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이 남긴 위대한 유산 – 강탈의 역사와의 결별
목차
중국공산당의 공산혁명이 가지는 의미
2. 러시아 혁명 세계사의 거대한 전환점이 되다.
3.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를 모른다.
4. 러시아 혁명의 유산을 빛나게 하기 위해
1. 중국공산당의 공산혁명이 가지는 의미
만일 장개석이 모택동에게 승리하여 그 결과 중국이 공산화되지 않았다면 동아시아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가장 먼저 우리나라와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자.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소련과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지지와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상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장개석의 중화민국이 중국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한국전쟁은 일어났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설령 일어났다고 해도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결국 휴전으로 전쟁이 매듭짓는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의문도 생길 수 있다.
이러한 가정을 전제로 두면 한미관계도 지금과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한국과 미국의 동맹 관계가 지금처럼 공고해졌을까 하는 의문이 따른다. 한국전쟁은 우리는 물론 미국에게도 한미동맹의 필요성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한 결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위협이 실재하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겪어보지 않으면 아무래도 절실함이 크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에게나 미국에게나 한국전쟁은 그러한 절실함을 극대화 시켜 준 결정적 계기였다.
이는 군사적인 동맹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 걸쳐 두 나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였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놀란 것은 그 많은 미국의 원조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도둑맞은 집을 인수한 느낌이었다”는 그의 표현은 매우 정확한 지적인 것 같다. 그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 의하면 1945년에서 1959년 미국이 우리에게 제공한 원조는 26억9천만달러에 이른다. 이는 일본이 우리에게 청구권협정에 의해 제공한 유무상 원조 8억 달러의 3배가 넘는 액수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 배경에는 물론 냉전구조와 중국의 공산화 한국전쟁이 있다 하겠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우대가 박정희의 집권 이후에도 계속되었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상 불가피했던 점도 있고 박정희의 적절한 대미정책도 작용했을 것이다. 중국의 공산화는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가져온 점에서는 부정적인 영향을 우리에게 미쳤으나 그로 인해 우리가 미국의 지원 하에 국가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뜻밖의 플러스 효과를 나타냈다고 하겠다.
그뿐이 아니라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정책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일본은 원래 점령하에 군사력과 이를 뒷받침할 경제력의 약화가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공산화 냉전의 격화는 이러한 계획의 수정을 가져왔다. 미국으로서는 일본을 동아시아정책의 기지로 삼을 수 밖에 없었기에 약화가 아니라 도리어 강화로 방향을 바꾸어야 했고 이로 인해 일본은 국력약화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만일 중국의 공산화가 없었다면 일본의 강화정책자체가 불필요했을지 모르고 그렇다면 일본의 전후 발전도 상당히 위축되었을지 모른다.
게다가 한국전쟁은 일본의 경제를 소생시켜 줄 응급조치와 같았다. 전쟁 후 시설과 수요의 불균형으로 인해 과잉설비와 과소생산의 고통에 시달리던 일본은 한국전쟁의 특수로 인해 기적적인 부활을 이루었고 이것이 바탕이 되어 고도성장을 통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다.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을 오로지 한국전쟁의 특수로 인해 가능했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라 생각된다. 이미 일본은 전쟁 이전 세계적인 경제ㅍ대국의 지위에 올라있었고 그것이 전쟁 후 잠시 침체되어 있었던 것을 한국전쟁이 회생시킨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경제성장의 골든타임을 놓쳐 고도성장이 늦어지거나 좀 더 낮은 수준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 나아가 중국의 공산화는 일본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중국 내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두 가지 의견이 제시될 수 있다. 1989년부터 동구권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고 1991년 소련이 붕괴된 것을 잘못된 역사가 바로잡힌 사건이라고 본다면 중국의 공산화는 중국의 역사가 일시적으로 퇴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장개석 정권이 중국을 지배하였을 경우 가져왔을 급속한 