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신조의 대한정책의 역사적 의미와 대책 -반평화주의와의 대결
에밀 졸라 ‘나는 고발할 것이다.’
“내가 고발한 사람들에 관한 한, 나는 그들을 알지도 못하고, 단 한 번 만난 적도 없고, 그들에 대해서 원망이나 증오를 품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사회악의 표본일 뿐입니다. 나의 행위는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앞당기기 위한 혁명적 수단일 뿐입니다. 나는 그토록 큰 고통을 경험한 인류, 이제는 행복 추구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인류의 이름에서, 단지 하나의 열정, 즉 진실의 빛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내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제발 저를 중죄법원으로 소환해서 공개적으로 조사해주십시요!”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nsol4755&logNo=221560419688에서
"탐욕은 욕망을 정상적으로 충족시키지 않는 것"
가지면 안 되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그것을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갖는다 .
받지 않아야 할 것을 받는다, 이것은 누가 받을 것을 빼앗는 것이다.
할 일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가 받을 것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다, 이것은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누군가가 권리를 빼앗기는 것이다.
부당한 이익은 정당한 이익을 희생한다.
부당한 권리는 정당한 권리를 희생한다.
부당한 행동은 정당한 행동을 희생한다.
서론
현재 일본과 한국 사이의 관계 악화의 직접적 원인은 물론 아베 정권의 경제제재이다. 아베 정부는 한국이 전략물자 수출을 엄격히 관리하지 않았다며 한국에 대한 무역 우대조치를 철회했다. 그러나 이것은 허울일 뿐, 진짜 이유는 한국 대법원이 징용피해자들에게 1억 원의 배상징용 피해자들이 일한 일본 회사의 한국내 자산에 대한 압류와 강제 매각을 명령한 것에 대한 보복임을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이것은 일본 측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서 식민지시대의 보상 및 배상문제는 끝났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강제징용 자체를 부정하고 있으므로 배상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배상청구는 인정할 수 없고 그것을 인정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하고 있다.
종군위안부 합의의 파기라는 것도 문제 삼고 있다. 박 대통령 때 피해자들과의 합의 없이 밀담으로 체결된 이 합의를 정권교체 후 우리 측이 일방적으로 파기했다고 일본 측은 주장하고 있다. 위안부에게 10억 엔의 위로금 지불을 목적으로 설립된 재단의 해산은 일본 측에 큰 충격이며 약속위반을 호소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베 정권은 일관되게 식민지지배, 전쟁 책임을 부정 혹은 축소할 방침을 보여 왔던 것에 있다. 이는 과거 고노담화(1993)무라야마담화(1995)김대중오부치선언(1998)에 의해서 이루어진 양국 간 신뢰를 파괴한 것이 된다. 즉 일본 측이 먼저 신뢰 관계에 상처를 준 것이다. 게다가 1990년대 일본 측이 1965년의 협정은 개인의 배상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다(국가의 배상은 해결)는 것을 표명했으므로 한국 측의 조치는 결코 약속 위반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국내법으로 배상을 원천봉쇄한 일본 측이야 말로 한일청구권협정 위반을 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언 듯 보면 위반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도 사과나 책임에 대해서는 일체 부정당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10억이 아니고 성실한 사과를 요구하는 피해자들을 양국 정상은 완전히 짓밟은 셈이다.
이러한 일들은 결국 일본이 과거사를 부정하거나 왜곡함으로써 발생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1965년의 협정에 의한 8억 엔의 지불도 결코 사과를 위한 것은 아니라 '독립축하금'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그것도 현금 지급이 아니라 물자와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결국 그들에 의해 다 회수된 셈이다. 가끔 총리 등의 사과는 있었지만 그것은 현실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않았고 –역사교육강화 등- 그나마 잦은 역사 부정,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간접적 부정, 역사교육의 부재 및 부작용 등 모든 방법에 의해서 뒤집어지곤 했다.
아베 정권은 이러한 과정을 기반으로 과거에 대한 전면 부정을 선언하게 된다.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 “강제 징용은 애당초 없었다” “한일병합은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식으로 과거의 사죄담화를 뒤집는 ‘약속위반’을 하고 있다. 경제제재는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다. '이제 두 번 다시 과거의 일을 말하지 마라.'라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다. 상대를 강제로 침묵시키기 위한 정신적 폭력인 것이다. 그런데도 겉으로는 안보를 명분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을 일본언론은 비판 없이 선전하고 있으므로, (언론통제가 극심하다) 일본국민의 대다수는 그것을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다.
왜 일본인들은 과거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근본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로 인해 우리가 정말로 싸워야 할 상대의 정체를 똑똑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상대국 국민에 대한 미움에서 해방하지 못한 채 대립을 반복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일본국민이나 일본국가가 아니라 반평화주의 세력과 싸워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 연예인과 의사와 농민의 수입격차는 공정한가?
