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으로 -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길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멀쩡한 살에 손을 댄다면 세게 때리거나 하지 않는 한 그다지 격하게 반응하지 않을 겁니다. “왜 그래?” 정도일까요? 친한 사이라면 도리어 기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상처를 입어 가뜩이나 아픈 부위였다면? 아마도 가벼운 터치에도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상처가 없어도 민감한 부위라면 역시 기분이 상해 상대에게 소리를 지를 수도 있습니다. “왜 만져(요)?”라고.(요)?” 라고.
이것은 마음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사소한 도발을 이겨낼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 뜻밖의 행운을 만났다고 합시다. 급여가 입금되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보너스가 함께 입금되었거나 프러포즈한 상대에게서 OK라는 답을 받았을 때 상사에게 격하게 칭찬을 들었다면 등등 이런 상태라면 누가 좀 뭐라고 해도 “그래 알았어. 내가 잘못했으니 이해해” 이렇게 쉽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거나 자신이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어떨까요? 사소한 터치에도(정신적인) 격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큼니다.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배우자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들었다면 아이가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려 기분이 상했다면 통근하는 전철 안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자꾸 밀어 짜증이 났다면? 그런 일이 없었더라도 어려서 받은 상처를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의 반응은 격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명작 ‘위대한 개츠비’의 서두에는 남에 대한 진정한 배려의 정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을 비판하고 싶거든 그가 네가 가지고 있는 유리한 점을 가지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라”라고.”고.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교훈의 형식으로 제시됩니다. 누군가가 잘못이나 악행을 저지를 경우 그가 처한 상황이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죠. 저는 대학생 때 이 글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비록 그 당시에 삶에 바로 적용시키기는 어려웠지만 (항상 남을 정죄하는 것에 익숙했기에) 오랜 세월 저에게 서서히 영향을 미친 명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바로 상대방이 자신보다 불리한 조건이나 성장과정 상황에 놓여있을지 모른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오늘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을 맞이하여서 무척이나 예민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려서 입은 상처가 심해 건드리면 과격한 반응을 하게 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고요. 배우자가 중병을 앓고 있지만 자존심이 강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혼자 고민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나 조건을 가진 사람이 남에게 배려하는 자세를 취하기는 무척이나 어렵겠지요.
기분 좋게 행복하게 남을 공격하거나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의 마음은 이미 지옥에 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위대한 심리학자 아들러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라고” 했습니다. 화란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는 것과 같이 마음의 질병을 드러내는 수단이라고 합니다. 즉 부당하게 자신을 공격하는 그는 어쩌면 정신에 질병을 안고 사는 매우 불행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그의 공격은 자신의 불행을 알아달라는 하소연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정작 불쌍한 사람은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을 공격하는 상대일 것입니다. ‘오죽 힘들면 저렇게 공격을 할까?’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다면 우리는 정면 대응이 아니라 보다 따듯한 태도를 취할 여유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를 위해 기도할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저 불쌍한 영혼을 살펴 주소서’라고’ 말이죠.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 상황입니다. 제 자신이 경험해 본. 언 듯 말도 안 돼 보이는 이야기 같지만 저는 저에게 마구 공격을 한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였고 또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좀 정도가 심할 경우 상대가 사탄 마귀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다고 하여 축사(귀신을 쫓는 기도)도 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000을 사로잡고 있는 사탄 마귀야 지금 썩 물러가가!” 이런 기도를 중보기도 시간에 하곤 합니다. 좀 지나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로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니 이해 바랍니다..
작은 간증을 함으로써 이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동료 중에 저에 대한 공격을 여러 차례 한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대의 반응은 정상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과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기도를 끊임없이 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는 000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나님의 응답은 이랬습니다. “상처 많은 영혼이니 네가 감싸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있는데 왜 걱정이냐? 내가 너를 감싸줄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에 저는 순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맞대응 대신 감싸주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상대의 저에 대한 태도는 점점 부드러워졌고 지금은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는 관계로까지 회복되었습니다. 과거에 워낙 친했기 때문에 아직은 100%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로서는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상대가 놓여있을 상황을 생각하고 상처를 보듬어 주겠다는 마음을 유지하며 인내와 끈기로 기도하여 온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은 상대만 변화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제 자신까지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 이것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상대를 통해 제 자신이 변화하는 것 말입니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괴로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감싸주고 인도하셨고 그것이 저의 삶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이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마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불편했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차례차례로 좋아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제가 먼저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갈 용기를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어요” 저는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 가는 과정을 주도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가장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도록 저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결국 저의 내면을 바꾸어 놓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 생활의 유익은 결코 천국에 가는 것이나 복을 받아 부자가 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내면의 변화를 통해 진정한 마음의 행복을 누린다는 것에도 있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매우 어려운 미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상대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지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상대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대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필자는 자신의 형과의 관계에서 그러한 점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는 결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에 대하여 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면 진정한 마음의 행복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