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왜 싸우고 있을까? (2)내부 지향적 자세
필자의 모교인 일본 히도쓰바시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후배가 한 말이다. 그는 외교관인 부모님 덕에(?) 여러 나라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었다. 영국에서도 거주해 보았다고 하기에 일본과의 차이를 물어보았을 때 들었던 답이다. “영국사람들은 도와 달라고 하기 전에는 절대 도와주지 않지만 일단 도와 달라고 하면 너무나도 친절합니다. 일본사람들은 말하기도 전에 뭐 필요한 거 없냐고 접근하고요.”
이것은 일본인 학자에 의해서도 확인된 사실이다. 심지어 미국하고도 그런 점에서 영국은 다르다. 영국에서 사는 일본인 학자가 미국에서 잠시 거주하던 때의 경험담이다. 자신은 걸으면서 생각을 하는 것이 좋아 학교까지 걸어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지나가는 자동차가 자신에게 같이 먼저 타겠느냐고 물어보는 경우는 없는데 미국에서는 귀찮을 정도로 여러 사람들이 물어 오더라는 것이다. 미국이 영국보다 자동차 사회이니 걸어가는 사람을 태우는 문화가 발달해서인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들도 일본인 같은 면이 있는 것 같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가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단서는 있다. 영국 하면 생각나는 말 중에 대표적인 것이 무얼까? 많지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것이 아닐까?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식민지를 개척하여 미국 호주 남아공 같은 나라를 세운 영국인들의 발자취는 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 미국이 오늘날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도 영국이 뿌려놓은 씨앗이 없었다면 이 정도까지는 커질 수 없었을 것이다. 영어를 세계 공용어처럼 쓰는 것은 미국 혼자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마치 중국이 아무리 커져도 중국어가 공용어가 될 가능성이 작은 것처럼.
영국인들은 지리상의 발견과 함께 세계를 향해 길을 떠나갔다. 그것은 같은 섬나라이면서 역사의 대부분을 자신들의 섬에서 보낸 일본과 다르며 거대한 대륙에 갇혀 살아온 미국과도 다르다. 물론 오늘날의 미국은 과거와 다르지만 근본적인 기질은 남아 있다. 미국인과 일본인의 공통점 중 하나가 외국어를 잘 못 한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영국인들은 외국어를 잘 한다. 왜냐고? 밖으로 관심이 펼쳐지는 나라와 관심이 주로 내부로 향하는 나라 사람들의 차이이다. 일본인들이 영어를 못하는 것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영어를 못 해도 지장이 없어서이고 미국인들이 프랑스어를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영국인에게 외국어는 더 필요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영어가 지배하는 세계가 실현된 것은 생각보다 길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미국과 영국이 아웅다웅하면서도 사이가 좋은 이유가 따로 있는 것 같다. 닮아서.
이러한 차이가 오늘날까지 그들 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밖으로 떠돌며 세계를 바라보며 사는 영국인들은 오지랖을 부리기를 꺼려한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넘어가기 쉬운 것이다. 그러니 영국사의 내전의 역사는 짧았고 지금도 서로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다. 일본은 달리 내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서로를 향해 공격을 가해 왔다. 그런 까닭에 자기편을 감싸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져 곁에 사람에게 오지랖을 부리는 것이다. 그렇게 친해져야 단결심을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가족의 경우 서로에게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한데 그것은 서울에서 토박이로 살아왔기에 굳이 가족이 아니라도 밖에 얼마든지 친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외가의 경우 월남 가족이라 그런지 밖에 사람보다 가족이나 형제를 챙기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이와 비슷한 원리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쪽일까? 우리는 일본보다 더 내부로 향해 살아온 민족이다. 그 옛날 고구려가 만주벌판을 지배하며 중원의 대국들과 맞짱을 뜰 때는 우리는 영국처럼 외부로 향하던 민족이었다. 고구려가 최약소국인 신라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은 밖으로 눈이 향하는 바람에 안에 있는 적에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영역이 한반도로 축소되어 버리고서 우리는 폐쇄적인 상태에 놓여 서로를 향해 공격을 하는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 절정이 바로 당쟁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일본이 쇄국상태를 벗고 세계로 뻗어나가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가 되어 내부지향성을 상당히 고쳐 그나마 덜 폐쇄적인 나라가 된 것과 대조적이라 하겠다. 일본이 과연 다양성의 나라인가는 의문이지만 우리보다는 훨씬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고 이는 이런 역사적 차이 때문이다.