1)세상에는 쓸데없는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쓸데없는 것이란 없어도 큰 지장은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생존 이외의 여러 가지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여러 제도와 시스템 및 직업이 있다. 오늘날 선진국일수록 더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쓸데없는 것이 일이나 사업이 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쓸데없는 것'이 '돈 버는 것'이 되는 것은 '문명화' 혹은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그러나 이런 현상은 모순적인 변화를 동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분야보다 시장가치가 높은 분야에 이익이 더 집중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시장에서 얼마나 부가가치를 가져오느냐에 따라 수입이 결정된다는 것인데 그것이 과연 공정한지 의문을 느낀다. 보통 우리는 능력과 노력, 일의 강도나 시간 등에서 수입이 결정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시장가치라는 것이 그것을 잘 반영하고 있는지는 말할 수 없다.
노벨상을 받은 학자 VS 잘나가는 아이돌 /사업가 VS 연예인 VS 의사 VS 농민
상속으로 인한 재산으로부터의 수입의 문제
3)옛날 때 봉건 시대에는 신분으로 수입이 정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배계급은 무력으로 그 지위에 오른 것이기 때문에 '강도'나 '도둑' 또는 그 자손이다.
'노예'라는 존재가 있어서 거의 무권리의 상태에 놓여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그러한 야만과 착취를 상당부분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개선한 셈이지만, 근본적인 불공정함이 사라졌다고 할 수 없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러한 불공정함은 더욱 심해진다.
4)'복지 국가'이란 이익 분배의 공정성을 최대한 실현한 시스템
최초 이익 배분 단계에서의 불공평을 누진세로 시정하고 상속을 통해 발생하는 불공평을 상속세로 시정하게 된다. 모아진 세금은 다시 국가재정 지출 과정에서 다시 불공평을 시정하는 방법으로 배분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가장 공평하게 한 것이 이른바 '복지국가' 이것은 민중이 권력, 무력, 시장의 실패 등으로 빼앗겼다고 할 수 있는 이익을 되찾는 것이다. 민중의 오랜 투쟁에 의해 확립된 민주주의의 일면인 경제민주주의인 ''복지국가'가 전 세계로 확산되었을 때, 경제적인 공정이 완성되지만 그 길은 지극히 험난하다. 문제는 이러한 '복지국가'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부자를 착취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 현실이다.
2. 국제사회는 더 불공평하다.
얼마 전 39인이 불법 이민을 시도하다가 집단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왜 목숨 걸고 불법 이민을 시도할까? 그것은 자신들의 삶을 본국에서는 향상시킬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인일까? 그들이 가난한 나라를 만든 책임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선진국 국민은 자신들의 풍요로움에 얼마나 공헌했을까? 운이 좋아 그런 나라에 태어난 것 말고 불법 이민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하면 과언일까? 지금 선진국의 풍요로움은 순전히 자신들의 힘으로 이룬 것인지도 의문이다. 국제사회의 불공평은 국내보다 더 극심한 것이 현실이다.
1) 19세기의 세계는 침략과 약탈, 지배라는 광기에 찬 시절이었다.
산업혁명은 지역 격차를 단숨에 벌렸고 그 결과 약육강식의 향연이 펼쳐졌다. '만국공법'이라는 국제질서는 있었지만 그것은 강대국 사이의 대립을 조정하는 수준이었고 그런 불공평함은 현대 사회에서도 본질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 국제법은 여전히 강대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것을 지키는 것은 불공평함의 근본적 개선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힘의 위력으로 그런 공평함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되어 있는 점에서는 본질적인 변화는 없다고 할 수 있다.
2) 우리는 테러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상식적으로 테러는 범죄이지 절대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 그것은 강대국의 논리가 아닐까 "테러는 무고한, 약한 사람들이 희생되니 더 나쁘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무조건 용서해도 되는가? 따라서 테러는 전쟁으로 말하면 일종의 게릴라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테러를 없애고자 한다면 규제를 철저하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 중심의 국제사회를 더 공평하게 하는 것이 더 효과 있는 방법이 아닐까? 강대국에 의해 착취당하는 나라들을 강대국의 협력으로 풍요롭게 해주고 힘으로 약한 나라를 짓밟는 일을 멈추는 것이다.
3) 현실은 반대이다.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고 있다.
