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이순신 장군의 올바른 판단 – 섣부른 화해에 대한 경고

닥터 양 2019. 10. 29. 19:37

 이순신 장군의 올바른 판단 섣부른 화해에 대한 경고  

 “되도록 많은 일본군을 죽여야 그들이 다시는 이 땅을 넘보지 못할 것이다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일으킨 7년간의 전쟁이 끝나갈 무렵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부하들을 독려하였다. 종전협정을 맺고 조용히 떠나길 바라는 일본군에겐 청천벽력같은 소리이고 아군에게도 그것은 쓸데없는 희생을 가져오는 무모한 주장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필자 역시 과거에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갖는 한계-무장으로서의 집착-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전쟁이 끝나고 한일관계는 급속히 회복되었다. 그리고 280년의 공전의 평화가 양국 간에 유지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오랜만에 나타난 장기간의 평화였다. 하지만 생각해 볼 게 있다. 왜 이 평화가 가능했을까? 그것이 이순신의 무모함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기성이 농후한 강화조약을 맺고 무사히(?) 돌아간 일본군이 정유재란으로 다시 이 땅을 짓밟은 점을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이 전부거나 결정적인 요인은 아닐지 모르나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에는 이순신 장군의 이러한 생각이 그다지 환영받기 어려운 풍토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한 만큼 갚는다는 식의 생각보다는 인의적 도덕윤리로 교화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는 오랜 세월 성리학적 윤리가 우리들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도망가는 적을 끝까지 추적해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죽이려 했던 이순신 장군의 시도는 조금은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관대함이 가져오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알베르 까뮈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에서 벌어진 부역자처리논쟁에 대하여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늘의 범죄자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은 내일의 범죄자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다 라고 하여 이 논쟁을 종결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우리가 친일분자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오늘날까지 그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프랑스의 불관용정책이 상대적으로 현명하게 느껴진다.

  물론 우리라고 해서 늘 관대하고 인자하게 적대세력을 대한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당쟁사를 살펴보면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연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대방의 언행을 트집잡아 역모’ ‘반역등으로 몰아 본인은 물론 그 가족까지 처벌하던 모습에서 성리학적인 도덕윤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도리어 일본이 그 점에서는 인자하고 관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천하를 쟁취했던 세키가하라전투가 끝나고 핵심적인 적대세력인 이시다미츠나리나 고니시유키나가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적에게 최대한 관용을 베풀어 준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 같으면 삼족을 멸할 일이 아닌가?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한일 양국의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찍히 통일국가를 이루었기에 문치국가가 되었고 따라서 대외적인 정책은 팽창이 아닌 현상유지적인 면이 강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것은 지배층이 대외적이 팽창이나 강경책으로 인해 국가의 안정이 흔들릴 경우 자신들의 기득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지배층은 안정된 토지소득에 기반한 세력이니 굳이 대외적인 모험을 할 동기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건물주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된다. 그들이 벌인 다툼은 기득권 다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정치로 귀결된 상태에서 정치권력의 다툼은 필연적이었고 그로 인한 싸움은 처절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무력을 소유한 세력 간의 분열 시대가 길었기 때문에 권력다툼에는 한계가 있었다. 조선의 권력다툼이 권력을 둘러싼 다툼이기에 권력을 쥔 자는 상대를 무자비하게 숙청할 수 있었다. 어차피 그것을 실행할 힘은 권력자에게 돌아가고 상대는 완전한 무방비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은 무력을 가진 세력끼리 대립을 하니 상대를 함부로 숙청하기가 어려웠다. 도쿠가와이에야스가 관용을 베푼 것은 그가 선해서가 아니며 일본사람들이 보복을 좋아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그렇게 했을 경우 생기는 반작용이 두려웠던 것이다. 내 손에 칼이 있지만 상대에게도 칼이 쥐어져 있는 상태에서 무자비한 숙청은 자충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란 이러한 역학관계 위에서 만들어진 결과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대외관계가 되면 이러한 역학관계는 변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대외적으로 관용을 베풀 이유도 동기도 없다. 약한 상대는 무자비하게 짓밟으면 되고 강한 상대라면 머리를 숙이면 되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게 비굴할 정도로 머리를 숙이면서도 우리에게는 강경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서 그러한 특징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국내에서처럼 세력균형의 원리를 적용해 약자에게도 어느 정도 배려를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라 하겠다.

