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당신 이웃은 누구입니까? -인류공동체형성의 길

닥터 양 2020. 12. 31. 00:14

당신 이웃은 누구입니까? -인류공동체형성의 길

 

                   설교자 양의모

                   장소 쿠니타치 노조미교회

                   일시 1999321

          성경 본문 복음서 1025-7

  

1. 국가와 국민의 유래 - 인위적인 결과물         

 이렇게 아무런 자격도 없는 제가 이곳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엄청난 영광을 누리게 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0년에 걸친 일본에서의 삶을 마치고 귀국하는 하는 마당이기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가급적 오늘 안으로 끝내도록 하겠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인류공동체의 길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나의 경험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아마 작년 10월경이라고 기억합니다. 저는 내 인생에서 좀처럼 손에 넣을 수 없을 것 같은 신기하고 아주 재미있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 책은 바로 이것인데 제목은 상상의 공동체-내셔널리즘의 위험입니다. 저자는 Benedict Anderson이라는 미국인이고, 코넬 대학교수에요.

 이 책의 맨 처음 부분에는 이런 내용이 써 있습니다 국민은 이미지로 마음 속에 상상된 것이다. 국민들은 확실히 구분된 존재이며 주권자로 여겨지고 있다. 설령 현실에는 불평등하고 착취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국민은 늘 수평적인 깊은 애정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마음에 새기고 있다. 이 상상력의 산물 때문에 과거 2세기에 걸친 수백만의 사람들이 서로 죽이거나 스스로 죽어 간 것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국가라든지, 국민이라든지 이런 것으로부터 한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국민이나 국가처럼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을 추적함으로써 우리가 마치 그러한 것들이 현실 속에서 존재하여 왔고 그것에 의해 처음부터 자리매김되어 살아 온 것처럼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없다, 그것은 단순한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일 뿐, 그러한 것에 인간이 속박되어 버렸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발적으로 죽어 가게 되는 비극이 만들어졌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로서 그는 중남미의 독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남미 국가들의 국경선을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왜 이런 형태의 국경이 생겼을까요? 저자에 의하면 그것은 스페인의 식민지 시대의 행정 구역이 그대로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 행정구역이 국가가 되었는가 하면 이를 지배하는 행정관들은 그 행정구역 안에서 이동하면서 행정을 폂쳤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행정관들이 독립에 나선 이유가 출세의 범위가 그 구역 안에 한정된 것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지배계급의 출세욕에 의해 국가라는 것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국민에 대해서는 우리는 옛날부터 함께였기에 독립한다는 식의 민족의식을 일으켰으며 그것을 통해 불평등과 같은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은 과연 정말 하나인가요? 예를 들어, 한국의 대통령이었던 (당시)김대중씨의 일을 생각해 봅시다. 1980년 당시 사형 선고를 받고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는데, 그때 그를 구한 것은 사실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이나 미국 등에 있는 인권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국민은 하나라는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국민들은 모두가 하나가 아니라 각자의 입장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데도 국민 이름에 따라 하나로 묶음으로써 안에 있는 많은 문제를 감추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국가관을 강요당한 어린 시절

 그럼 제 경험을 좀 소개할게요. 한국이란 나라는 아시다시피 북한이라는 나라와 대립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 기회가 된다면 거기 가봤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은 북한의 군사적 침략에 골머리를 앓고 있으며 실제로 한국전쟁이라는 재난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존재를 봉쇄하는 것에 국가적 차원에서의 체제를 구축했던 것입니다.

