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모 선생의 일본이야기(14) 아베의 횡포와 싸워야 할 이유
(1)부당한 외압을 이용해 자국정부를 공격하는 보수파의 매국행위
일본의 경제제재에 대하여 마치 환영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세력들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양비론을 주장하는 것 같지만 아베정권에 대한 비판은 지극히 형식적이고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은 엄청난 강도로 행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언제부터 우리 언론이 민족주의를 떠나 보편적인 가치를 내세워 자국을 비난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아마도 마음에 들지 않는 좌파(?)정권을 이번 기회에 손 봐주겠다는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겉으로는 국수주의를 벗어난 냉정한 대응 같지만 속은 전혀 다르다. 일본언론이 아베의 정책을 비난하는 것은 국익을 위한 충심 어린 비판이라면 한국 보수언론과 정당의 비판은 국제적인 외교 문제를 국내정치에 이용하는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하기야 그들은 이 정부가 망가질 수만 있다면 대한민국에 어떠한 재난이 닥쳐도 좋겠다고 생각할 기세이다.
지난 번 판문점 회동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남북과 미국의 지도자가 함께 모여 훈훈한 시간을 보냈고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김정은과 함께 걸었다는 것 자체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그런데 보수언론과 정당은 “핵폐기 약속을 받지 못했으니 의미가 없다”고 평가절하했다. 마치 몇 번의 데이트로 결혼 약속을 받지 못했으니 무효라는 것과 같다. 당신이 북한 지도자라면 그렇게 쉽게 핵폐기를 약속할 수 있을지 상상해 보라. 그런 북한을 시간을 들여 꾸준히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문재인정부가 하고 있다.
상상력이 부족한 보수는 언제나 만남=연애=결혼 심지어 잠자리 라는 단편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성적 스캔들을 많이 일으킨 것도 이런 상상력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싶다. 이성만 보면 다급하게 욕망을 채우겠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있는 것 같다.그야말로 천박하고 저질스럽다. 어느 인물은 상상력으로 남북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현실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뭔가 큰 착각을 하는 듯 하다. 상상력이란 그가 말하는 감상주의는 아니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꿈을 말한다.
현실만을 따라가는 자에게 새로운 미래는 절대 열리지 않는다. 그들이 떠받드는 기독교 지도자 조용기 목사의 말이니 새겨듣기 바란다. “꿈을 꾸는 자가 미래를 지배합니다“ 라고. 조목사는 교회가 아직 소규모일 때 70만의 교회를 꿈꿔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것은 이뤄졌다. 많은 지도자 문학자 학자 등이 꿈을 상상하며 삶을 살아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앤드루 카네기는 불우한 어린 시절 부자가 되어 세상을 윤택하게 하는 꿈을 꾸어 강철왕이 되었고 링컨은 노예해방을 꿈꾸었기에 새로운 미국을 열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목사는 링컨의 꿈을 이어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를 통해 미국민에게 차별 없는 세상을 외쳤고 그것은 오바마라는 흑인 대통령을 낳았다. 이 모든 게 상상력의 소산인 것이다.
반대로 이른바 국뽕에 빠져 성급히 맞대응을 하겠다는 생각도 그다지 바람직하다 할 수 없다. 아베의 대응은 치졸하다 할 수 있으나 같은 치졸한 방식의 대응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다. 벌써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거나 일본여행 안 가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기분은 이해하나 그럴 수록은 상대는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얻게 된다. ”봐라..재들 하는 거 ..우리가 당할 수는 없지 않는가“ 라는 정당성 말이다. 아베는 그것을 노릴 것이다. 자신의 행위에 한국측이 과잉대응을 해서 지지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냉정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의 본질이 어디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 일본이 저토록 화를 내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부당한 것인지 우리가 해야할 가장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지를 모두가 지혜를 모아 짜내야 할 것이다. 잘만 대응하면 막혔던 한일관계가 좋아지고 오히려 이전보다 나은 한일과계가 형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온 뒤 땅이 굳어진다 하지 않던가?
