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기대수명이 줄어든 이유 –양극화가 낳은 비극
목차
1. 심리적 고통이 질병과 죽음을 초래?
2. 일본은 어떻게 자살 천국의 오명을 벗어날 수 있었는가?
3. 미국의 기대수명의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효과
4. 덩치만 큰 나라 국민이 행복한 나라
1. 심리적 고통이 질병과 죽음을 초래?
사람의 수명을 결정하는 요인에는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있다. 개인적인 요인이란 식습관, 건강관리, 삶의 행복도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사회적인 요인이란 공중위생, 의료체계, 보건 및 건강에 대한 교육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을 수도 있다. 대개 건강이란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나라같이 사회적 요소가 비교적 잘 갖추어진 나라에서 갖기 쉬운 생각이다.
하지만 전염병이 자주 발생하는 나라들을 생각하면 사회적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 나라들의 국민들은 아무래도 평균수명이 짧을 수 밖에 없는데 공중위생을 비롯한 사회적인 요소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인 요소도 영향을 크게 미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빈곤국일수록 사회적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선진국이라고 해도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경제신문 2019년12월7일자에는 미국의 기대수명이 다른 선진국과 달리 줄어들고 있다는 놀라운 기사가 실렸다. 2017년 미국의 기대수명은 78.6세로 1위 일본의 84.2세에는 물론 스위스 83.6세 스페인 83.4세, 한국 82.7, 영국 81.3세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뿐 아니라 경제수준이 훨씬 떨어지는 슬로베니아의 81.1세, 체코의 79.1세에도 뒤지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2014년부터 3년간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1900년의 47.3세를 시작으로 미국의 기대수명은 2014년의 78.9세를 정점으로 3년간 계속 감소되고 있다. 물론 감소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15-18년의 4년간 감소한 적이 있는데 이는 제1차 대전의 시기와 겹치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라 볼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한 전사자의 수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전쟁도 별다른 질병의 문제도 없던 시기에 왜 이토록 기대수명이 감소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다른 선진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에 대한 기자의 분석은 개인적 요소에 치우쳐 있다. 하버드대 하워드 고 공중보건학과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소득 불평등, 불안정한 고용 등이 심리적 고통을 가져와 질병과 죽음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원인으로 들고 있다. 아울러 건강은 사회적 결정요인이 크다는 그의 말도 인용하고 있다. 즉 사회적인 불안요소가 압박을 가해 그로 인해 병에 걸리는 일이 늘고 그것이 사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기대수명이 짧아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도 제시되고 있다. 2018년말 미국 의사협회의 저널(JAMA)에 게재된 ‘미국인의 기대수명과 사망률1959-2017’보고서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약물 과다복용, 자살, 비만 등이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당 보고서는 특히 25-64세의 경우가 문제라며, 동 연령대의 약물 과다복용으로 인한 사망자는 1999년에 비해 2017년은 386.5%, 비만으로 인한 사망자는 114% 간 질환과 간경변증 등 알코올 관련 질병의 사망자는 40.6% 자살자는 38.3% 증가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객관적 통계를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대한 원인 분석은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다. 기껏해야 “사회적인 불안요소가 압박을 가해 그로 인해 병에 걸리는 일이 늘고 그것이 사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라는 추측만이 제시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의문이지만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그러한 불안요소가 병으로 이어져 사망을 늘렸다는 근거는 무엇인지 의문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비슷한 문제가 심각하고 그래서 자살율이 높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기대수명은 여전히 높아지고 있다. 왜 미국은 그것이 기대수명의 감소로 나타나는 것인지 이 기사는 제대로 해명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그것이 왜 하필 2014년부터인지에 대한 분석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물론 이것은 기자의 한계라기보다는 신문기사라는 것이 가지는 한계라고 여겨진다.