연합군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행한 전범 재판의 본질은 패배한 나라에 대한 제재였다. 이것은 동료(강대국의)를 배신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물론 그 결과 많은 나라가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이며 의도적인 것은 거의 없다. (한반도의 두 나라) 따라서 전범재판에 대한 과대평가는 멈춰야할 것이다. 지금 현재 국제법은 식민지지배를 불법적 행위라고 규정하지 않은 것에서도 명백하다. 한국이 일본과 1965년 국교수립 때 맺어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한국 측에 주어진 8억 달러는 배상금도 사죄의 대가도 아니다. 그 이유는 한국은 전쟁상대가 아니기에 배상금을 청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4) 식민지 지배 자체는 배상을 할 불법 행위는 아니다
구체적인 불법 행위에는 배상 책임이 인정되기는 하므로 현재 일부에서 다툼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국제법의 규정이며 일본은 그것을 이용했을 뿐이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승전국은 물론 독일과 같은 패전국조차 식민지지배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며 그 자체에 대한 배상 같은 것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식민지화의 긍정적인 평가를 늘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뻔뻔한 주장이 어렵지 않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강대국의 논리로 움직이고 있는 국제사회가 얼마나 불공정한지를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런 국제사회의 질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5) 국내에 비하면 국제 사회는 공정성이란 기준에서 보면 훨씬 뒤진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국내에 비하면 국제사회는 공정성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훨씬 뒤처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제기구가 갖추어지기는 했지만 국내의 국가기관과 같은 힘은 아직 없는 것이 현실이다. 2002년 이라크 전쟁의 경우 대량 학살 무기의 존재가 전쟁의 명분이었지만 미국의 주장이 거짓임이 판명되었지만 국제기구는 아무런 제재도 전범재판도 할 수 없었다. 힘 있는 나라나 세력이 정의롭다는 것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3. 인류의 미래 때문에 제가 해야 할 과제
1)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300명이라는 사병들을 동원하고 자신의 조카의 롯을 구출하다
그로부터 천년 가까이 지난 어느 날 이번에는 군중에게 강간을 당했던 한 여성을 위한 복수 이야기가 나온다. 한 노인이 자신의 첩을 데리고 어느 마을에 들어가 하룻밤의 숙소를 구하고 주인은 허락한다. 그런데 그날 밤 동네 불량배들이 그 집에 찾아와 노인의 첩을 요구한다. 결국 그들은 그녀를 밤새도록 능욕했고 아침이 되어 노인이 깨웠을 때 이미 그녀가 죽어 있었다. 노인은 그녀의 시체를 찢어 이스라엘의 11의 부족-이스라엘은 당시 12부족의 연합으로 이뤄졌다-에 보내고 억울함을 호소한다. 이로써 11의 부족과 베냐민 부족과 내전이 벌어졌고, 결과 베냐민 부족은 거의 멸종 직전까지 갔다. 이 두 사건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했지만, 후자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 상대를 징벌했다는 것이다.
3) 인류는 이렇게 법과 질서를 통해서 악에 대한 처벌과 예방에 힘을 쏟아 왔다.
약자는 물론이지만 강자조차 법과 질서 없이 살아가는 것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회의 안전이 없이는 권력의 안정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위정자의 판단도 작용한 것이다. 오늘날 법치 사회는 이렇게 만들어진 인류의 유산이다. 국제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도 만국공법은 존재했지만 힘의 기반이 없으면 보호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용지물은 아니었다. 아무리 약한 나라라도 무조건 정복하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이고, 이를 힘의 균형이 뒷받침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 재판과 그 처벌은 바로 그러한 흐름의 연장으로 된 것이다. 그 후로 전쟁은 강대국에서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게 되었다.
4) 이렇게 인류는 강자의 약자 지배와 착취를 불허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진보를 거듭했다.
이제 국제사회도, 국내 사회도 강자의 논리만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교묘한 신제국주의 신식민지주의가 존재하더라도 세상이 진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진보의 길을 완성해야 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에 의해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행위가 용납되지 않도록 하는 한편, 국제질서 확립을 통해 강대국들의 횡포가 더 이상 합리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고 있구나.이 수 천 년간 갈고 닦고 키우고 온 인도적 정신이, 이제 새로운 문명의 밝기를 인류 역사에 비추게 되었네."(한국 3.1독립 선언서에서)
4. 미래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는 일본의 '횡포'
1) 미래로 향하는 흐름을 거스르고 있는 국가들이 아직 존재한다. 。
여전히 예전의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세력은 평화롭고 평온한 세계를 파괴하려고 한다. 대표적으로는 미국 중국 일본인데 이 삼국에는 큰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신경을 써본 경험이 없이, 오랫동안 '내 멋대로'로 살았던 나라들이다. 이웃-꼭 옆에 사는 사람이 아닌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의-라는 존재는 상당히 중요하며, 그들과의 관계로 인해 인간은 사회관계를 배우고 성숙해져 간다. 거리감이 큰 제3의 사회와도 너무 친숙하고 거리감이 거의 없는 가족과도 다른 절제와 배려가 상당히 필요한 사회가 이웃이라는 제2의 사회이다.
2) 그들에게 진정한 이웃은 없었다.