(2) 원인이 된 위안부 합의와 징용피해자 배상문제 –박근혜정부의 외교참사
이번 일의 직접적인 발단은 종군위안부 문제와 징용피해자 배상문제일 것이다. 일본 측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법도 하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박근혜 정부와의 기만성 합의로 따낸 것이라 해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 도장을 찍은 이상 이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징용피해자의 경우 이미 한일청구권협약으로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국제법상으로 보면 아마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위안부 문제의 경우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불가역적 조치”라고 하는 문서에 도장을 찍었으니 한마디로 우리로서는 ‘뻬도 박도 못하는 ’입장이 된 것도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이는 박근혜 정부가 저지른 참상이 아닐 수 없다. 취임초 위안부문제를 빙자하여 아베와의 정상회담을 기피하여 빈축을 산 박근혜 전 대통령은‘갑툭튀’(갑자기 튀어나온 것)처럼 위안부합의를 했다. 10억엔이라는 금액조차 피해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위로금이란다. 나쁘게 말하면 일종의 화대인 셈이다. 제국의 위안부로서 수고가 많았으니. 징용배상문제도 자신들이 처리했으면 되었을 것을 시간만 끌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무능과 부패의 극치를 달린 셈인데 결국 문재인 정부가 그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은 여론에 밀려 일본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해결하게 되었고 그것이 일본의 분노를 샀다.
그런데도 보수언론과 정당은 모든 책임을 문재인 정부에게 전가하고 비판을 서슴치 않고 있다. 박근혜정부의 ‘갑툭튀’적인 합의에는 이렇다 비판은커녕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더니 징용배상문제를 정부와 사법의 거래를 통해 뒤로 미룬 일조차 그다지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하지 않고 있는 느낌이다. 판결을 연기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차라리 이 문제를 정면으로 대처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배상기각판결을 내려 여론의 비난을 받을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냥 일종의 회피를 통해 시간벌기에 급급하였을 뿐 이다. 그리고나서 역시 여론이 무서워 위안부합의라는 대형사고를 몰래 저지르고 말았다. 그토록 그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면 왜 도둑질을 하듯이 위안부합의를 하고 징용문제를 미루었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정부의 여론의식을 비난하는 것은 모순이다. 문재인정부는 지나치게 여론을 의식하여 문제를 일으켰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박근혜정부는 여론의 따가운 비판을 무릅쓰고 결단을 내린 것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도찐개찐이라 할 것이다. 두 정부 모두 여론을 의식하여 문제를 숨기거나 회피하여 결국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말았다 해야 한다.
한 나라의 정부와 국가원수의 처신은 산보다 무겁고 신중해야 할 것이다. 개인과 개인의 약속도 중요한 데 하물며 국가 간의 약속은 일단 맺어진 이상 쉽게 파기할 수도 해서도 안 된다. 2012년 이병박 전 대통령이 국가원수라는 신분을 망각한 채 독도에 상륙하여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퍼포먼스를 한 것에서 한일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국가원수로서의 무게와 엄중함은 실종된 행위였다. 그리고 박근헤 전 대통령은 아베와의 정상회담조차 기피하며 졸속외교를 펼치다가 대형사고를 쳤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문재인 대통령의 일종의 포률리즘적인 행위는 일본의 인내의 한계를 넘어 버린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정부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나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리기에는 전직 대통령들의 실책의 무게가 너무나 크다. 물론 그것이 문대통령에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누구보다 신리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민족이다. 아마도 유태인 버금가는 수준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일본 사회에서 몇 년만 살아보면 그들이 얼마나 신뢰를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다. 그런 그들에게 한국이 보여준 갈지자행보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로 여겨졌음은 물론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모든 것을 무효로 돌린다면 누가 한국정부를 믿고 교섭을 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을지도 모른다.
(3)아베의 오만이 가져온 돌이킬 수 없는 선택.