근대화의 길을 1970년대 이후의 개혁개방시대가 열릴 때까지 정체시킨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장개석이 타이완으로 물러간 이후 그곳에서 급속한 산업화를 일으켜 번영을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타이완같이 작은 섬에서 가능했던 것이 중국 대륙에서 불가능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장개석의 국부정부가 왜 무너졌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국부군은 물량면에서 중국 공산당의 인민 해방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위에 서 있었지만 결국은 패잔병이 되어 타이완으로 도망을 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것은 모택동과 장개석의 전략 전술 능력의 차이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장개석은 군벌로 분열된 중국을 하나로 통합시켰을 뿐 아니라 중국공산당을 내몰아 2만5천리 장정(국부군의 추격을 피하여 2만5천리를 도망간 사건)을 하게 할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다. 그보다는 국부군 나아가 국민정부의 부패와 그로 인한 무능이 더 중요한 패인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장개석이 국민당 정부가 그대로 중국대륙의 주인이 되었다면 중국은 그러한 무능과 부패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희박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장개석과 모택동 나아가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능력 차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념과 출신 등의 차이 때문이다. 장개석과 국민당은 왕조인 청나라를 그 뿌리로 두는 세력이기에 근본적인 개혁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실제로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정권만 바뀌었지 특별한 개혁이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중일전쟁에서의 열세에서도 드러났다.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중일전쟁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고 이는 중국이 질적으로 변화하지 못 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은 왕조와는 전혀 관계없는 혁명가들의 집단이고 그들의 이념도 사회주의혁명을 목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집권 후 개혁은 필연적이었다. 중국공산당의 개혁은 요즘으로 말하면 ‘삽질’의 연속이었다. 이른바 대약진운동을 통해 생산력을 급속히 올리려고 했지만 그것은 도리어 엄청난 기아를 불러와(농기구를 녹여 공업용 철을 생산하는 어처구니없는 ‘삽질’의 결과) 많은 아사자를 내기도 하였다. (천만이나 이천만이 굶어 죽었다고 함)게다가 재집권을 노리고 모택동이 주도한 문화혁명은 중국 전후사의 가장 큰 비극이기도 하였다. 모택동이 죽고 등소평이 재차 정권을 잡으며 벌인 개혁개방은 그런 점에서 먼 길을 돌아온 끝에 맞이한 새로운 출발인 것 같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슘페터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창조적 파괴’의 결과일 수도 있다. 만일 장개석이 중국을 지배하였다면 봉건세력의 철저한 파괴가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그들은 구체제를 이어받아 적당한 개혁은 했을지 모르나 그 이상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은 뿌리가 그들이 척결해야 할 봉건적 적폐세력과 같았으며 그 세력기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대만에 들어가 제대로 한 것은 대륙에서의 실패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의 거듭되는 ‘삽질’은 결과적으로 중국이 개혁개방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중국공산당은 중국을 근대국가로 변화시키는 역사적 사명을 급속하게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양국가들과 달리 중국은 근대시민사회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처럼 부르조아혁명과 민주혁명을 거쳐 순조로운 근대화를 이루기 어려웠다. 장개석은 그것을 급속하게 수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기에 신해혁명이후도 중국은 거북이처럼 느리게 변화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과거의 지배세력에 어떠한 부채도 없는 개혁세력이었고 비록 미숙함으로 인한 시행착오는 거쳤지만 결국 중국을 근대국가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마치 우리가 식민지지배와 분단 한국전쟁으로 봉건세력이 척결되어 도리어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급속하게 이룰 수 있었던 것과 같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중국공산당의 집권인 중국공산혁명은 동아시아의 근대화를 앞당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비단 중국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와 일본도 근대화의 길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가 미국에 의해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함께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발전하며 근대화를 완성한 것도 결국은 중국의 공산화 남북의 분단과 한국전쟁 등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의한 파급효과의 결과는 아닐까 싶다.