  이것은 유럽국가들의 그것과도 대조적이라 하겠다. 프랑스의 부역자처벌은 무력이 통합된 사회이기에 가능하다. 그 점은 우리와 유사하다 하겠다. 하지만 프랑스가 무력을 통합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그들은 1789년의 대혁명이래 100년 가까운 세월 내전에 가까운 싸움을 거쳐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까뮈가 말하는 공화국은 관용에 의해 세워지지 않았다는 말은 그것을 의미한다. 파리꼬뮌의 투쟁시 공화파와 왕당파는 피비린내는 전투를 벌였는데 가히 내전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경험이 없다. 419혁명, 87민주화운동 그리고 촛불 혁명 모두가 평화적 투쟁에 의해 결과를 얻었다. 뿐 만 아니라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는 1000년간 내전에 의한 정권교체는 없었다. 그들에게 권력자의 숙청-정쟁의 숙청이 아니라-익숙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친일분자들의 숙청이 불가능했던 것은 이러한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유럽국가들은 국가 간의 치열한 세력다툼을 통해 세력균형을 고려한 절제를 배웠다. 이는 일본과는 다른 점이다. 일본은 고립되어 외부로부터의 압박에 시달린 적이 거의 없기에 그런 것을 배울 기회를 가지지 못 했다. 사회성이 결핍된 나라라 할 것이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유럽국가들은 점차 다른 대륙으로의 팽창에 몰두하게 되고 대륙 내부의 전쟁은 소모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19세기 제국주의시대가 열리자 그러한 경향은 더욱 커졌다. 유럽판전국시대는 외부로 관심을 돌리게 됨으로써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반대로 유럽내에서 패권을 노리는 세력들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나폴레옹 히틀러는 그 대표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유럽은 대륙 밖에 대하여는 무자비하게 행동했다. 대륙자체가 사회성이 결여 되어 있던 셈이다. 자신들의 종교 문화 인종이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세계를 유린하며 다녔고 결국 19세기 말 대부분의 세계에 식민지를 소유하기에 이른다. 산업혁명으로 쌓아올린 경제력과 군사력은 이를 견제할 세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막강했다. 심지어 세계최고의 국력을 자랑하던 중국마저도 그들에게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유럽 내 질서는 어디까지나 내부적 질서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본이 한 발 밖으로 나가면 표변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유럽의 통합은 그러한 경험이 주는 교훈을 최대한 살린 결과라 하겠다. 마치 도쿠가와막부가 300년 가까이 평화를 유지한 원리와 같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선인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 전쟁을 거치며 얻은 지혜의 실천인 것이었다. 소모적 전쟁은 그만 두자는. 막부는 중앙권력기관이 아니라 이를 감시하는 평화유지군으로서의 역할을 한 셈이다. 유럽연합 역시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독일의 반성과 사죄는 그러한 가운데 가능했던 것이다. 어느 나라나 이상주의자가 존재한다. 독일에는 아마도 일본보다는 더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존재할 것 같다. 하지만 히틀러의 집권과 전쟁 유대인 학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런 이상주의자의 존재가 곧 평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패전에 의한 외압이 강하다면 그들의 목소리가 보다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어 평화주의가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이 역시 어느 의미에서는 사회적인 역학관계라 하겠다.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1인까지가 예외라고 했듯이 우리는 오랜 세월 대외적으로 관대함을 보여 왔다. 특히 일본의 경우 그렇다.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사건이고 삼포를 개방하고 그들에게 관직과 식량 각종 물자를 주면서 일본을 달랬다. 도요토미의 침략 후에도 매우 관대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고 조선통신사를 꾸준히 파견해 선린외교를 실현해 왔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러한 관대함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그들에 대한 엄격함은 상당히 약해지기 때문이다. 750만의 관광객이 일본을 방문한 것은 그것을 상징한다 하겠다.

  하지만 그러한 관대함을 대가는 네 번에 걸친 도발을- 적게 잡아서이다- 가져왔다. 2000년 한일관계사는 일본에게 시달린 세월이었다. 이낙연 총리는 “1500년은 좋았고 나빴던 것은 50년 정도라고 언급했지만 50년이라는 숫자도 잘못되었지만 1500년의 평화 역시 한국쪽에서 배려하고 달래는 관대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일본은 그러한 관대함을 권리로 여겼고 그것이 사라지면 우리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배려가 계속되면 권리가 된다는 말이 틀리 지 않음을 말해준다.

