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주영을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닐까? 역사가 된 정주영의 재발견(2)
5. 정주영은 행운 – 그는 정녕 하늘이 내린 사람이었는가?
6. ‘어쩌다 영웅?’ 정주영 가장이 되려다 민족의 지도자가 되다.
7. 우리는 정주영을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닐까? 역사가 된 정주영의 재발견
8. 정주영은 국제용이다. 일본엔 시부사와! 한국엔 정주영! 미국에는 스티브 잡스?
5. 정주영은 행운 – 그는 정녕 하늘이 내린 사람이었는가?
그의 삶을 바꾼 또 다른 계기가 있다. 그가 쌀가게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 당시로서는 꽤나 좋은 급여를 받았다. ‘네가 출세를 했구나’라는 말을 아버지에게 들을 정도였다. 그것이 대략 1년에 쌀 20가마였다. 오늘의 가치로는 400만 원 정도니 결코 큰 금액은 아니지만 식사를 제공받는 것을 감안하면 혼자서 충분히 먹고 살 만한 수입이다. 그대로 갔다면 그는 돈을 모아 공부를 하려고 했을지 모른다. “나는 그때로 돌아가면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회고할 정도이니 그의 공부에 대한 집념은 매우 컸다. “공부가 싫어서 초등학교만 졸업한 것이 아니라”서 그는 동생들을 그토록 열성적으로 가르친 것이다. 대리만족인 셈이다.
그런 그에게 놀라운 제안이 들어온다. 바로 쌀가게 주인이 사업을 물려준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그가 사업가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으니 자다가 벼락 맞은 꼴인데 이것은 ‘돈벼락’처럼 좋은 벼락이었다. 그가 좋은 벼락을 맞은 것은 그의 성실함이 기반이지만 주인의 아들의 방탕함이 결정적 이유였다. 만일 그 아들이 성실하게 살았다면 아무리 정주영이 성실하다고 해도 기회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업가 정주영은 그렇게 뜻하지 않게 탄생했다. 정주영을 ‘하늘이 내렸다’고 한 평가는 이런 점에서는 사실일지 모른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배구선수라는 김연경의 경우를 보면 이런 생각에 대한 확신이 든다. 그녀는 중학교 시절까지 키가 자라지 않아 수비와 서브 리시브 토스에 대한 능력을 키워야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가서 키가 자라 졸업할 때는 190이 된다. 1년 일찍 학교에 간 덕인지 프로에 입단하고도 2센티가 더 커 192에 이르렀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조건인데 키가 작을 때 수비와 서브 리시브 토스를 제대로 배웠기 때문에 키 큰 선수의 단점이 전혀 없었다. 만일 처음부터 큰 키를 가졌다면 그런 기본기를 제대로 배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초중고 배구에서 키 큰 선수는 거의 수비나 리시브를 면제받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연경은 ‘하늘이 내린 선수’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그녀는 한국배구의 구세주가 되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런던올림픽 4강은 올림픽 참가조차 보장할 수 없었고 설령 운이 좋아 참가했어도 예선탈락은 거의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었다. 지금은 여자배구가 인기를 얻어 높은 시청률을 얻고 있지만 김연경이 나타나 국제대회 성적을 급상승시키지 않았다면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라이벌 겨울스포츠인 농구에게 압도적으로 밀린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특히 남자농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우리 자식들 배구를 시킬 수 있을까?” 예전에 배구인들은 이런 자조적인 말을 했다. 자신들의 키가 크니 자식도 당연히 키가 크겠지만 그렇다면 차라리 농구를 시키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농구와 배구는 키가 큰 것이 유리한 점에서 같기 때문에 자신들의 전공인 배구 대신 농구를 시키려고 한 것이다. 마치 이공계를 나온 부모가 어차피 자식에게 이공계적 자질이 있다면 의대를 보내자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리어 반대일지 모른다. 여자배구에 비해 여자농구가 인기를 잃어버리자 ‘딸 낳으면 배구 시키자’라는 말이 농구인들 사이에서 나타날 정도이다. 남자농구는 아직 인기가 좋으니까 아들은 농구를 시키고 딸은 여자배구 인기에 편승하자는 이야기이다. 여자배구의 인기는 가장 인기가 높은 프로야구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시청률에서 이김. 단 야구는 매일 5게임을 하고 배구는 하루에 한 두 게임밖에 하지 않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김연경 한 사람의 공은 아니겠지만 사실상 절반 이상은 그녀의 몫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자배구는 격렬함이 적고 여성적인 아기자기함이 돋보이는 스포츠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여자농구는 물론 나라에 따라서는 남자배구보다 인기가 높다. 김연경은 남녀 통틀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이다. 남자 스포츠보다 연봉이나 상금을 더 받는 여자스포츠는 필자가 아는 한 이것밖에 없다.