따라서 중국 공산혁명 성공 이후 개혁개방의 실시까지의 시기는 ‘잃어버린 30년’이라기보다는 ‘성장통의 30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은 그것을 거쳐 근대화를 이루는 길을 열었기에 오늘날 G2로서 부활하였다.(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중국은 신흥강국이 아니라 과거의 강국에서 부활한 것이라는 점이다. 18세기까지의 중국은 명실상부 최강의 나라 중 하나였다) 우리는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통해 근대화를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일본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고 하겠다. 이것이 중국발 동아시아 근대화 혁명의 역사였고 중국의 공산혁명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러시아 혁명 세계사의 거대한 전환점이 되다.
13억 중국의 공산화는 그러나 그 영향력에서 러시아 혁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중국의 공산화 자체가 러시아혁명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중국공산당 창당(1921년) 자체가 러시아혁명의 지도자인 레닌이 중심이 된 코민테른의 지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비단 중국공산당만이 아니라 각국의 공산당이 코민테른의 지도 하에 고고지성을 울리며 활동을 전개하였다.(직간접적으로)
러시아혁명이 없었다면 사회주의가 20세기 세계에 미쳤던 엄청난 영향력은 있을 수 없었다. 그저 외로운 정치 운동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은 이러한 사회주의 세계화의 중심이었다. 소련의 영향력은 비단 사회주의국가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세계 각국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소련은 제2의 조국이었고 롤모델이었다. 민주주의자들에게 프랑스가 제2의 조국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미국의 압도적 영향 때문에 미국을 민주주의의 조국으로 여기나 세계적으로 보면 역시 프랑스라 할 수 있다. 굳이 말하면 영국이 시작하여 프랑스가 완성한 것을 미국이 전세계에 확산시켰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의 영향은 자본주의국가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소련이 세워지기 전에 사회주의는 19세기에 꽃을 피운 많은 사상 중에 하나에 불과했다. 19세기 유럽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계급투쟁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18세기 부르조아지 혁명이 각국에서 일어나 자유주의가 봉건주의를 대신하게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산업혁명은 각국에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적 분리를 가져와 민주주의를 발전시켰고 한 발 더 발전된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의 사상을 탄생시켰다.
그렇게 해서 유럽은 사상의 각축장이 되었다. 사회주의는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로 분리되었고 그 최종적 승자는 칼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였다. 헤겔의 변증법을 180도 뒤집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유물론에 의거 그는 자본주의사회는 그 모순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의해 전복되고 사회주의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것은 유럽사회를 뒤흔드는 선언이었고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대신할 가장 선진적인 사상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하지만 과학적 사회주의는 다시 세포분열을 통해 나뉘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시키는 혁명에 대한 회의를 느낀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하나는 선거혁명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이었다. 민주주의의 발달로 노동자들이 점차 참정권을 손에 넣게 되고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들이 출현하게 되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노동자의 지위가 향상되어 갔다. 그러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닌 선거혁명을 통해 자본주의체제를 바꾸어 가는 길이 현실적이라고 여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당초 마르크스주의적 정통사회주의자들과의 공존을 꾀하였으나 결국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다.
한편 사회주의의 보편적 성격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나타났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과의 단결을 택하는 대신 자국의 승리를 위해 총부리를 타국의 노동자들에게 겨누었다. 이념보다 민족과 국가가 우선시 된 것을 목격한 일부 사회주의자들에게 “피는 계급보다 진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결국 민족과 사회주의를 결합한 파시즘의 탄생을 가져왔다.
파시즘이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서 특히 지지받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역사의 산문이라 하겠다. 강대국 사이에서 오랫동안 시달린 끝에 민족국가로서의 통일을 이룬 독일과 이탈리아의 국민들에게 자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민족이라는 요소가 빠진 사회주의는 수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제1차 대전의 패배가 가져온 민족적 좌절감에 빠진 독일, 승전국임에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이탈리아는 사회주의를 민족이라는 틀 안에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파시즘의 산실이 되고 말았다. 일본 역시 오랜 분열 끝에 통일국가를 세운 것으로 인해 민족주의는 한층 고양되었고 그것이 결국 파시즘국가로 가는 길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혁명과 소련의 탄생은 사상의 경연을 체제의 경쟁으로 바꾸어 놓았다. 소련이라는 존재가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를 체제화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자본주의국가에게도 경쟁의식을 심어주었다. 소련의 탄생으로 자본주의국가들은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사회주의 세력의 침투에 대비하기 위한 체제의 변화를 시도 할 수 밖에 없었다. 냉전 구조에 따른 체제경쟁은 이미 제2차 대전 이전에 형성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파시즘이 사라진 제2차 대전 이후 세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체제대결의 장이 되었다. 이른바 ‘냉전 구조’의 탄생이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의 출현에는 러시아혁명과 소련의 탄생 사회주의의 세계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냉전을 이끈 국가들은 물론 제3세계에게 이런 체제경쟁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두 체제 사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경쟁을 부추겼다.