미국: 자기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두 사람을 이웃을 두었기에 신경 쓸 것도 배려할 필요도 없이 '내 멋대로'에 살 수 있었던 인간. 중국: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화체제의 중심적인 존재였던 중국은 주변 민족에게 문명을 가르치던 입장을 수 천 년간 유지하고 온 나라다. 인구, 면적 경제 등에서 18세기 중국은 명실상부 세계 최강국이었다. '제 마음대로'인 중국의 참 모습은 한국과의 관계의 역사부터 뚜렷이 나타난다. 언제나 천자의 국가로서 한반도 국가들을 이 천년 가까이 억압해 왔다, 반대로 한국은 그런 중국의 횡포 때문에 침략에 대한 꿈 따위는 애초에 있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절제와 배려를 배웠다는 의미에서 좋은 영향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한민족의 생존의 역사:대륙의 압박이 길이 된 결과
지금의 중국 지역은 청나라의 통일까지 민족의 대립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만주 지역과 한반도에 걸쳐서 활동하던 한민족은 7세기 말이 되어 두 나라-발해, 신라로 통합되었고 10세기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발해가 거란족의 요나라에 의해 멸망하자, 활동 영역이 한반도로 한정되게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다. 한민족은 이런 격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뛰어난 사회성을 습득으로 민족으로서의 생존을 이루었다. 대륙 싸움은 주로 중원이라 불리는 중국의 중심부를 둘러싸고 일어났기 때문에 한반도는 상대적으로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륙과의 관계에서 철저히 순응하는 자세를 유지한 것도 결과적으로는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한민족은 한민족의 뛰어난 문화를 열심히 받아들임으로써 문명화를 도모하여 문치의 나라를 완성하는 원인이 되었지만 이것은 절제와 배려의 완성이기도 했다.
4) 일본이 '내 멋대로(와가마마)'라고? 정말?
일본인은 항상 남에게 신경을 쓰고,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입버릇에 따지고 있기 때문에 제멋대로라는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 어디까지나 내부를 향한 이야기지, 외부에 대한 가르침은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가족 안에서의 관계에 불과했고(친척 포함) 외부와의 관계는 거의 없었-여행할 정도의 관계랄까-기 때문에 일본인은 이웃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힘이 모아지면 이웃에 대한 공격을 가했다 일본은 내부 전쟁은 반복해도 남과 전쟁은 오히려 드물다. 외부와의 관계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유럽의 전쟁은 절제 한도에서 이뤄지는 반면 일본의 외부와의 전쟁은 항상 침략으로 이어져 왔다.
5) 나폴레옹과 히틀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놀랄 만큼 큰 공통점을 갖고 있다
독일은 왜 두 번의 세계대전을 일으켰을까? 거기에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와 공통점이 있다. 독일은 일본처럼 오랫동안 분열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나라로서 다른 나라들을 접할 기회가 없었기에 -영방국으로서의 독일이 아니라 제국으로서- 독일'은 사회성을 성장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큰 힘을 가진 것이 전쟁으로 이어졌다. 나폴레옹과 히틀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놀랄 만큼 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미미한 신분에서 일어나 영웅이 된 것이다. 원래라면 손에 넣을 수 없는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 프랑스와 일본은 그 뒤가 완전히 다르다. 독일과 프랑스는 주변의 견제가 계속되는 가운데 절제와 배려를 몸에 익혔다. 일본은 도요토미들의 실패에서 절제와 배려를 배우지 못했다. 그러니까 270년 후 다시 조선 침략을 시도하게 된다. 주위의 견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멋대로'는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상당한 시련과 제재와 고민 끝에 겨우 없어진다.(일본어로 시츠케가 필요하다)
6) 일본의 '버릇'은 패전에서도 낫지 않았다. 숙취만으로는 술을 끊을 수 없다.
세계대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이유로 일본인의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진 상대는 중국이나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었다는 점이다. 미국이 냉전구조가 나타나면서 전범국가 일본을 동맹국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일본은 전쟁이나 침략의 책임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또 하나는 중국과 한국이 약해서 무시할 수 있었다는 것 그것도 독일 주변 강국의 존재와는 대조적이다.그리고 일본은 다시 '내 멋대로'를 발휘하려 하고 있다. 이번이 네 번째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완전 실패, 세 번째는 꽤 성공했지만 결국 실패였다. 이번에는 든든한 구석이 있다.그것은 세계 최강국 미국과의 동맹이다. 영일동맹으로 강대국 러시아를 꺾고 세계 열강의 자리에 오른 길을 다시 한번 걸으려고 한다. 일본은 정치 군사대국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웃나라에 대한 배려와 절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내 멋대로'라고 할 수밖에 없다.