 내가 1969년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있어서 그의 정책에 의해서 국가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머릿속에 주입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 시피 한국은 병역이 아직도 있어 원칙적으로는 18세 이상이 되자 남자는 모두 병역에 지게 되어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면 연기되지만 언젠가는 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나의 고등학교 때는 주 2회 군사 훈련을 남녀 불문하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병역이 끝나면 이번에는 예비군으로 들어가 35세까지 훈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그걸로 끝이 아니에요. 그 후에도 50세까지 일 년에 몇 번 소집되고 일정한 교육을 받는 민방위대에 편입됩니다.(이는 1999년 당시의 상황이고 지금은 달라졌다)초등 학교 때는 군사 훈련은 받지는 않지만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군사훈련을 받거나, 혹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자는 것을 머릿속에 주입시키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이야기도 가끔 인용됩니다. 그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확실히 나쁜 일입니다만, 그들은 미국군과 싸웠을 때, 천황 폐하 만세라고 외치며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조국을 위해 만세라고 하면서 죽어가고자 하는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그로인해 저는 일본인이라고 하면 천황 폐하 만세라고 외치며 죽어 가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올 때는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와서 다시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소위 군국소년소녀라는 말이 있어서 우리는 몰랐지만, 확실히 군국소년소녀로서 자라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과의 군사적 문제 외에도 경제발전이라는 또 다른 문제도 있었습니다. 경제발전을 위해, 예를 들어 외국의 것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든지, 혹은 예금을 열심히 해 경제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식의 교육이 이루지고 있습니다. 1930년대 일본에서는 이른바 농촌 갱생 운동이라는 것이 전개되는데 한국에서는 그것을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재현되었습니다.훗날의 분석으로 두개가 거의 같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저는 일본에 올 때까지의 인생을 보냈어요.

3. 일본에서 느낀 충격 국가관의 차이로 인한 동요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역사가 전공이었던 저는 대학 3학년 일본역사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역사 수업에서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인이라는 것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천황 폐하 만세라고 해서 죽어가는, 혹은 옛날 토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사무라이의 모습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역사를 공부하고 나니까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이 보여지더군요. 그것으로 인해 훌륭한 문화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왜 이런 걸 우리에게 가르치지 않았을까 하는 분노도 느꼈습니다.

 국가와 국민을 단결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외부의 적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국에 있어서 그것은 하나는 북한, 다른 하나는 일본이었겠지요. 즉 북한과 일본을 적대시함으로써 국민의 단합을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예전에 외치던 귀축영미(鬼畜英美-귀신이나 짐승 같은 영국과 미국)라고 하는 것도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일본을 악인으로 만든 우리에게 일본에 대한 인식이란 이미 말씀드린 그 정도의 이미지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조미교회 여러분을 만나면서 그런 자신이 그러한 잘못된 이미지에 지배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거기서부터 제 자신과의 격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정신적인 고통이란, 여러분이 그것을 깨달았는지 모르지만,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도 말을 별로 말을 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오히려 말을 잘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말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가장 컸던 것은 역시 국가에 대한 인식입니다. 한국에서는 그 당시 오후 5시부터 5시 반 사이라고 기억합니다만 일몰 때 이른바 국기를 내리게 되며, 그 때, 커다란 확성기에서 국가를 흘려 보냅니다. 그러면 모두가 멈추어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물론 멈추지 않는다고 해서 처벌받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많았지만 원칙은 그랬어요.또 명절 등에는 국기 게양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이것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만, 최근에는 거의 지켜지지 않습니다)

 저는 이러한 원칙들, 특히 국기를 내릴 때의 의식은 세계 공통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국가 가치를 모르는 것이라고 해서 화를 냈습니다. 그 정도로 나는 국가에 대한 세뇌를 당했던 셈인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갔습니다.

 예를 들어 유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을 때, 지금의 유학생들, 특히 젊은 유학생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일본에 유학할 때는 아직 유학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남아 있었습니다. 제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학했던 나라에 그대로 남는 것은 국가에 대한 일종의 배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학이라는 것이 과연 나라를 위하는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학 후 꼭 조국에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주변의 한국 유학생에 물었더니, 엄청나게 강력한 반발을 샀습니다. 당신은 일본인의 앞잡이가 될 것인가, 일본에 남으면 기껏 쓰고 버려지는 존재로 이용될 뿐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아마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일본의 정책관계자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물론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이 일로 무척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제 지식을 살려야 할 길이 없다면 차라리 일본에 남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학생의 동료에게 친일파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 친구 중 한 명이 제 맏딸 수경이 태어났을 때 축하하러 오려고 입국 허가를 신청했지만 기각된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아직 직장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처음으로 국경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이 세계에는 국경이 있다. 물론 머릿속에서는 국경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직접 실감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엄청난 반발을 느꼈어요. 그때는 제 인식이 아직 변하지 않았으니 우리나라를 강하게 해서 이런 모욕을 당하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복수에 대한 맹세였어요 .그런 생각이 국경을 없애서 나라와 민족을 절대시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지 않느냐는 지금의 생각으로 바뀌는데 10년이 걸린 것입니다.