하워드 고 교수는 분명 건강은 사회적 결정요인이 크다고 했으나 그가 들은 요인은 실질적으로 개인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상위 1%와 하위 1% 사이에 기대수명의 차이가 크다는 (나성 14년 여성 10년)주장은 미국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나 상류층의 기대수명이 긴 것은 세계 공통적인 사실이다. 문제는 기대수명이 감소된 것과 또 미국의 기대수명이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매우 낮다는 것이기에 이러한 주장은 별 의미가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기사는 제대로 된 분석을 위한 기초자료의 나열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원인은 제시했지만 그것이 기대수명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분석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약물과다복용 비만 알콜 중독 자살 등이 소득 불평등과 불안정한 고용에 따른 심리적 고통 때문이라고 한다 해도 그것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2. 일본은 어떻게 자살 천국의 오명을 벗어날 수 있었는가?
인간은 왜 자살을 할까? 가난하니까? 힘드니까? 그런 요인들이 자살을 이끄는 배경은 되지만 여러 연구를 종합해 보면 자살은 그러한 원인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문제는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 힘든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이라는 것이다. 쥐를 빛이 전혀 없는 항아리에 가둔 경우와 자그마한 빛이 스며드는 항아리에 가둔 경우 생존율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고 한다. 빛이 없는 항아리에 갇힌 쥐는 1주일 이내에 죽지만 빛이 스며드는 곳에 갇힌 쥐는 상당히 장기간 생존하였다고 한다. 빛은 희망을 의미하고 어둠은 절망을 의미한다고 볼 때 절망이 주는 효과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에밀 뒤르껭은 ‘자살론’에서 인간의 자립과 고립의 관계를 분석하여 고립이 자살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밝혀냈다. 고립이란 곧 희망의 끈이 사라진 상태라 하겠다. 반대로 고통의 나락에 빠졌다고 해도 고립되지 않았다면 자살의 가능성은 낮아진다는 것이다. 같은 기독교를 믿어도 개신교도가 가톨릭교도보다 자살율이 높은데 이는 가톨릭의 가족적 분위기가 고립을 피할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는 것과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자살하려는 사람들의 징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자살이 사망자 본인은 물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인생에 엄청난 상처를 남긴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 같다. 자기비하, 생활습관의 변화, 공격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의 증가, 대인관계 기피 등이 (‘정부자살상담전화’에 의함https://blog.naver.com/hellopolicy/221587704940)나타나면 자살징후니 전화해달라는 정부의 홍보는 자살을 막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과연 이러한 노력이 자살의 예방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자살이 예방될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관심의 배경에는 대한민국이 OECD국가 자살 1위라는 명예(?)를 오랫동안 누리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013년 1만 명당 28.7명의 자살률을 보여 리투아니아(29.0)에게 1위의 영광을 양보(?)한 적도 있지만 2018년 현재 26.9명을 기록하며 여전히 1위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2위 이하의 차이도 매우 크다. 2위인 라트비아는 21.2명, 3위인 슬로베니아는 18.6명이고 4위 일본은 18.6명이다. 가히 압도적 1위라 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의 자살률 추이이다. 일본은 2007년 27.6명으로 상당히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였는데 불과 11년 후인 2018년에는 2/3 정도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우리나라도 다소 떨어졌지만 유의미할 정도의 차이는 아닌 것 같다. 세계적으로 자살률이 하락하는 가운데 우리도 자살률이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일본의 하락은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기에는 너무나 급속하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가장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경제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2007년이라면 ‘잃어버린 20년’의 말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경제적 어려움이 자살의 원인으로 아직 작용하였다 하겠다. 그것은 자살률의 급증이 여성과는 그다지 무관하고 남성 자살의 급증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여성보다는 남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버블경제가 붕괴되고 그 영향이 사회 전체에 파급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부터 남성의 자살이 급증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가진다. 1990년경 연간 13,000명 정도로 최저점을 기록한 남성 자살자는 2005년경 25,000명으로 2배 이상으로 급증하였다. 반면 여성은 1995년 연 7,000명 수준에서 1999년경 9800여명 수준으로 정점을 찍기는 했으나 그 변화폭은 그리 크지 않았다. (https://blog.naver.com/vj8689/221463223646에서) 그러한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다가 2007년 이후 급감한 것은 경제가 2010년대 들어 호전되었고 특히 아베노믹스의 효과가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닌 것 같다. 일본 정부가 자살 공화국의 오명을 벗기 위해 자살에 대한 철두철미한 대책을 세워 자살의 감소에 힘썼다는 점이 큰 효과를 가져왔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일본은 총리실 산하에 자살대책추진본부와 자살대책추진실을 설치하고 11명의 전담인력과 막대한 예산(2017년 7,633억원)을 투입하여 왔다. 이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보건복지부 산하에 비전담 인력 2명과 99억원의 예산에 불과한 형편이다. 확실한 연관관계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차이가 있다면 자살률 차이의 원인으로 보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0540926&memberNo=36765180&vType=VERTICAL에 의함
언 듯 생각하면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 자살조차 이렇게 국가가 대책을 세워 예방에 힘쓰면 감소 될 수 있음을 일본의 사례는 증명하고 있다. 문제는 얼마나 국가가 관심을 가지고 정책을 실시하는가 이다. 일본과 우리의 차이는 그런 점에서 양국의 차이를 확연히 보여 주고 있다.