7) 일본의 위험한 선택
한국과의 관계 악화에는 이러한 일본의 '내 마음대로'와 그에 따른 모든 정책이 그 배경이 된다. 징용 문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역사 문제 등에 발목을 잡히면 큰일이기 때문에 한국을 길들이는 정책을 계속 실시한 것이다. 일본의 선택은 위험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를 압도할 만한 강국이 아니다. 게다가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것을 내걸고 노골적으로 '내 멋대로'를 실현하고 있다. 세계의 평화와 통합이라는 큰 흐름에 맞서는 것이다. 마치 옛날 독일처럼 되어가는 느낌이 든다. 그것을 일본이 따라간다는 것은 과거 독일에 그렇게 함으로써 파멸에 빠진 것과 겹치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8) 수준 너무 낮은 일본의 '내 멋대로'에는 한도가 없다.
"일본은 세계에서 특별한 국가이다. 전세계가 존경하고 의존할 수 있는 나라도의대국을 지향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라고 확신한다.(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전 방위상)
명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엘리트인 변호사이자 방위 대신이라는 각료를 역임한 사람의 발언. 마치 유치원 원아가 "우리 엄마의 요리가 제일 맛있고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멋있다"는 식의 유치함이 느껴진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수상 소감으로 '아름다운 일본'을 말했다. 노벨상을 탈 정도면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일 텐데 이런 수준 낮은 말을 하다니 믿을 수 없다. 자위대의 궐기를 호소해 자살한 미시마 유키오 정도면 언급할 가치도 없다. '내 멋대로'에도 한도가 있다. 일본서기부터 시작해 에도시대의 국학으로 체계화된 '내 멋대로'는 일본인이 극복해야 할 큰 벽으로서 오늘도 일본 사회에 어두운 그늘이 되어 있다.
5. 한국인은 나치 시대의 유대인의 입장 무차별적인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
1)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좋았다.'(무토 마사토시武藤正敏 전 주한 대사)
한 나라의 대사까지 한 사람이 자신이 주재하던 나라를 모욕하는 제목의 책을 쓴 것은 문제이다. '일본인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책이 나왔다고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매운동을 국가가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은 의외로 많은 것 같다. 불매운동은 나라와 어떠한 관계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Yes Japan No Abe' 한국인은 일본인을 미워하지 않는다. 단지 아베 총리의 반일적인 정책에 반감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일본인들이 헤이트 스피치를 통해 ’한국인을 죽여라'라는 극단적인 말을 하는 것처럼 ‘일본인을 죽여라’라는 스피치는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다.
일본 여중생 "난징 대학살이 아니라 쓰루하시 대학살을 실행하겠습니다"
재특회: 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의 약호인 이 단체는 재일교포와 조선인의 특별한 지위에 분노를 표현하는 것에서 출발해 지금은 한국에 대한 공격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 재일한국인과 조선인의 특별한 지위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사과와 책임의 의미가 큰 상징적인 것이다.
2) "한국에는 거짓말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없을까?"(켄트 길버트)
일본인들은 한국인이 거짓말하는 것에 죄책감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재일 미국인이 이런 얘기를 하는 정도니까 얼마나 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는 것을 목격했다. 유학하자마자 1989년 일본은 리크루트 사건으로 들끓었다. '비서가 했다'는 말에는 어이가 없었다. 비서가 의원의 허락 없이 뇌물임이 확실한 돈을 받을 수 있을까?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일어난 한국의 촛불혁명은 한국인이 결코 거짓말을 긍정하는 국민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권력자들의 거짓말이 원인이었던 혁명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아베 일본 총리는 이른바 '학원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총리 자리에 버티고 있다. 한국인이 결코 착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거짓말을 좋게 생각할 만큼 사악한 민족이 아니다.
3) "한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
현재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비판이다. 짧게 보면 위안부 합의의 사실상 파기, 징용공 재판 등이 길게 보면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이것도 '내 멋대로'한 비판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자신들이 옳다는 전제 아래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이다. '일본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일본인은 약속을 절대 지킬 것이다'는 확신이 그 아래에 놓여 있다. 이는 나치 독일도 기본적으로 닮고 있다. 근거 없는 민족적 우월감, 자존심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이 된다.
일본인은 지금까지 반복해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조선 말기 일본은 거듭 한국에 '독립국'임을 약속했지만 결국 지키지 못하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1990년대의 고노 담화(1993년)무라야마 담화(1995년)1998년 오부치 김대중 선언을 통해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를 했지만(2010년 간 담화에서 확인)최근 그것을 거의 바꾸어 발언을 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거듭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한국이 사과를 요구한 것이 양국 사이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상 요구는 적어도 국가 수준에서는 1965년 이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징용공 경우 개인의 배상요구이며 이는 1965년 청구권협정에 의해서 제한된 것은 아닌 것은 일본 측도 거듭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단 하나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는 분명히 한국 측에 책임이 있다. 일단 정상끼리 합의를 한 것이니 지켜야 할 것은 분명 틀림이 없다. 그러나 더 넓고 오래 보면 일본 측의 책임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1990년대의 담화와 선언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를 확실한 약속이다. 그러나 위안부 합의에 이는 빠져 있다. 그리고 아베 총리는 위안부에 대해서 "스스로 성매매를 하고 갔다"라는 발언을 되풀이하면서 1990년대의 담화를 부정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일본인에게는 이런 경위를 모르는 것 같다.