  일본의 대외적 태도의 배경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무조건적인 관대함이 결코 문제 해결의 최선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란 힘의 균형을 전제로 하며 우리처럼 성리학적 윤리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 와가마마(멋대로 함)는 주변의 견제를 받기에 절제되는 것이지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어긋나기에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비교적 약하다. 그것은 일본이 보편종교의 세뇌를 받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는 500년 조선왕조를 거치며 성리학적 윤리가 자리 잡았고 문제는 이를 실천하게 할 힘의 균형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관대함은 그들의 와가마마를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것이다. 가뜩이나 윤리적 기반이 약한 일본이 견제를 받지 않게 된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할 것이다. 철학과 문학 예술로 무장한 독일조차 그렇게 했는데 일본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윤리 도덕 이상주의는 견제를 전제로 성립된다. 독일의 잇따른 변신은 그러한 진리를 말해준다. 같은 독일인이 백년도 안 되는 사이에 급속히 변화를 거듭한 것은 견제를 갖춘 이상주의 윤리의 존재 여부에 달린 것이다.

  일본은 그러한 변화의 기회를 제대로 부여받지 못했다. 2차 대전의 패배는 그들이 거의 처음 맞이한 변화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견제를 받지 못한 이상주의는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중국이나 한국 등의 제대로 된 견제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승전국 미국에게도 지나치게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그것은 미국의 극단적 실용주의 이 나라 역시 윤리도덕적 기반이 약하다-와 냉전의 격화로 인한 것이었다. 독일처럼 변화를 해야 할 동기도 필요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일본 내 이상주의 세력은 몰락하고 침략주의적인 세력이 힘을 얻었다. 그것이 오늘의 아베정권을 지탱하는 기반인 것이다. 일본을 하나의 인간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과거의 잘못을 망각하고 다시 범죄에의 유혹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멈추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의 대부분이 범죄를 긍정하는 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보수세력은 또 다시 관대함을 요구한다. 지난 천 년간처럼. ? 그게 자신들의 삶에 위험요소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까. 관대함으로 피해를 입어도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민중의 몫이며 그들의 피해는 일시적인 것이다. 적어도 계급적 기득권은 유지된다.

  하지만 일본은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일까? 절대로 아니다. 물론 그렇게 받아들이는 개인들은 상당히 있을 것이다. 일본사람들 개인들은 우리보다 그런 점에서 낫다. 그들은 견제와 균형 속에서 절제하는 능력을 몸에 익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정쟁으로 물든 역사를 가진 우리보다 허울 좋은 성리학적 이념은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그런 점에서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일본이라는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우리를 접할 때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이다. 아마 너희가 그러면 그렇지라고 받아들이고 쾌재를 부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지난 2천 년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답은 나온 셈이다. ’견제를 동반한 이상주의(포용)‘만이 유일한 길이다. 견제가 빠져도 안되고 이상주의가 빠져도 안 된다. 전자가 없으면 일본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후자가 없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두렵다. 분명한 것은 어쩌면 이것이 양국 간에 존재한 기울어진관계를 정상으로 돌려놓을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1965년의 과오를 되풀이 해서는 안 된다. 눈 앞의 이익이나 피해를 염려한 나머지 또 다시 기울어진 관게를 유지하면서까지 관계회복에 매달린다면 언젠가 이 문제는 또 다시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독일만이 아니라 유럽도 그런 식으로 변한 것이다. 세계대전과 식민지의 저항 냉전이라는 외압이 겹쳐 그들은 유럽연합을 통한 이상주의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물론 내부는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음은 이번 브렉시티 사태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020년 아니 100년이 걸려도 좋다. 우리는 내부적인 힘을 길러 피해를 최소화하며 제대로 된 관계수립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로 인한 피해를 감수하는 것이 한반도라는 지역에 태어난 사람들의 숙명이라면 과감히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나를 괴롭히는 인간에게 제대로 된 경고나 압박을 주어 그것을 막는다면 그 과정은 다소 힘들어도 더 오랜 시간의 평안이 주어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지금 우리는 그러한 기로에 서 있다. 그냥 일시적인 편함을 위해 또 다시 장기간의 고통을 감내할지 아니면 잠시의 고통을 견뎌내어 긴 평안을 누릴지 선택해야 할 시간이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고 한 티브이 광고가 있지만 이는 수 백 년은 족히 갈 순간의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마시멜론을 먹지 않고 참으면 한 개 더 먹을 수 있고 그것을 참은 아이들은 성공적 인생을 살았다. 화해의 마시멜론을 조금 참으면 한일관계의 정상화라는 성공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