3. 미국의 기대수명의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효과
한국의 건강보험은 세계적으로도 훌륭하다고 칭송받고 있다. 사실 외국에 굳이 나가보지 않아도 우리는 의료보험제도의 혜택을 누린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을 것이다. 유럽의 무상의료에 비하면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의료비 때문에 살 수 있는 사람이 죽는 경우는 과거에 비하면 현격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특히 건강검진의 의무화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대수명을 높이는데 일조한다고 할 수 있다. 짝수 해와 홀수 해로 나뉘어 각각 자신들의 생년에 맞춰 이루어지는 의무적 건강검진은 세계적으로 볼 때도 훌륭한 제도가 아닐 수 없다. 예방의학은 치료의학보다 더 효과가 크다는 것이 상식이다. 병에 걸렸을 때 치료하기보다는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지만 설령 걸렸다고 해도 조기에 발견된다면 치료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미국의 의료보험이 얼마나 열악한 지는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무료 또는 무료에 가까운 비용으로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설령 병이 발견되어도 살인적 치료비 때문에 조기 치료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손가락이 잘렸는데 돈이 없어 전부 봉합을 하지 못하고 일부만 했다는 영화 식코의 고발은 미국의 의료보험 내지 의료체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의료의 문제는 1980년대부터 실시된 신자유주의 정책과 깊은 관계가 있다. 감세 규제완화의 기치를 내걸고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초래하며 비난의 도마 위에 올랐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중산층의 붕괴와 소득의 양극화가 심해진 것이다. 상위 1%는 물론 20%까지의 소득은 급속히 늘었지만 하위 80%의 소득은 그다지 늘지 않거나 제자리 걸음이라는 통계는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의료보험의 규제 완화는 경쟁을 통한 발전이라는 취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의료란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소득에 따른 절약이라는 것도 불가능한 분야이다. 식생활이라면 소득에 따라 보다 저렴한 선택이 가능하다. 하지만 병은 무조건 치료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이지 그 중간은 있을 수 없다. 아픈 것을 방치하면 사망에 이를 가능성이 높아지기에 의료는 규제가 없을 경우 공급측의 일방적인 시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다른 분야와 달리 의료분야에 대하여 선진국들은 공영화를 통해 이를 규제하고 있다. 그것은 교육 국방 등과 함께 공공재라는 인식이 오래 전부터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의료가 완전히 공급의 일방적인 주도하에 놓이게 되었다. 의료비는 천정부지로 높아지고 (맹장염 수술의 경우 우리나라의 수 배에서 10 배이상에 이르기도 한다)의료보험은 보험회사의 농간으로 제대로 된 혜택을 받기 어렵게 되어 있다. 물론 보험료가 비싼 고가의 보험에 가입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큰 혜택을 보기도 하지만 그럴 여유가 있는 중산층은 상당히 붕괴된 상태이다. 앰블랜서를 불러 병원에 운반되어 치료를 받았는데 보험회사에 사전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당한 사례조차 있다. 각 보험회사에는 보험금을 포기하도록 압박하는 전문인력까지 있어 그들은 성공보수를 노리고 소비자에게 갖은 방법으로 포기를 종용한다고 한다. 법률전문가들도 동원되는 이러한 수법에 대항하기 어려운 서민들은 보험금을 포기하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경쟁원리가 작동하기는커녕 업계가 암묵적으로 카르텔을 맺어 소비자들을 착취하는 꼴이 된 것이다.