4) 한국인에 대한 비판은 옛날 나치스 독일의 유대인 비판에 상당히 닮았다.
일본인들의 비판은 "뛰어난 우리가 보면 너희들은 인간쓰레기"라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격부정이라는 가장 비열한 방법이다. 유대인, 한국인은 근거 없이 인격 부정적인 비판을 받은 것이 공통적이다: 유대인은 노벨상을 30% 수상, 인류에 큰 공헌을 하였음을 의미. 한국은 천 년이상 아 그 나라를 침략한 적도 전쟁을 일으킨 적도 없는 평화적인 민족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자신들의 우월감을 증명이라도 하려고 유대인과 한국인을 괴롭혔다. 일본의 과도한 민족주의-거의 종족주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나치의 그것과 상당히 가깝다-에 기초한 우월감과 과거 오류의 역사 부정, 특정 민족에 대한-이 경우는 한국인-경멸적인 태도는 나치 독일의 면모를 느끼는 것과 같다. 바로 일본은 인류의 문명이 이룩한 평화로운 세계로의 흐름을 거스름으로써 또 한번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가?
5.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사람이 없는 반 평화 주의
1) 드레퓌스 사건의 교훈-민주화에 희망을 갖는다
대학 3학년 때 우연히 나는 드레퓌스 대위의 사건을 알고 '민주주의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한국은 사실상 군부독재 아래 놓여있었고 민주주의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고 여겨졌다. 김대중이 반란의 죄로 사형을 선고되는 한편 군부에 의해 권력이 쥐어져 그 결과 민주화의 꿈이 거품처럼 사라졌다. '드레퓌스 사건'을 안 순간 희망이 생겼다. '원래 민주주의에 적합한 나라 같은 건 없는 것이다. 프랑스에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있었으니 '마음속으로 이런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 '드레퓌스 사건'과 같은 사건은 그 당시 한국에서는 흔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한국에도 반드레퓌스파처럼 인권과 민주주의보다 안보나 국가의 권위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2) 국경을 넘어 지켜야 할 가치 때문에 싸운 사람들!
드레퓌스 사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에밀=졸라의 활약이었다. '나는 고발한다'라는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여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으나 결국 가스폭발이라는 사고로 의문의 마지막을 맞았다. 민주주의 자체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을 때의 그의 활약은 오늘날까지 민주화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에밀=졸라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그것은 프랑스에 국한된것이 아니다-이 나라와 민족을 넘어 연대하여 싸운것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프랑스혁명을 경계하고 연합한 유럽국가들에 민주주의는 침투했고 마침내 그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국제적 민중의 연대가 생긴 것은 많은 사람들의 피눈물 땀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내 평생 지키려고 했던 것은 국가가 아니다. 그것은 진실이야“ "(리영희)
드레퓌스 사건으로 연대한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들도 진실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 발언은 그들의 용기있는 행동이 남긴 유산이 아닐까 생각된다.
3) 드레퓌스 사건의 역사적 의의
유시민은 이 사건을 그의 저서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1. 진실과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 2. 군부의 권위보다 문민의 우위를 확립했다.
3. 지식인의 힘의 가치 4. 19세기의 가치관(군국주의)과 20세기의 가치관(공화주의)의 충돌
여기서 가장 주목할 것은 1과 4이다. 민중의 국제적인 연대는 지켜야 할 가치를 위해 결성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국가나 민족을 초월한, 이러한 가치를 중심으로 한 연대가 요구되고 있다. 권력과 국가는 그 자체가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에 국민들이 속아 필요 없는 미움을 서로 갖게 되어 자신들의 목숨이나 재산, 가족을 잃는 것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드레퓌스 사건은 그런 어리석음을 버리고 바로 그것을 극복한 좋은 사례였다.
4)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반평화주의
일본과 한국의 민중은 국민으로서가 아니라 지켜야 할 가치를 위해 민중으로서 싸워야 한다.그것은-평화주의 대 반평화주의(침략주의)의 싸움- 드레퓌스 사건이 남긴 위대한 유산을 이어받는 것이다. 침략과 지배, 차별, 살육 등이 국가나 민족의 이름으로 혹은 한 집단에 의해 행해진 낡은 시대의 가치 대신 새로운 가치-평화, 안전, 평등, 공평, 공정, 인류애 등-이라는 유산을 지키고 확대해 나갈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다. 드레퓌스 사건은 결코 과거의 일이 되어 박물관이나 역사 교과서 속에 갇혀서는 안 되는 현재이다. 과거를 모르는 사람은 현재에 대한 인식도 불완전해지기 쉽다.
E·H·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은 "과거에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에도 맹목이 된다"고 말했다.