그 결과 자본주의국가들은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대폭 수용함으로써 자국 내의 사회주의자들의 세력이 확대를 견제하게 된다. 사회주의 사상은 이미 자본주의체제내에도 침투하여 있었고 그것은 여차하면 사회주의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위험성을 간파하고 사회복지제도의 도입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의 선견지명은 들어맞았고 독일의 사회주의세력은 혁명을 일으킬 근거를 상실하고 말았다. 냉전시대의 자본주의국가들도 비스마르크의 예를 모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을 다투어 복지제도를 도입하여 대다수의 서민들이 사회주의의 달콤한 유혹을 느끼지 못하도록 방지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반공의 첨단을 달리던 대한민국에서도 나타났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반공을 국시로 하면서도 사회주의적인 복지제도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복지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4대 보험제도(건강, 연금, 고용, 산재)가 박정희에 의해 도입되었다는 것은 결코 그의 반공 이념과 모순이 아니다. 일본의 경우에도 파시즘체제의 수립 가운데 복지제도의 도입이 급속히 이루어진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될 수 있다.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가 사회주의를 세상에서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중국이나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국가가 잔존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이미 자본주의국가의 체제내에 깊숙이 파고들어 그 유산으로서 오늘도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변종인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북유럽국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같이 극단적인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나라들조차 사회주의적 요소는 상당히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사회주의가 출현하고 이들이 합쳐져 정체불명의 체제들이 세계를 뒤덮게 되는 합을 이룬 변증법적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3.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를 모른다.
프랜시스는 왜 ‘역사의 종말’을 주장했을까? 냉전이 끝났으니 세상은 평화롭게 잘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냉전 시대 이전에도 전쟁은 무수하게 일어났고 심지어 냉전 시대에도 냉전과 무관한 전쟁은- 중동전쟁, 이란이라크전쟁,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략 등등-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왜 냉전만 끝나면 전쟁도 끝나고 그래서 역사도 끝난다고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의 주장과 달리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총칼로 싸우는 실제 전쟁도 여러 번 일어났지만 총성 없는 전쟁은 더욱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문명의 충돌’(새뮤얼 헌팅턴)이라는 틀 안에서 대부분 설명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헌팅턴이든 후쿠야마든 그들은 냉전 후의 세계를 너무나도 단순하게 예상한 것 같다.
냉전은 소위 말하는 ‘하르마게돈’(인류최종전쟁)은 아니었다. 19세기 자본주의사회가 등장하면서 생긴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생각들이 각각 체제를 만들어 그것들끼리 충돌한 시대였다. 그러한 충돌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종교전쟁이다. 다신교와 일신교,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과 기독교, 가톨릭과 개신교 등등. 그것이 끝나자 인류가 모든 충돌에서 해방되고 평화로운 역사를 지속적으로 만들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문명의 충돌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 로마와 게르만의 대립과 충돌, 몽골과 유럽의 충돌,,,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 모두 미국인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인 미국이 소련을 대표로 하는 사회주의체제에 승리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한 사람은 냉전의 붕괴가 영구한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은 문명 간의 충돌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들은 역사에 무지했고 냉전적 사고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냉전의 종식과 함께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싶다.