하지만 아베의 이번 조치가 합리화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국가와 국가 간의 약속이 중요하듯이 상대의 무례함이나 불법에 대한 조처도 신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책입안자가 결정을 내리면 그것이 상대는 물론이고 자국민에게 어떤 영향이 올지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아울러 부득이 제재를 가해야 할 경우 문제에 합당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윗 층과 아래층 사이에 층간 소음이 생겼다고 해서 채무상환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보복을 한다면 적절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법적인 조치를 취하거나 매일 밤 그 집 문 앞에서 소음을 내어 괴롭힌다든지 하는 방법이 나을 듯 하다. 일본이 이번 경우에도 국제사회에 하소연하거나 미국에게 중재를 요청하는 등 보다 나은 방법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식 사고방식이 문제를 확대시킨 면도 있다. “말을 안하니까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는다”고 일본측은 하소연 했다. 말을 안해도 알아주는 것이 일본식이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일본식을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라도 의견을 전달하여 대응을 촉구했더라며 조금은 나은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 측은 알아야 한다. 먼저 보복을 시작한 것은 그쪽이니 결과가 어찌 되든 책임은 모두 그들이 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과거 일본이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을 공격하는 바람에 모든 전쟁 책임을 일본이 다 가져가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로 인해 생기는 모든 피해는 한국의 과실을 떠나 일본의 책임이 될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일본이 어떤 억울함이 있었더라도 전쟁을 일으킨 이상 모든 죄에 책임을 강요당한 것처럼 말이다.
아울러 승산이 있지도 않다. 한국민은 한일전에는 이상할 정도의 에너지를 발휘한다. 지난 6월19일 한국여자배구 대표팀은 일본과의 일전을 치뤘다. 일본은 당시 7승6패로 6강 결승리그 진출을 걸고 싸웠고 한국팀은 1승12패로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한국팀은 중심 멤버 여럿이 부상으로 결장하여 전력이 약화된 상태이고 일본은 결승리그 진출을 위해 베스트멤버가 출전하였기에 아무도 한국의 승리를 예견하지 않았고 다만 선전만을 바랬다. 하지만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3대0 스트레이트로 한국의 승리였다. 승리한 한국팀이나 패한 일본팀이나 결과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팀 감독은 끝나고도 패배가 믿기지 않아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라는 혼자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여론의 뭇매를 맞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6위를 노리는 팀이 16개 팀 취하위인 한국에게 그것도 3대0으로 완패를 당하느냐는 것이다. 이 경기의 패배로 일본의 결승리그 진출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한국이 일종의 고춧가루 부대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경기를 지켜본 나도 믿어지지 않았던 결과, 한일전이 아니라면 일어나기 힘든 결과라 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이 경제전쟁을 벌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본국민들은 한일전 특유의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다. 오랫동안 한국을 내려다 보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가 커지면 국내여론이 들끓 가능성이 크다. “그만하자.” 라고. 하지만 한국인들이라면 “갈 때까지 가자”고 하며 버틸 것이다. 중국이 미국과의 무역 전쟁에서 아직도 버티는 이유는 중국이 민주국가가 아니라는 점도 있다. 모택동은 과거 “미국이 중국을 공격해 천만이든 이천만이든 죽인다면 좋을 것이다. 그래야 미제국주의의 정체가 드러나니까” 국민을 장기판의 졸로 여기는 나라는 이런 점에서 강하다. 이라크는 미국의 경제제재를 버텼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항복했다. 민주국가와 독재국가의 차이이다.
경제제재는 그만큼 효과를 가지기 어렵다. 더구나 한국과 일본처럼 상호간의 피해가 예상될 때는 더욱 그렇다. 한국도 민주국가이기에 어렵지만 상대가 일본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수도 있다. 반일정신이 바람직한 정서가 아닐지 모르지만 이럴 때는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여자배구도 그런 정신으로 일본을 완파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좌파정권이라는 이유로 비협조적으로 나올 보수세력 뿐이다.
(4) 이번에야말로 일본에게 제대로 가르쳐 주자. 한국민의 저력을!
필자는 아베가 만일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싸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물론 갖가지 외교채널을 통해 타협안을 모색해 봐야겠지만. 과거 중국이 희토류를 가지고 센가쿠열도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때 일본은 희토류수입의 다변화와 WTO제소 등으로 이를 이겨냈다. 결국 중국은 참패하고 말았다. 애당초 경제로 영토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시도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일본이 또 다시 어리석은 짓을 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이 이긴 싸움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르쳐 줘야 하지 않을까?