6. 일본 한국의 화해의 길
1) 에밀=졸라의 용기와 행동이 필요한 일본인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본인들은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받은 역사교육은 매우 과거를 현재와 대화할 수 있도록 하는 수준이 아닌 것 같다. 결국 그것은 '현재에 대한 맹목'을 가져왔고, 심지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태로 만들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계속 말하는 것도 이러한 무지의 무지에 의한 것이지 결코 그들이 사악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일본인은 구원해야 할 대상이기는 해도 미워할 수 없는 대상이다. 일본인들의 대부분은 전쟁이나 식민지 지배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밖에 모른다"며 無知무지한 지 '의 소중함을 주장했지만, 그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보거나 듣기도 한다. '무지한 무지'에서 일본인들을 '무지한 지'로 이끌어 진실을 깨어나게 하는, 진정한 지식인들이 활약해야 한다. 에밀=졸라나 이영희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던 진실이 드디어 펼쳐져 역사를 움직였듯이, 세계의 변화도 처음에는 한 인간에게서 시작됐다는 것은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상식이다.
"평화가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평화가 없으면 어떤 것도 불가능합니다.” (빌리·브란트 전 서독 총리) 전범 국가 독일이 유럽의 중심국가가 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은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이다. 그가 실시한 '동방정책'은 냉전 구조 속에서 동서 사이의 긴장 완화를 가져오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의 길을 열었다.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의 브란트'-'인간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브란트)-는 독일이 전쟁에 의한 잘못을 얼마나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결단은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독일을 구한 용기 있는 행동으로 칭찬받고 있다.
2) 일본의 브란트는 있을 수 없는가?
그것은 일본국민의 마음과 행동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만약 당시의 독일(정확히 말하면 서독)에 반성과 사죄에 대한 사고가 없었다면 혹은 미미했다면 브란트의 결단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꿈을 꾸면 그것은 꿈이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징기스칸) 일본인의 다수가 아니 의사와 행동력이 있는 일부가 같은 꿈을 꾸면 "산이 움직이는 기적"(노무현 전 대통령)(우공 이산) 할 수 있다
"나비가 떨어져 천지진동의 소리가 난다" (아사야마 마사하루목사) 아마존 나비가 한번 날갯짓을 하면 미국에서 토네이도가 일어난다" (나비의 효과)
영웅은 시대가 만든 무대에서 주어진 미션을 완수하는 존재이다. 그 무대를 만드는 것은 신의 몫이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평범한 개개인의 몫이다. 그 개개인은 진실을 믿는 사람들이다.
3) 조국 사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 정도면 이제 특히 사퇴했다"고 일본인들은 말한다. 그럼 들어보자. 일본인들은 오명을 각오하고 신념을 관철하려 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국민이 그것 때문에 촛불을 들고 싸운 적이 있는가? 메이지의 일본이 대단했다면 그런 힘이 있었던 것이다. 자유민권운동, 대정정변과 대정데모크라시를 가져온 것은 그 무대를 만들어 준 민중의 힘이다. 그러나 전후 한 번이라도 그런 일이 있었는가. "메이지의 정신을 되찾자"고 외친다면 그 정신을 되찾기 바란다.
한국은 그런 의미에서는 일본의 모델 내지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조국 사태는 민주주의의 성숙이 없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를 지지하는 것이 실수라고? 그것이 실수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민주주의는 실수도 용서하는 것이다.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정답만을 강제하는 사회는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 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모순은 반민주주의까지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4) 킹, 링컨의 마음을 가질 한국
한편 한국인에게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에이브러햄 링컨처럼 가치를 위해 상대를 포용하는 것이 요구된다. 킹 목사는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역사적인 연설을 통해 백인들의 잘못을 엄중히 비판하면서도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살색 등으로 차별받지 않는 세계-의 길을 가자고 제의한다. 그 연설에서 비판받는 것은 백인이 아닌 오래된 가치관에 의한 차별이며 목표로 하는 것은 차별 없는 공평한 세계이다. 링컨도 남부 행위에 대해 따끔하게 비판하지만 그가 강조한 것은 역시 지향해야 할 가치이다. 게티즈버그 연설에서는 자신들의 조상이 이룩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살아남은 자신들의 사명인 것을 말한다. 2번째 취임사에서도 "땀을 흘리지 않고 손에 한 축적이 사라진 것은 신의 뜻이었다"라고 하면서도 "누구도 원망하지 말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과 해서 새로운 가치에서 새로운 미래로의 출발을 말했다.
5)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이어져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과거사의 교훈을 현재에 살려 미래로 가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미래로의 길이다. '지난 것은 물에 흘려보내자'라는 방식으로는 밝은 미래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죄의식만 강요한다면 우리는 과거에 얽매여버리니까 역시 밝은 미래는 오지 않는 것이다. 싸울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 반평화주의임을 분명히 기억하고 새로운 가치로 미래를 향한 성전을 이겨내야 한다.