4. 불합리하기 이를 데 없는 국가와 국민에 대한 규정

 국가와 국경에 대한 한 가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이곳은 구니타치(國立)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구니타치시민입니다. 그것은 국적과는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저도 일단 구니타치시민이라 구니타치시에 주민세를 내고 있어요. 그런데도 저에게는 구니타치의 선거-시장과 시의회 의원등-에 대한 권리가 없습니다. 시민으로서의 의무는 다하고 있는데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건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것 아닌가요?

이것을 국가라는 범위까지 넓히면 어떨까요? 일본에는 많은 외국인 있어 그 중에는 70만명의 재일한국인 조선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소득세를 내고 있고, 모든 의무를 다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선거권이 없어서 투표를 할 수 없다. 이러한 것에 의문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 독립운동 때 대표 없이 과세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는데, 그야말로 권리가 없는 의무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일본에서도 외국인들이 대표 없는 과세 없다고 독립운동이라도 벌여야만 하는 것입니까?

또 한가지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꽤 많이 소개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받은 일입니다. 제 맏딸 수경이가 제게 아빠, 나는 일본인이냐 아니면 한국인이니하는 좀 색다른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왜 그걸 묻느냐고 반문하자 자신으로서 일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는데,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부모가 한국인이라 한국인이라고 해서 약간 혼란에 빠졌다고 대답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

 나도 어떻게 혼내야 할지 한동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는 그런 생각 한 적도 없었고 아마 당연히 한국인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죠. 큰 딸의 질문은 저에게 신선한 도전이었습니다. 조금 생각한 끝에 내놓은 대답은 이렇습니다. "모르니까 생각해보자. 하지만 너는 한국인이기도 하고, 일본인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

 국적이라는 것이 인간이 정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 통감했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미국은 속지주의이니까 미국 국적도 갖게 되어 소위 이중국적자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속인주의를 택한 일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국적이 한국 한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국적은 인간이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일본인이니까 한국인이니까 영혼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이고 한국인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편리해서 만든 국적이라는 것이 어느 덧 절대적인 존재가 돼고 있는 것 같습니다.

5. 국가가 만들어내는 비극 근대의 광기

처음으로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이 인용된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상상의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 죽어가고, 죽이는 비극을 지난 한 세기 동안 되풀이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대표적인 작품인 '전쟁과 평화'에는 이런 글들이 있습니다.

”‘만약 모두가 자신의 신념만으로 인해 전쟁을 한다면 전쟁이란 없었을까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게 정말 괜찮지 않나요?’ 피에로는 응했다. 앙드레 공작은 히쭉 웃었다. ‘그것이야말로 괜찮다는 것은 커다란 도리에 맞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야.’ ‘그럼 당신은 무엇 때문에 전쟁에 나가는 겁니까?’ 피에로가 물었다. ‘무엇 때문인지 나도 모른다, 그래야 하기 때문이지. 그 외에도 내가 전쟁에 나서는 것은’, 그가 조금 숨을 고른 후, ‘내가 나오는 이유는, 지금 여기서 내가 보내고 있는 생활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큰 비극의 시작이 변덕스러운 마음이라니 정말 무서운 일이겠지요.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러시아 귀족들이고 그 귀족들의 변덕이나 약간의 명예나 기득권 이익을 위해 아까 얘기한 중남미 지배자들처럼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가장 희생되는 사람들은 이름 없는 민중들입니다. 명분도 모르는 전쟁에 동원되어 맨 먼저 살육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것은 귀족이 아닌 그들입니다.