비만의 증가도 신자유주의 원리로 설명이 가능하다. 빈곤층이 5,000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그들은 식비(가장 절약하기 쉬운 비용이다)를 절약하기 위해 기름에 튀긴 고칼로리 음식을 구입하여 섭취하게 된다. 또 푸드스템프라는 무료 급식권을 지급받는 극빈층의 경우 그것을 이용해 일단 배를 채울 수 있는 고칼로리 식품을 구입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우리처럼 저칼로리 메뉴가 풍부하지 못한 (대표적으로 김치 된장 등)미국에서 저소득층에게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다.
게다가 학교의 급식조차 식품회사의 농간에 의해 이러한 경향을 더욱 조장하고 있다. 급식을 제공하는 회사는 탄산음료와 기름진 음식을 저가로 공급하는 것으로 학생들의 식생활을 어려서부터 고칼로리화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장한 아이들은 비만의 함정에서 평생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그러한 습관은 결국 그 자녀들에게도 이어지는 것이다. 나쁜 식생활의 대물림이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미국정부는 얼마나 대책을 세우고 있을까? 확실한 것은 미국정부가 신자유주의정책에 따라 복지예산이나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삭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감세로 인해 미국정부는 엄청난 재정적자를 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증세를 통해 세수를 확보하기보다 복지비용을 줄여가는 방향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것도 모자라 감세정책은 후퇴하기는커녕 늘어만 갔다. 그것은 매우 교묘하게 이루어진다. 감세를 홍보하면서 “당신은 얼마를 절약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여 유권자들을 설득한다. 물론 그것은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로 인한 혜택의 대부분은 고소득자들의 몫이다. 저소득자가 몇 달러 십 달러를 아니면 기껏해야 몇백 달러를 절약하는 동안 부유층은 몇십 만 또는 몇 백 만 달러 아니 그 이상의 세금을 절약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부족해진 세금을 메우기 위해 복지예산이 삭감된다. 하지만 국방비같이 부유층이 선호하는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늘어간다. 엄청난 기만이 아닐 수 없다.
고령자를 위한 약값 보조금 정책은 이러한 기만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65세이상의 노인들에게 약값을 보조해 주는 이 정책은 취지 자체는 매우 바람직하다. 하지만 문제는 보조금을 지급할 약값 자체를 교섭에 의해 낮추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65세이상의 노인의 수는 엄청나고 약의 수요 역시 엄청나다. (노인이니 약의 수요는 젊은 세대보다 클 것이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수가가 낮은 것은 국민전체가 가입한 보험이기 때문에 소비하는 측의 교섭력이 월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제도 역시 그러한 이점을 이용해 약값을 낮춰야 하는데 그것을 막아버렸으니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부풀어 오를 것은 명약관화하다고 하겠다. 물론 그 비용은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된다. 가뜩이나 부족한 복지재원이 이렇게 불필요한 곳으로 새어나고 있는 것이다. 경쟁을 통한 발전을 꾀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의 정신과도 맞지 않는 정책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약물과다 복용문제는 이러한 약값 보조정책의 결과일지 모른다. 약값보조 때문에 소비자의 부담은 대폭 경감되었다. 그러니 의사로서는 약을 남용할 정도로 처방할 것이고 가난한 소비자들은 약에 의존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결과적으로 약물 과다 복용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로 인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제약회사이고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의 세금과 건강이다.