냉전의 종식을 냉전이라는 틀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하나의 큰 흐름으로 보고 그 가운데에 놓고 생각한다면 보다 객관적인 결론이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왜 길고 긴 인류의 역사에서 19세기라고 하는 시기에 사회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등이 나타나 그것이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체제 간의 경쟁으로 발전하여 수 십 년을 보내야 했는가 라 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말이다. 그러면 미래에 대한 보다 정확한 예측도 가능할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안티로서 등장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자. 그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일어난 놀라운 반전은 아닐까 싶다. 힘 있고 권력 있는 자가 부를 차지하고 힘없고 권력없는 자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 그것이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간 사회의 모습이었다. 사회주의는 그것을 극복하고 모두가 주인이고 지배자가 되어 살아가는 사회를 꿈꾼 사상이었다. 착취와 지배의 역사를 종식시킬 획기적인 시도인 것이다.
그것은 19세기에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가 아니라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지속적인 저항을 통해 만들어진 반전이라고 생각한다. 만적이라는 노비가 노비해방을 꿈꾸며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우리도 왕후장상이 될 수 있다”라고 선언한 것은 누구나 왕후장상처럼 지배자가 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피지배자들의 소망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중세유럽의 농민전쟁도 우리나라의 동학농민전쟁도 모두가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되어 자신들이 자신들의 지배자가 되어 살아가는 미래를 꿈꾸기에 일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의 의식 속에서가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그러한 저항이 쌓이고 싸여 마침내 1917년 러시아혁명이라는 결실을 맺은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시작된 혁명의 시대가 가져온 최고의 선물이기도 하다. 그 선물은 인류의 꿈이었던 억압과 착취에서의 해방을 실제로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인류에게 심어주었다. 실제로 그것이 완벽하게 실현될 수 있는 날은 아직 요원하지만 결코 공상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한 셈이다.
마르크스의 비전은 아직 실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인간이기에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기에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데 실패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꿈꾸는 세상인 미래의 사회주의는 지금도 실현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지 모른다. 인류의 저항이 수 없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 우리 모두를 한 걸음 한 걸음씩 최종적 목표에 도달하도록 하여 온 것처럼 우리는 지금 우리도 모르게 그런 길을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저 나의 착각일 뿐일까? 바로 모두가 ‘지배자’가 되어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는 세상으로.
얼마전 역사학회에서 ‘현대’를 주제로 한 일련의 발표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 가운데 바로 러시아혁명은 현대로 넘어가는 기준인가 라는 문제의식을 가진 발표도 포함되어 있었다. 발표자는 과거에는 그것이 많은 지지를 얻었지만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된 이후에는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하였다. 사회주의가 실패로 끝난 시도라면 그래서 청산해야 할 유산에 불과하다면 그 말도 일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살아서 오늘날에도 우리 안에서 숨쉬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더구나 19세기 혁명의 시대가 가져온 최고의 선물이 러시아혁명이라면 말 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러시아혁명은 그런 점에서 19세기의 근대를 넘어선 현대를 출발시킨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후쿠야마나 헌팅턴은 잊어라. 그들은 제대로 된 역사도 모르는 무지한 인간들이었다. (적어도 역사에 관해서는)1989년은 사회주의 붕괴 원년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하나가 되어 미래로 나아가게 된 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해를 품은 달‘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품은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사상 그것을 실현시킨 체제의 본격적 출발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은 러시아라는 나라에 국한해 생각해 봐도 획기적인 사건이다. 유럽에서 가장 뒤진 나라였던 러시아가 최첨단의 사상인 사회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과거의 청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마치 중국이 공산화됨으로써 그랬던 것처럼.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마치 우리나라의 북한이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러시아도 지금보다는 훨씬 과거에 가까운 상태로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러시아혁명은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중국의 공산화가 동아시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처럼 러시아혁명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를 흔들어 버린 것이다. 그 위대한 유산은 오늘날도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혁명은 인류에게 현대를 열게 한 기준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감히 단언하는 바이다.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후쿠야마나 헌팅턴처럼.