 이런 사실은 전쟁과 평화를 비롯한 여러 책에 써 있습니다. 근대국가나 국민이라는 것이 옛날 봉건시대와 다르다는 것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봉건시대의 전쟁이라고 하면 왕이 돈을 주고 군인을 고용하였고 그 사람들이 전쟁에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그래서 민중은 전쟁과는 깊은 관계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민중을 지배계급이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여 권력의 하부조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으니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민중은 일본에서 말하자면, 천황의 적자라 불리게 되었고, '당신들은 모두 천황의 적자이니까 명예로운 존재이다.'라는 등의 명분을 부여받고 전쟁에서 스스로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 사회학자의 이야기에 의희면 이타적인 자살이 됩니다. 자살로는 보이지 않지만 나라를 위해 스스로 죽으려 했으니 결과적으로 자살을 국가가 강제한 셈이죠. 그것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소위 총력전이라는 근대의 전쟁입니다. 이제 전쟁은 군대만의 것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은 총력전이라는 인류의 부의 유산의 형태로 행해진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기독교 성경 묵시록에는 한 짐승의 이름을 새긴 사람들 이야기가 있는데 우리가 바로 권력이란 짐승의 이름을 각인 받은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저명한 문화인 마루야마 마사오의 이야기를 나눕시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가 훌륭한 사상가라고 생각합니다. 마루야마 선생님이 일본의 전쟁 지도자에 대해 쓴 논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느 유명한 지도자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인간은 때론 폭포 위에서 눈을 감고 뛰어내리는 것도 필요하다고 해요. 자기 혼자서 뛰어내리는 것은 좋겠지만 1 억명의 생명을 함께 뛰어내리게 해도 될까요?

 그런 무책임한 지도자들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내몰려 시에 내몰린 것이니 큰 비극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치 독일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책임감을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도 역시 자신들의 욕망 때문에 많은 독일인 그리고 유럽인 그리고 세계인들을 전쟁이라는 무서운 곳으로 몰아넣었으니 무책임한 지도자였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그것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 당시 민중은 어땠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치안유지 법률과 전쟁의 시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당시 종군을 지원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성의 경우 간호사로써 전쟁터로 가고 싶다고 하였는데 가장 극단적인 경우, 감격한 나머지 자살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태는 오사카에서 출병하는 병사 중에 가난해서 배웅도 못하는 소년이 있는 것을 보고 동정한 오사카의 주부들이 그러한 병사들을 격려하려고 하여 오사카의 국방 부인회를 라는 조직을 만든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무책임한 지도자들은 물론 나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지도에 속아 자살할 정도로 감정적이 된 것은 아무래도 어리석다고 밖에 할 수 없어요. 그 책임은 몰랐거나 힘이 없어서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미쳐 있었다고 해야 합니다. .지도자도 민중도 모두 역사의 흐름에 휘둘려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6. 아직도 끝나지 않은 비극의 길 

이런 일은 지금도 여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라크에는 아담 후세인라는 독재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국민을 끌어내고 전쟁을 일으키거나 자신들의 일족의 번영을 위해서 국민을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서라든가 미국에 대한 복수라든가 하는 이유로 민중을 선동하면서 고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그렇게 왕따를 당하며 괴로워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떨까요? 자신들보다 약한 민족을 못살게 굴잖아요. 지금도 세계에는 국가와 민족을 내세운 분쟁을 몸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근대의 광기로 인해 우리는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요?

 요즘 일본에서는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의 전쟁을 긍정하는 소위 자유주의사관이라는 것이 지지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일·미 안보 조약에 있어서의, 신가이드 라인을 반드시 성립시키려고 하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부성은 학습 지도 요령에 의해 국가를 강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국기나 국가가 필요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초중학교 졸업식에 그것을 도입하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느낍니다. 졸업식은 국가행사가 아닌데 왜 국기와 국가가 필요한가요? 이러한 움직임은 국가를 아이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시키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누구의 눈으로 봐도 분명한 사실 아닌가요? 그토록 비참한 전쟁을 겪은 이 국민을 왜 그런 방향으로 달리게 할까요?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전후 평화주의, 전후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꽤 약한, 사상적인 뿌리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미국의 지도에 의해 민주주의의 흉내를 냈지만, 거기에 깊은 뿌리는 없었습니다. 약간의 변화가 있으면 그대로 흔들리는 건 그 때문이 아닐까요? 정말로 개개인이 민주주의란 것이 무엇인지, 또 국가란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으면 상황은 많이 달라지겠지요 그게 아니었기 쉽게 방향 전환해 버리는 거죠. 어떤 사람은 이것을 숙취라고 말했습니다. 한때 전쟁에 대한 거부 반응을 보였지만 전쟁 자체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것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도 베트남전에서나 애를 먹었는데도 걸프전을 일으키거나 이라크 등을 전쟁터로 만들었으니 마찬가지 아닐까 합니다.