미국의 기대수명을 낮추는 또 하나의 원인은 영유아 사망률이 높다는 것이다. 2002년 OECD평균 영아 사망률은 6.5(1,000명당)이고 미국은 7.0명이어서 큰 차이는 없었지만 평균보다 높았다. 이 때 우리나라는 5.3으로 평균과 미국의 수치보다 낮았는데 경제력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이다. 2010년대 중반이 되면 이러한 기현상은 더욱 심화된다. OECD평균은 3.9로 대폭 하락했고 한국도 2.8로 거의 절반 가까이로 하락했는데 미국은 대략 6.0 정도로 조금 낮아지긴 했으나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OECD 중 미국은 멕시코, 칠레, 터키를 제외하고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 세계 최강국이자 최대의 경제 대국인 미국의 위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영유아 사망률은 무엇보다도 국가정책과 공중위생 등과 깊은 관계가 있는 지수이다. 북한의 영유아 사망률이 남한의 8배나 된다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겠다. 세계적으로 봐도 중서유럽과 일본 한국 등 비교적 풍요로운 나라들의 영유아 사망률은 최저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이웃 캐나다보다도 낙후되는 등 국력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영유아 사망률을 낮출 수 있는 국가의 정책과 지원이 부족한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자살의 문제에서도 확인했지만 국가의 관심과 정책이 기대수명에 영향을 미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미국의 기대수명은 원래 선진국 중에서 낮은 편이었지만 특히 최근들어 낮아지는 것은 신자유주의로 인해 양극화 빈곤층의 급증도 있지만 국가의 복지예산 등의 상대적 저하로 인해 기대수명을 늘리기 위한 정책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함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워드 고 교수가 건강은 사회적 결정요인이 크다고 하면서도 언급하지 않은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 하겠다.
4. 덩치만 큰 나라 국민이 행복한 나라
일본과 우리나라는 경제에 있어서 질적인 차이가 거의 사라진 상태에 놓여 있다. 오히려 경제성장률 등을 놓고 보면 우리가 훨씬 양호하다. 2018년 경제성장률은 우리가 2.6%인데 일본은 0.8%수준이다. 이러한 차이는 이른바 아베노믹스를 통해 일본경제가 회복되었다는 2010년대를 놓고 보아도 별로 다르지 않다. 2020년대 중반에는 우리가 일본을 1인당 국민소득에서 따라잡는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더 이상 일본은 우리가 두려워할 상대가 아닌 셈이다. 국가부채가 250%나 되는 일본과 달리 우리는 4,50%수준이라 재정건전성도 훨씬 낫다.
그런데 일본은 우리보다 삶의 질에서 앞서고 있다고 한다. 일단 취업률이나 고용문제에서 우리를 앞서고 있다. 우리는 청년들이 취업을 못해 안달인데 일본에서는 사람이 부족해 난리라고 한다. 일본인들의 체감경기가 좋다는 것은 아베정권에 대한 지지의 원인으로 양호한 경제가 들먹여지고 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과연 왜 이런 괴리가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경제의 내용의 차이에 있다. 일본은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격차가 매우 작아 대략 10대9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거의 2배에 가까운 차이가 나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 학력별 임금 격차도 일본이 우리보다 비교적 작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대기업의 경우도 생각보다 급여가 높지 않으며 임금의 세대별 격차도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86세대가 이런 문제에서 공공의 적이 되고 있으나(상당한 사실왜곡이다)일본은 그러한 문제에서 우리보다 훨씬 좋은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일본은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즉 특정 계층이 수입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사회가 아니라 학력 나이 기업의 규모에 따른 차이가 우리보다 작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장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여 우리는 그러한 격차가 심해 결국 성장에 비해 그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지 않아 체감경기가 그리 좋지 못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일의 격차는 미국과 비교할 바는 아닐 것 같다. 미국이 경쟁력을 높인다는 미명하에 실시한 신자유주의정책은 중산층을 붕괴시키고 소수의 부유층 내지 중산층과 다수의 빈곤층을 양산하였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의료보험이 미비해 한해 발생하는 파산의 절반이상이 의료비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이미 상식이다.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는 CEO들의 그늘에는 최저임금으로 허덕이는 삶을 살아가는 이름 없는 서민들의 애환이 숨어 있다. 연금조차 운영의 자유화로 인해 날려버리고 노후를 지낼 일이 막막해 하는 서민들이 부지기수라는 이야기도 들려 온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길은 막막하다. 총기사건이 계속 발생해도 이를 규제할 법조차 만들지 못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것은 총기협회의 로비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만적인 자유주의사상이 너무나 깊숙이 침투하여 그것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950-60년대 중산층의 황금시대가 열렸으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각종 규제와 정책이 신자유주의 아래서 무너져 지금은 그것을 회복할 길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숫자로 보면 미국경제는 우리처럼 결코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내용은 한국과 일본 그 이상으로 큰 격차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 10과 100이 하나로 합쳐지면 평균은 55이나 실제론 10배의 차이가 있는 것 같이 미국은 삶의 질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는 불평등 사회라 하겠다.