우리의 내부지향성과 폐쇄성이 다소나마 해소된 것이 박정희 시대이다. 박정희는 한반도에서 잠자고 있던 우리 민족의 눈을 밖으로 향하게 되었다. ‘수출입국’은 그것을 상징한다. 우리는 국내에서도 경쟁을 했지만 세계시장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우리끼리 단결하며 나아갔다. 대고구려 시대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변화는 우리를 세계 속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시켰다. 영국이 이룬 성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밖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 발전의 길임을 보여주었다. 내부로 노사분규 민주화운동으로 갈등이 없지는 않았으나 오늘날에 비할 바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더 이상 우리의 눈은 밖으로 향하지 않게 되었다. 이민자나 해외이주자의 수는 줄어가고 있고(여행은 늘어나고 있다)유학생도 단기연수생만 빼고 줄어들고 있다. 심지어 대학의 교환유학생은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기피되어지고 있으며 외국어도 영어만 빼고는 중시되지 않고 있다. 한때 열광적으로 학습되던 영어와 중국어도 상대적으로 사그러진 느낌이다. 뉴스위크나 타임을 원서로 읽던 열기도 사라지고 영어는 보다 넓은 정보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스팩쌓기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 같다. 해외문화를 배우려는 자세보다 우리의 장점을 자랑하고 다른 문화를 배척하려는 풍토마저 느껴진다. 한류열풍이 불어 우리 문화가 수출되는 것이야 환영할 일이지만 팝송 외국영화나 드라마 등이 사라져가고 천박한 막장 드라마가 자리를 대신하는 것에 위기감마저 느낀다. 동종교배가 되어 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내부지향화 현상은 우리의 사고를 편협하게 왜곡시킨다. 1990년대 세계화 열풍과 함께 불어온 자유롭고 다양한 문화에 대한 열망은 약화되고 편협하고 획일한 사고에 의한 검열과 견제로 오히려 다양성은 위축되어 편협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토론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아 모두가 조심을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자연히 시비를 가리는 공격만이 난무해지고 마녀사냥이 전개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서로에게 총질을 하게 된 것은 바로 밖을 바라보지 못하고 서로만 향하게 된 내부지향의 결과인 것이다.
최백호 김자옥 커플은 모두의 관심으로 맺어졌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거의 24시간 같이 다니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부부건 연인이건 친구건 늘 함께 있으면 고마운 줄 모른다. 여행을 가면 절친이라도 싸우게 된다. 함께 있으니 갈등을 겪을 이유도 많아지는데다가 서로의 고마움을 잊기 때문이다. 매일 먹는 진수성찬은 더 이상 진수성찬이 아닌 것처럼. 해외에 나가면 느끼는 조국과 동포의 고마움도 돌아오면 잊게 마련이다.
김우중 회장이 외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구호는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는 좁은 한반도에서 서로를 공격하기보다 드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갈 필요가 있다. 김우중 회장이 베트남 등 동남아 4개국에 젊은이들을 위한 현지취업교육기관(GYBM)을 세운 것처럼 해외로 나아갈 길을 터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영업자 명퇴자 경력단절여성 등이 해외로 나간다면 우리의 근면함이 합하여져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과밀해진 국내시장을 뒤로 하고 많은 코리안들이 다시 한 번 세계로 몰려간다면(어게인1977타임지)국내에서 치고받고 해야 하는 불행은 상당히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좁고 할 일도 없다’ 라는 책을 써야 할 것 같다. 날씨가 춥다고 따듯한 아랫묵에 모여 서로 자리싸움만 해서는 미래가 없다. 너도 나도 나가서 일을 해서 집을 넓혀야 자리 싸움을 하지 않게 될 것이 아닌가? 새로운 중동이 서독이 그리고 미국이 필요하다. 카다피처럼 배포있는 지도자와 궁합이 맞으면 우리에게 새로운 경제영토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럼 밥그릇 싸움도 끝날 것이니 뭐가 답답해서 할 일도 없는 한국에서 ‘이곳이 좋사오니’라며 머물 것인가? 유럽여행을 가족과 다녀온 목사의 한마디 “당분간 가족과 떨어져 있고 싶다” 마치 오늘날 우리에게 하는 말 같다. 록 그룹 ‘시카고’의 ‘Everybody needs a little time away’ 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사회적 거리 두기’를 업그레이드해서 ‘민족적 거리 두기’로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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