7. 민족을 초월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의 교훈

오늘 이야기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한 것입니다. 이 비유는 너무나 유명해서 많은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위가 높은 사람의 위선적인 태도,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착한 행동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해석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에서 국가와 민족의 벽을 돌파한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대화하는 것조차 피해야 할 정도로 사이가 나쁜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은 반죽음이 될 정도로 맞은 유대인을 도와줬어요. 오히려 자기 동족들 그것도 성직자들에게 버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미국 킹 목사의 설교책에는 이 예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이 적혀 있습니다. 그 사마리아인이 상처받은 사람을 먼저 유대인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가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는 전혀 교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인은 그를 먼저 한 인간으로 인정했고, 그 후 우연히 그것이 유대인일 뿐이다. 좋은 이웃은 외관적인 일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을 인간을 형제로 보는 내면적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제 저는 어떤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신들러의 리스트라는 영화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영화의 등장인물의 모델이 된 사람들이 출연 해 증언을 한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종교와 인종 그리고 나라를 보지 않고 마음을 봐달라는 한 유대인의 하소연이 있었습니다.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좀처럼 그 이상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유대인이지만 불쌍하니까 도와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반 죽임을 당하고 쓰러진 한 사람을 발견하고 구한 것입니다. 유대인인 것은 아예 문제가 되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하는 새로운 인류공동체의 정신이 아닐까요? 성경이 강조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국제교류라는 말을 들은지 오래되었습니다만, 그건 물론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러긴커녕 오히려 훌륭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것이 국가나 국민의 범위에서 이루어진다면 때론 전쟁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인류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상상의 공동체인 국가 및 국민의 기존 인식 틀을 돌파해야 합니다. 좋은 사마리아인은 그것을 보인 셈이 됩니다. 아사야마선생님이 말씀하신 인터퍼스널(Inter personal)이라는 말은 이런 뜻이죠. 미일우호, 한일친선 같은 말도 꽤 되지만, 하나하나의 개인이 인간으로서 교류하기에, 거기에는 어느 나라 사람이라던가, 어느 나라 같은 건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저의 이웃은 한국인이라든가 일본인입니다 라는 대답이 아니라 다나카 씨입니다, 혹은 김씨입니다. 라는 대답이 자연스럽게 나올 것입니다.

8. 모든 것은 개인에서 출발한다.- 당신은 변화의 주역!

 이렇게 큰 사건도 사실은 작은 개인의 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국가와 국민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서 권력에 기대게 되면 큰 모순이 됩니다. 유대 사회에서 경멸당했던, 이름 없는 사마리아인이 그것을 실현해 보였습니다. 지식도 없고, 힘도 없고, 돈이 없고, 권력이 없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많은 역사가 그러한 권력 없는 자들에 의해 실현된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듯이, 세상에서 배움이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이 선택되어 역사를 바꾸어 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나비가 떨어져서 큰 소리로 울리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것도 두려워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있습니다. 많은 약자들이 성경만 의지해서 좋은 사마리아인처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살아갔습니다. 그들의 이런 하나하나의 발자취가 그것을 실현하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역사를 바꿔놓았다는 것은 잊지 마세요.

 새로운 인류공동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국가 권력도 지도자도 아닌 당신들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하는 중심의 이동이 확실히 일어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도 하나님에게 초대받은 한 사람으로서 그 사명을 완수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인 하나님, 그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오늘 이렇게 자격을 갖추지 못한 저를 강단에 세워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선한 사마리아의 예화를 가지고 이야기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쓰러진 사람을 유대인으로 보지 않고 한 인간으로 보고 구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지금의 세상에서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나 국민, 민족에 의해 사람을 구별해 서로 죽이는 세계가 빨리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으로 새로운 인류공동체가 이 세상에 실현될 수 있도록 꿈꾸고 있습니다. 부디 도와주소서. 주신 말씀에 감사드리며 이 모든 간구함과 감사함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에게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