미국인들의 기대수명이 낮고 그나마 더 짧아진다는 것은 미국 사회의 이러한 어두운 면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1인당 국민소득으로 보나 국가전체의 경제규모로 보나 미국은 세계최고수준의 나라이다. 하지만 그들은 건강하지 못해 오래 살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들이 일찍 죽는 일이 다른 선진국에 비하여 자주 일어나고 있다.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미국국민 모두가 이런 불행의 희생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억대 유모차를 끌고 다니며 수백 만 원짜리 디저트를 먹고 수십 억 짜리 생일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불행은 전혀 상관없는 딴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문제는 그들이 누리는 부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고전 춘향전에는 이러한 문제를 다룬 한시가 등장한다. 주인공 이몽룡은 거지 모습으로 변사도의 생일 파티에 나타나 시를 짓고 사라지는데 그 내용은 탐관오리에 의한 착취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膏血(고혈) 백성의 고혈- 春香傳(춘향전)에서
金樽美酒千人血(금준미주천인혈) 금 술독에 가득 찬 맛 좋은 술은 민중의 피
玉盤佳餚萬姓膏(옥반가효만성고) 옥쟁반에 담긴 진귀한 음식은 만백성의 살
燭淚落時民淚落(촉루락시민루락) 촛농이 떨어질 때 마다 민초의 눈물이요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드높도다
출처 : 양돈타임스(http://www.pigtimes.co.kr)
http://www.pig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636에서
미국 최고경영자들의 천문학적 연봉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들은 일반직원들은 물론 경영진 사이에서도 엄청난 차이의 연봉을 수령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실시되기 이전의 최고경영자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연봉을 받는 그들이 과연 월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세금도 훨씬 적게 내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하지만 서민의 삶은 오히려 팍팍해지고 있다. 현재 미국의 서민들은 그들의 역사상 처음으로 부모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다. 경제가 좋다는데 왜 그들은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일본에게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로 불평등이 극심해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유학시절 일본은 과로사 문제가 심각했다. 다 먹고 살려고 일하는 건데 너무 일해서 죽다니 너무 하지 않는가 싶다. 더구나 놀란 것은 그것이 빈곤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경제적 발전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건만은 아니라는 의식을 그때 처음 느꼈다.
문제는 경제발전만이 아니라 그 발전의 산물이 어떻게 분배되는가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미국은 그런 점에서 실패한 나라이다. 그런 나라를 우리는 반면교사로 삼을지언정 따라가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의 기대수명의 저하는 그러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 것에 대한 큰 대가가 아닐 수 없다. 경제란 숫자를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상식적인 답을 알고 있다면 우리가 나아갈 길은 정해져 있다 하겠다.
‘미국과 닮은 어떤 나라’(Someplace Like America)라는 책에는 어떤 노숙자의 모습이 나온다. 그의 등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내 가족은 내가 가장 필요로 할 때 나를 버렸다”라는. 아마 먹고 살기 어려워 가족이 흩어져 버린 결과 노숙자가 된 한 사람의 기구한 삶이 그 문장에 압축 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도 노숙자는 있다. 그들도 비슷한 처지일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은 그런 사람들을 양산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약으로 버텨(마치 옛날의 우리 같다) 약물 과다 복용이 만연하고 돈이 없어도 배를 채워야 하기에 기름진 음식만 먹다가 비만이 되어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나라 그것이 미국의 민낯은 아닐까 싶다.
당신에게 묻고 싶다. 덩치만 크고 각종 문제로 시달리고 있는 나라와 작지만 국민이 행복한 나라 그 어느 쪽에서 살고 싶은가 라 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나라를 만들자고 하면 반대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러한 어리석음이 미국을 오늘날처럼 덩치 큰 병자로 만들었다. 우리는 덩치도 크지 않으니 자칫하면 덩치도 작고 문제만 많은 나라가 될 수도 있다. 당신의 현명함이 그런 위험을 막을 수 있게 쓰여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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