어느 정도 희생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 간의 싸움은 희생이 불가피하다. 국민으로서 그러한 불편함은 함께 감수해야 할 피할 수 없는 숙제이다. 경제만 바라보고 허둥대는 보수진영의 논리는 한국이 외세의 침탈에 이렇다 할 대응도 하지 못한 채 무너진 역사를 기억나게 한다. 하지만 우리도 이제 외세의 부당한 압박에 이겨낼 저력을 갖추었다. 명분은 우리에게 있다. 국제적인 여론전을 해도 승산이 있다고 믿는다. 남북관계의 개선과 일본 한국 미국의 공조체제를 생각하는 미국입장에서도 결코 이것은 방관할 문제가 아니니 이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다. 언젠가 미국이 일본을 압박할 가능성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무모한 싸움은 곤란하지만 승산 있는 싸움이라면 다소의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싸워야 독립국의 명예와 실리를 챙길 수 있다. 친일 세력의 선동질에 넘어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다 여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그들이 명예롭게 물러날 기회를 줘야 한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은 인정하고 새롭게 해결책을 모색하는 노력을 함께 경주하는 것이 투쟁과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막혔던 담이 뚤리는 것처럼 길이 열릴 것이다. 물론 우리모두가 민족과 국가 나아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잠시 동안의 성장통에 대한 각오는 필요하지만.
아베의 만용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수도 있다. 정권에 오래 있다 보니 (현재 6년7개월째로 전후 2번째 장수집권) 권력에 취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진 것 같다.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만일 개헌선인 2/3를 차지하지 못하면 아베에게 책임론이 제기될 수도 있고 그럴 경우 정권의 붕괴도 불가능은 아닐 것이다. 아베는 지금 모 아니면 도라는 마음으로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있다. 하지만 들리는 소식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같다. 생각처럼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소비세 2%인상이라는 폭탄을 안고 있는데 한일관계악화가 새로운 폭탄이 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7월21일이 기다려진다.( 일본참의원선거)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확고히 통일해야 한다. 싸울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 눈 앞의 이익을 위해 항복하자는 주장은 글자 그대로 소탐대실 될 가능성이 크다. 상대는 자 잘못을 떠나 비열한 방법을 취했다. 나중에 타협하고 양보할지라도 한국이 과거처럼 무기력하게 당할 나라가 아님을 제대로 보여주자. 싸운다고 합의한다면. 이번에 양보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마치 조선말기 한국을 우습게 알고 마구잡이로 국권침탈을 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이 절대 없다.
일본은 과거 한국인들의 민족지상주의를 맹비난했다. 산케이신문의 구로다 가쓰히로는 “한국에서는 민족이라는 이름만 대면 뭐든지 용서된다”고 하였다. 그 때는 그것이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지나친 민족주의에 대한 경계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과거의 여유로운 일본의 태도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 원인은 한일격차의 축소에 있다고 생각한다. ‘잃어버린 20년’의 경제침체로 일본인들은 과거의 여유를 잃었다. 반면에 우리는 그들을 상당히 따라잡는 것에 성공했다. 일본인들이 느낄 초조감이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전교 1등 하던 우등생이 전교 꼴찌에게 따라잡혀 가는 심정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한국의 반일적 태도는 무척이나 신경쓰이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이 여전히 만만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중국도 미국도 한국도 그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만 –트럼프와 김정은의 만남은 재팬패싱이라는 말을 만들 정도로 일본에게 박탈감을 준다- 만만하게 대할 상대는 오직 한국 뿐이다. 중국이나 미국은 물론 북한에게조차 입도 뻥긋 못하는 실정이다. 쉽게 말해 자신들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를 우리에게 모두 쏟아 붓는 비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여유가 위선적인 탈이었음을 여지 없이 폭로하면서. 그런데 우리가 그들에게 굴복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일본에게 우리는 중요한 무역상대이다. 우리가 없으면 그들도 힘들다. 그런데 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해야 하는가? 경제적 피해는 부담스럽지만 그것이 지켜야 할 유일한 가치는 아니다.국가의 자존심과 위상도 그에 못지 않게 소중한 가치인 것이다. 한일관계의 역사적인 전기가 다가왔다. “너희가 아는 한국은 없다”라는 것을 명확히 각인시켜야 할 때인 것 같다. 한일전이 시작되니 모두 각오를 단단히 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