4. 러시아 혁명의 유산을 빛나게 하기 위해
김용균이라는 젊은이가 사고로 세상을 뜨고 (2018년 12월) 1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언론 보도를 접했다. 사고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로 인해 희생되는 사람들은 오늘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교통사고만 해도 일 년에 수 천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다. 하지만 그 사고가 불가피한 ’‘사고’가 아니라 충분히 막을 수 있는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김용균의 죽음은 사고에 대한 대비책을 서로에게 미룬 기업에 의한 전형적인 인재이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그것에 대한 반성과 함께 대비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 보다 큰 이익을 얻고자 하는 마음만이 그들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남의 죽음은 나의 고뿔(감기)보다 못하다”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남의 죽음은 나의 보너스보다 못하다”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기업이라 하면 사장이나 임원들을 떠올리겠지만 그들만이 다는 아닐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지만 김용균들에게 무심했던 모든 구성원들에게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비용이 든다면 회사와 구성원들이 하나가 되어 그것을 염출할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현실을 모르는 소리일지 모르나 그러한 시도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21세기의 대한민국같이 민주적이고 풍요로운 나라에서도 이와 같을진대 19세기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오죽했을까? 노동자의 권익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 그들의 삶은 비참함의 극을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참상을 보다 못한 지식인들이 나서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마르크스였다. 그 자신도 자식들이 가난으로 줄줄이 죽어가는 비극을 맛보았기에 그 마음은 절실했을 것이다. 그의 7명의 자식 중에 10살을 넘긴 사람은 3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식들은 아버지 마르크스를 무척 사랑했고 첫 딸 예니는 몰래 가정부로 취직하여 아버지의 짐을 덜어주고자 하기도 하였다.
어떤 대학교수가 방송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미운 마음이 들어 있다”고 비난하였다. 맞는 말이다. 자신의 불행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간답지 못한 삶을 강요당하며 살아가는 한편 소수의 자본가들은 사치와 낭비를 하며 살아가는데 미운 마음이 느끼지 못한다면 양심있는 지식인이라 할 수 있을까? 미움은 바람직한 정신상태라고 보기 어렵지만 의로운 분노라는 것도 있다. 마르크스는 특정한 자본가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남의 노동을 착취하여 호의호식하는 모순을 미워한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 한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아픈 이들의 마음에 무관심한가를 스스로 폭로하는 것에 불과하다.
인류의 역사는 강탈의 역사이기도 하다. 강자는 약자를 지배하여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익을 강탈하여 왔다. 그것이 힘이든 권력이든 아니면 돈이든 관계없이 오늘까지 그러한 강탈은 이어지고 있다. 이익을 어떻게 나눌지는 과거에는 오로지 강자의 의지에 달려 있었고 그 대부분의 결과는 불공정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식인들 종교는 이를 합리화시켰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빈곤을 당연시하고 부유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논리에는 이러한 강탈의 역사가 남긴 왜곡된 정신세계가 깔려 있는 것이다.
하나의 기업이 있다. 주식회사라면 주주가 있을 것이다. 또한 노동자가 있을 것이고 소비자가 있다. 경영자 거래기업 그리고 그 기업을 관할하는 관청도 공무원도 있다. 여러 사람들 조직들이 하나가 되어 기업 활동을 지탱하고 있다. 그 중에 하나라도 없다면 기업활동은 정지되거나 큰 지장을 받을 것이다. 또한 직접적인 역할을 하지 않지만 학교가 인재를 양성해 주고 경찰이 안전을 지켜주고 국가가 도로를 만들고 각종 시설을 제공하여 기업활동을 도와주고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기업의 오너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힘으로 기업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것처럼 기업을 사유화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기업들처럼 오너라고 해 봐야 실제로 오운(소유)한다기에는 근거가 너무 빈약한(주식보유율도 극히 낮다) 경우 그들은 모두에게 경영을 위탁받은 청지기에 불과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사유재산인 냥 온갖 횡포를 부리며 이익의 많은 부분을 편취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어디 우리 나라뿐이겠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러한 현상은 세계 어디나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소비자가 없으면 기업은 성립될 수 없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은혜를 베푼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알바를 하던 어느 패밀리레스토랑(일본)에는 이런 말이 쓰여져 있다. “고객은 우리가 없어도 괜찮지만 우리는 고객 없이는 살 수가 없다”라 고. 직원이나 노동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일 해 준 덕에 기업이 생존할 수 있음에도 마치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고 그들에게 주는 급여를 자비나 은혜 인냥 생각하는 오너들이 많은 것 같다. “취업시켜 줘서 고맙다”보다 “일해줘서 고맙다”가 먼저인 것 같다. “노동자는 우리 기업이 없어도 괜찮지만 우리 기업은 노동자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가 맞는 말이 아닐까? “세상은 넓고 기업은 많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기업가의 창업과 경영의 능력과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다만 너무 그쪽으로 치우쳐 있는 가치관을 바로잡고 싶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고 정당한 대우와 노동으로 보답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 김용균의 비극도 그런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같은 노동자들끼리도 그런 점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한다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올 수 있다. 정규직이니 비정규직이니 직접고용이니 파견노동이니 하는 구분을 이유로 자신보다 약한 노동자를 무시하고 착취한다면 그들 역시 강탈의 역사에서 가해자의 오명을 써야 할 것이다.
