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박지선의 죽음과 분리장애의 함정

닥터 양 2020. 12. 13. 22:43

박지선의 죽음과 분리장애의 함정

  “오빠 여자애들 친구는 화장실 친구야” “나는 친구와 밥을 먹은 적이 없다”(유수연) “교수님 저는 친구가 장학금을 받으면 화가 나요이 세 가지 말은 상당한 시차를 두고 별개의 사람이 말한 이야기이지만 지금 갑자기 하나의 틀에서 묶여져 필자에게 다가온다. 필자의 여동생, 유수연이라는 스타강사 그리고 필자의 여대생 제자 이들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화장실 친구란 전형적인 분리장애적 집단주의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생리적 욕구가 동시에 일어날 리는 없다. 여성들의 화장실은 소변기라는 공개된 장소를 가진 남성과 달리 자신만 오롯이 남는 공간 뿐이다. 그런 짧은 순간의 고립과 고독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에 친구들과 손을 잡고 화장실을 가면서 그녀들의 우정은 자란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유수연의 말은 그런 화장실 친구라는 집단주의적인 상태를 벗어난 자립이 그녀의 성공을 가져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친구끼리 모이면 생산적인 것보다는 소비적인 것으로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다. 여성들처럼 분리장애적 집단주의가 강한 경우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녀들은 목적이 있어 모이는 것이 아니라 모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수연은 만남 자체를 거부하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 성공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

  여대생의 솔직한 고백이 여성들의 일반적 심리일 가능성은 크다. 남성들은 화장실까지 같이 가고 허구헌날 만나서 뭔가를 하는 여성들의 모습에서 뭔가 대단한 우정을 기대할지 모르나 친구가 장학금 받는 것을 질투하는 모습에 당혹감을 느낄 수 있다. 남성들에게 그런 우정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남성들이라고 해서 친구에게 호감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장학금 받은 친구를 질시할 정도라면 애당초 그를 친구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 차이의 원인은 남녀의 우정의 형성과정에서 비롯된다. 남성들에게 친구는 동지와 같은 존재이다. 동지란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인 요소가 강한 관계이다. 뜻을 함께 하니까. 그래서 여성에 비해 친구가 되기 어렵지만 일단 친구가 되면 질시와 공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성은 화장실 가면서 만들어진 관계이니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면이 강하다. 연인관계에 가까워 폐쇄성도 강하고 운명적인 성격마저 띨 정도이다. 그러니 친구이면서 미운 마음 질시하는 마음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이 정도를 알아내는 데에도 수십 년이 걸렸을 정도로 남녀의 우정은 전혀 다른 세계이다. 남성의 동지적 우정 여성의 연인적 우정에 답이 있다.

  가출 청소년들과 함께 지낼 때 필자는 이러한 차이를 확실히 느꼈다. 가출한 여자아이들은 분리를 두려워했다. 물론 가출이라는 특수상황에서 불안을 느껴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은 가출한 남자아이들과도 달랐다. 심지어 친구가 알바를 하는 곳 근처에서 맴돌며 수시로 전화나 문자를 하는 모습도 보았다. 필자의 경험이라 얼마나 객관적인지 모르나 가출 청소년의 성비는 아마 여자아이가 훨씬 클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녀들은 가출도 집단적으로 한다. 누군가가 가출을 입에 담아 합의에 이르면 함께 가출한다. 심지어 가출을 할 하등의 이유도 없는 아이까지. 하지만 남자아이의 가출은 상대적으로 드물었고 이유도 개인적인 것이었다.

  우리의 소중한 사람이 또 한 명 세상을 떠났다. 그 이름은 박지선! 필자가 이 글을 쓰게 한 사람이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서가 아니라 방식 때문이다. 엄마와 함께 최후를 마친 것이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구하라나 설 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와는 다르다.

  이 사건을 접하고 여성들의 동반자살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모자 사건! 심지어 그렇게 아끼는 어린 자녀들을 살해하는 모자 동반자살 사건조차 여성들이 압도적이다. 물론 이것은 합의에 의한 성인의 동반자살과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분리장애라는 점은 같다. 필자의 기억이나 지식이 부족한 탓인지 몰라도 세 부자 사건같이 혈연관계 있는 남성들의 동반자살은 극히 드물다. 남성 여성이 함께 동반자살 혹은 몇 사람의 남성들이 (자살사이트를 통해 알게된)하는 일은 여러 번 들어봤지만. 필자는 가출소녀들 화장실 친구와 여성들의 동반자살이 하나의 연결선상에 있음을 느낀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는 집단행동이라는 점에서.

  여성들의 이러한 행동양식은 그녀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방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남성과 달리 사회와 분리되어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살아온 그녀들이 감성적인 면에 치우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런 환경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남성들도 적지 않다. 노인이 되면 아이가 된다는 말은 그들이 사회와 분리되면서 생기는 현상이 아니겠는가? 유수연같이 사회에서 성공한 여성치고 그런 여성적 감성과 분리장애를 멀리하지 않은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있을까? 여성들이 하루아침에 변하여 유수연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남성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각각의 특징이 있으니 그로 인한 리스크로 여기고 긍정하고 말아야 할까? ‘여자(남자)가 그렇게 생겨 먹은 건데라고.

  하지만 여성의 자립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비켜 지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여성들이 사회활동을 더 본격적으로 하면 언제가 그녀들도 사회의 특징을 받아들여 유수연같이 자립적 여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까지 수수방관하는 것이 바람직할지 의문이다. 필자에게도 묘안은 없다. 워낙에 고착된 특징에 대한 훈계는 의미가 없다.

 성에 따른 차이를 신념에 의해 거부해서는 곤란하다. 제대로 된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하여 는 박지선 사건을 그저 한 연예인의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여성들의 분리장애적 집단주의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객관적인 사실을 먼저 인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필자의 글이 그런 노력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