6) 일본과 한국의 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제안
일본 측의 의무
1. 일본의 역사 교육의 근본적 개혁
역사에 대한 올바른 반성에 기초한 역사교육을 통해 일본의 후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 다시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는 한국에 대한 반복되는 망언이나 망령스러운 행동을 예방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2. 천황의 진심 어린 사죄
천황은 일본의 상징적인 존재이자 형식적이긴 하지만 국가 원수이다. 천황의 정치적 행위는 금지되어 있지만, 이것은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역사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천황의 전쟁 책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3. 망언 등에 대한 처벌을 법적으로 보장하라.
독일처럼 과거의 죄를 부정하는 망언에 대해 법적인 처벌을 명문화하고 이에 대한 결연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독일은 과거사에 대하여는 언론,자유,집회 결사의 자유를 억압해도 좋다고 할 정도로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했고 이는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현재 일본에서는 헤이트 스피치를 법적으로 제재하고 있으며 표현의 자유가 무제한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원리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타국에 대한 명예훼손도 마찬가지) 이러한 법적 제재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생각은 사안의 중대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의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이나 타민족의 생존권과 존엄을 해치면서까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필요는 없다.
4. 재일 교포 법적 지위
식민지배 역사에 의해 발생한 그들에게 영구히 현재와 같은 법적 지위를 보장한다. 이것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AS이기 때문에 당연히 요구된다.
·5. 올바른 역사 인식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고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노력하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특급 전범의 위패를 철거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불법으로 가져간 모든 문화재의 환수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일본 내의 과거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미화·합리화하는 내용의 서적이나 각종 기념물 등을 모두 제거하고, -역사적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보관하는 것은 허용하고 이를 활용해 반성의 재료로 삼는다 -이후 일어날지도 모르는 복고의 가능성을 뿌리 뽑는다.
한국 측의 의무
1. 한국 내의 근거 없는 반일 교육의 청산
과거사에 대한 객관적인 교육은 유지되어야 하지만 일본에 대한 근거 없는 비하나 비하를 가르치는 일이 없도록 교육을 혁신해야 한다.
제국주의 역사-일본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에 열강이 세계를 분할 하는 만행을 저지른 점을 강조하여 일본의 죄악을 상대화시키는 필요가 있다. 그런 가운데 일본이 어떻 게 우리에게 잘못을 저질렀는지 조명하면 보다 객관적인 비교 분석이 가능해질 것이다. 동시 에 일본에 대한 불필요한 증오감을 감소시킬 수 있을 것이다.
독일과의 비교 - 일본과 독일의 역사적 경위와 상황을 올바르게 비교하여 왜 차이가 있었는지 객관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오해를 갖지 않도록 한다.
2. 역사 교육에서 일본 부분 강화
일본을 상대적으로 비난한 부분을 수정하고, 너무 작은 비중을 크게 하여 일본의 역사에 대한 이해수준을 높인다. 일본은 문화도 없는 야만국가 라고 하거나 사무라이만 강조해 폭력성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는 것은 시정돼야 한다. 또한 고대사에서 우리가 문화를 전수한 것을 너무 강조하여 불필요한 우월감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3. 일본에 대한 망언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법적 조항을 신설
‘쪽빠리“ ”왜놈“과 같은 비하적 언어의 금지 등을 포함해 일본에 대한 비하적 행동이나 언어 등을 법적으로 제재한다.
4. 개인 배상 문제의 한국 내에서 처리
개인 배상을 계속 법정에서 다루되, 그 결과에 따른 배상은 우리 정부가 주도해 과거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 혜택을 본 기업-포항제철 등-과의 협력으로 조성한 기금에 의해 해결한다. 일본측은 진심 어린 사과와 그에 따른 행동으로 책임을 면제해주자.
공동의 의무
1. 역사를 비롯한 교과서 제작에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상호 존중의 원칙이 유지되도록 노력한다.
2. 비자에 대한 면제를 강화하여 유학, 취업 등에서 내국인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다.
동아시아 공동체로 가기 위한 전제로서 이를 실현한다. 이는 서로의 인적 교류를 강화해 양국 국민의 화합을 각 뿌리 차원에서 이뤄낼 수 있다는 조건이 될 것이다.
3. 상대의 문화와 풍습 등에 대한 이해를 돕는 활동을 강화하고 문화적 충돌을 최소화한다.
4. 학교, 회사, 지역 사회 차원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5. 경제적 장벽을 전폐하거나 최소화하고 하나의 경제권으로 탈바꿈함으로써 양국의 경제 발전에 대한 최상 효과를 누리도록 한다.
6. 양국의 대외 관계에 관한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서로의 이해를 최대한 존중한다.
7. 스포츠·예술 등의 교류를 활발하다.
스포츠 리그의 교차적 통일을 통해 정기적으로 교류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예술-국내처럼 공연 교류를 할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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