어제 나는 스포츠경기를 직관(직접관람)하고 왔다. 내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보러 간 것이다. 아쉽게도 패하고 말았다. 아직까지는 1위를 달리고 있지만 걱정이 앞 선다. 이유는 주전 선수 2명이 부상으로 출전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전승을 달리던 팀이 벌써 3번째 패배를 당했다. 한때 가졌던 전승우승의 꿈은 고사하고 이제는 우승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나마 대신 뛰고 있는 후보선수들과 외국인 선수의 분전으로 현상유지를 하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에 부딪힌 것 같다.
우리의 인생도 이런 것 같다. 열심히 훈련을 하여 경기력을 높여 전승을 달리던 팀이(그것도 거의 압승수준이었다)주전 두 명의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이렇게 추락하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인생이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로 가득찬 것이며 그 책임은 오롯이 본인들의 몫이 된다. 우리는 인생이란 거대한 무대 앞에 조금은 겸손해야 할 것이다. 링컨의 말처럼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할 수 없듯이 인생 자체도 어쩔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인 것이다.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뿐이다.
누구나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 한다. 내가 이렇게 노력해서 이런 것을 이루었다고 하며 호들갑을 떠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면 모두가 헛된 것이 될 뿐이다. 성경에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있다. “내가 이토록 많은 수확을 거두었으니 어쩌나? 창고를 새로 지어 이 수확을 쌓아두고 먹고 마시며 살자” 라고 생각한 그에게 신은 이렇게 말한다. “어리석은 부자여. 오늘 밤 그대의 생명을 거둔다면 그 수확은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패배자가 있기에 승자가 있고 그 승리가 빛난다. 세상이 망하지 않는 한 승자와 패자는 반드시 존재한다. 대부분은 패자이고 소수만이 승자이다. 하지만 패자가 사라진다면 승자도 없는 것이다. 승자는 패자의 존재를 고맙게 여기고 그들이 계속 존재하도록 도와 줘야 할 것이다. 패자는 사라져야 할 존재가 아니라 승자와 함께 공존해야 할 존재이다. 천재가 있는 것은 천재가 아닌 평범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없는 천재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러니 세상은 천재가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천재는 하늘이 사람들에게 준 선물이지 천재를 위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또 천재라고 해도 보통사람들의 도움이 없다면 역시 무용지물이 된다. 머리만 가지고는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러시아혁명의 유산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착취를 최소화하고 공정한 분배 억압과 지배에서의 자유 자신이 자신을 지배하는 사회 등의 가치는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고 그나마 실현되었다고 해도 극히 일부에게만 주어지고 있다.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강탈의 역사의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역사는 강탈의 역사에서 공생의 역사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은 인류가 오랜 역사를 통해 이룩한 결과이기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100년 전보다 오늘 우리는 강탈의 손길을 뿌리칠 수단을 많이 가지고 있다. 앞으로 100년 동안 우리는 그것을 더욱 더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저항하고 고쳐 갈 경우.
