적지 않은 가운데에서.
결국 그는 국회입성에 성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여러모로 국회의원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왜 원외에 머물고 정치라고는 1도 모르는 이들이 쉽게 국회의원배지를 달아야 합니까?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요? 선거 때만 되면 듣보잡같은 인물들이 영입되어 배지를 달고 착실히 정치수업을 해온 젊은이들이 소외되는 일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과연 이런 구조에서 과연 젊은이들의 권리가 얼마나 지켜질지 의문입니다.
5. 시련을 이길 힘을 길러주는 것이 바른 교육
저의 큰 딸이 고등학생일 때였습니다. 나는 딸에게 알바를 권했고 실제로 그는 일을 했습니다. 방학을 이용해서. 딸이 일하던 곳에 일부러 가서 저는 그 아이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알바하는 곳의 관리책임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고등학생이면 알바하겠다고 해도 부모가 말리시는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아이에게 알바를 하도록 하는 부모님은 처음입니다”라고. 제가 생각해도 별난 아비였습니다. 아이가 좀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기를 원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효과를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도 일부러 먼 곳에 있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기숙사생활이 불가피한. 아이가 자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확실히 효과를 보았습니다. 기숙사생활로 아이가 몰라보게 바뀌어갔습니다. 자기일은 자기가 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그런지 유학생활도 잘하고 결국 그나라에서 취업까지 해서 국제결혼도 했습니다. 저는 결혼식에서 아이가 자립정신을 가지고 해외생활을 잘 해 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자식 삼남매(딸 둘 아들 하나)가 부디 고난을 이겨내고 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해 주기를 바란다고. 물론 너무 큰 고난은 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저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은 고난이 아이들을 단단하게 하여 보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물론 꽃길만 걷기 바라는 마음은 1도 없습니다. 제가 나쁜 아버지일까요?
아직도 꽃길만 걷기를 바라십니까? 그 꽃길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요? 죽을 때까지? 그러면 그 아이가 정말 행복할까요? 마치 로또복권맞은 것처럼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면 좋은 것일까요? 모르겠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으니까요.
분명한 것은 인생은 고해이고 부모는 자식의 삶을 대신하지도 못하고 또 언젠가 자식 곁을 먼저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식이 눈에 밟혀 눈을 못 감게 된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하지만 자식이 훌륭하게 자라 아무런 걱정없이 눈을 감을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요? 자식에게도 본인에게도. 그런데 우리는 왜 아이들을 부모에게 의존하도록 하여 평생을 돌보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어쩌면 자신의 욕심 때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자식보다 자신의 만족을 위한.
이 사회가 그렇게 변해야 할 것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요구대로 들어주어 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어지지 않도록 기성세대들이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가정에서 자녀양육에 학교에서 학생의 교육에 이러한 정신이 확실히 자리잡아야 할 것입니다. 문제를 모두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가르친다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소중한 상식이 확립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선배교수의 부탁으로 어느 대학에 강의를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곳 학생들의 태도는 지극히 실망스러웠습니다. 레포트를 내는데 스테이플러를 하지 않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신입생도 아니고 4학년이 그렇습니다. 더구나 군대생활도 마쳤는데. 레포트 내용도 적합하지 않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자 왜 그런 이야기를 지금 하냐고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이야기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한 것을 알자 몸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랐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저의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성적을 잘 주었으면 하는 부탁을 하더군요. 사상 초유입니다. 저는 선배나 지인의 부탁으로 강의를 한 적이 여러 번 있지만 일부로 그들이 전화로 성적을 부탁하는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정말이지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학교가 복마전인 것 같더군요. 학생은 엉망 교수는 한심 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곳을 떠날 때 생각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 학과는 소수정예(?)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장학금과 기숙사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입학한 학생들이라 입학성적도 제법 좋았습니다. 그런데 교수들은 학생들을 엄격하게 가르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의 취업을 위해 언갖 편의를 봐주어 왔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당연할 조차 제대로 모르고 학년만 높아진 것이죠. 그들이 과연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지 의문입니다.
현재 우리의 대학이 이런 모습은 아닐까요? 솔직히 저도 그런 점에서 책임이 없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성적을 잘 주려고 여러 가지 편법을 쓴 것도 사실입니다. 대학이 학생들을 이렇게 꽃길만 걷도록 하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될지 이번 사태(?)를 통해 절감했습니다. 대학만이 아니라 사회전체가 이런 문제를 보다 심각히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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