러시아 혁명은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당사국인 소련은 다시 자본주의로 돌아갔다.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러시아는 미국과의 양강구조에서 탈락하여 기껏해야 중소강국으로 전락했다. 애당초 혁명을 안했으면 지금 더 나은 상태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러시아국민은 물론 전세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것 같다. 모든 것은 사회주의의 책임이다.
하지만 역사에는 실패가 성공으로 바뀐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갑오농민전쟁, 독립협회 등은 그 자체로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것이 31운동 419혁명 87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민중의 성장을 가져온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아이가 성장할 때 넘어지고 쓰러진다고 해서 모든 시도를 금지한다면 그는 영원히 성장하지 못 한다. 반대로 모든 성장에는 실패와 좌절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것을 극복할 때 진정한 성장이 이루어진다.
링컨은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살아남은 자의 의무를 강조하였다.
“..그 용사들이 이곳에서 한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살아남은 이에게 남겨진 일은 오히려, 이곳에서 싸운 이들이 오래도록 고결하게 추진해온, 끝나지 않은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남은 일은 오히려, 명예로이 죽은 이들의 뜻을 받들어, 그분들이 마지막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그 대의에 더욱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고, 신의 가호 아래, 이땅에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키며,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
링컨이 살아남은 자의 의무란 인류가 강탈의 역사를 종식시키기 위해 싸워온 가치이다. 그것은 이전까지 실현된 선언과 그 정신을 포괄한 것이라 하겠다. 대헌장 권리청원 권리장전 등 수 많은 선언이 계승된 것이었다. 동양에서도 비록 성격은 달라도 비슷한 취지의 주장은 여러 가지 형태로 제기되었다. 동학의 ‘인내천’ 정신 맹자의 ‘역성혁명론’은 그러한 예라 할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선언도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러시아혁명 피착취 근로인민의 권리선언
1. 러시아는 노동자, 병사, 농민의 소비에트공화국 이다.
2.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은 자유로운 민족의 자유로운 연합의 토대 위에 세워질 것이다.
3. 소비에트 국가의 기본과제는 인간에 의한 착취 폐지와 사회주의 건설이다.
4. 평화와 토지와 민족해방에 관한 대중들의 열망을 즉시 실현할 것이다.
[출처] 대헌장, 권리장전, 미국독립선언문,러시아혁명 피착취 근로인민의 권리선언 내용,본문|작성자 박수연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a12367&logNo=220967092441 에서
이러한 정신은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국가를 이룬 나라들의 건국이념에도 반영되었다.
중국국가(의용행진곡)
일어나라! 노예되기 원치않는 사람들이여!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장성을 쌓아가자
중화민족 앞에 위기는 닥쳐, 사람마다 외치는 최후의 함성 모두 일어나라!
철석같이 뭉쳐, 적의 포화를 뚫고 전진! 적의 포화를 뚫고 전진!
전진! 전진! 진!
러시아 혁명이든 중국의 공산화이든 목표는 하나 인민의 해방이었다. 인류의 역사가 추구하던 가치 ‘해방’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한 길고 긴 여정은 오늘도 한 걸음 한 걸음 이어지고 있다. 단지 육체의 해방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적극적인 의미로 성장발전 해 가면서 말이다. 우리의 민주화운동도 그런 여정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건국의 주역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전망은 밝다. 그러나 길은 험하다” 목표가 보인다. 그러나 그곳에 이르기 위해 험한 길을 가야 한다. 우리들의 선조가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 우리들의 후손들이. 하지만 피해서는 안 된다. 피하면 후퇴가 기다려질 뿐이다. 인류의 유산의 결집 러시아혁명은 새로운 제2 제3의 러시아혁명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혁명의 릴레이의 바통을 기쁘게 이어받아 다음 주자에게 전해주는 사명을 수행하자. 해방을 통해 인류의 평화와 행복이 완성되는 그날을 위해.
“전세계 민중이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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