물론 국제대회 성적이 곧 인기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여자핸드볼의 경우 두 번이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고 2번의 은메달을 획득했을 정도로 강하지만(구기 종목 중 최고)여자배구만큼 인기는 없다. 그것은 여자배구의 인기가 선수들의 짙은 화장과 화려한 장신구 몸에 착 붙는 유니폼 조금은 에로틱하게 보일 동작 등에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연예인도 더욱 그렇지만 여성 스포츠도 여성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인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에 비해 핸드볼은 과격함이 돋보이기 때문에 여성미를 보이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김연경이 계기를 만들어 주었기에 오늘의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국제대회를 통해 팬들에게 자주 노출되면 인기를 얻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것이 여자배구의 아기자기함과 여성미를 느끼게 된 것이 인기를 더 높인 것이다. 인기연예인은 인기가 있어 자주 시청자에게 노출되지만 자주 노출되기 때문에 더 인기가 높은 것과 같다.
김연경과 같은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스포츠 분야의 영웅도 운이라는 것이 중요한 데 하물며 정주영같이 영향력이 비교가 안 되는 영웅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정주영의 호학은 그가 막노동을 하던 시절에도 다른 사람들이 술과 도박으로 여가 시간을 보낼 때도 책을 놓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나에게는 부모님과 책이 가장 큰 스승이었다’라고 할 정도로 책을 좋아하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변호사 정주영이 탄생했을 가능성은 여러 가지 정황증거(?)로 보아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화가 복이 되는 ‘전화 위복’도 있었다. 쌀가게와 그 뒤에 한 자동차 수리업을 일제에게 강탈당한 것은 당시로서는 화였지만 궁극적으로는 복이라 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작은 성공으로 가족을 부양하게 된 것에 만족하고 살았을지 모른다. 그는 서울에 모시게 된 어머니에게 조선총독부 건물을 가리키며 “언젠가 저런 집에 살고 싶습니다”고 하였다. 그 당시 정주영의 꿈은 그렇게 소박했다. 하지만 그의 좌절은 ‘한 곳에 머물지 않는’ 도전자 정주영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이 근현대에 겪은 시련이 민족의 각성을 가져와 영웅시대를 통해 오늘의 번영을 이룬 것처럼 말이다.
6. ‘어쩌다 영웅?’ 정주영 가장이 되려다 민족의 지도자가 되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또 다른 사실은 그가 부자가 되려고 가 아니라 가족에 대한 책임으로 시작하여 국가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을 다 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가족을 부양할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서울에 왔고 열심히 일했는데 점점 성공을 하면서 어느 덧 제법 번듯한 기업가가 되었다. 그러자 이제는 보다 큰 목표인 국가와 민족에 대한 책임을 느끼게 되어 보다 커다란 세계를 지향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대선출마이다.
우리는 이런 정주영의 모습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필자 자신도 이번에 처음으로 그의 참된 모습을 접하게 되었다. 가장에서 사업가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경이로움과 감동을 느꼈다. 그가 만년에 벌인 이벤트 –소떼 방북 등-는 바로 그러한 모습의 표현인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의문이다. 금강산 사업이나 해서 북한을 상대로 돈을 크게 벌려는 노사업가의 얼굴만이 아닐까 염려된다.
아울러 그가 제시한 시베리아와 유라시아 관통 프로젝트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지도 의문이다. 우리가 유라시아의 끝에 위치한 나라가 아니라 시작임을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끝이라면 머물러야 하지만 시작이라면 나아가야 한다. 징기스칸이 몽골의 초원에서 유라시아대륙을 누비며 세계제국을 세운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정주영의 웅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과거의 성공에만 매달리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가 제시한 웅대한 계획에 주목하게 되었기에 미래의 길잡이로 삼고 싶다.
7. 우리는 정주영을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닐까? 역사가 된 정주영의 재발견
과연 우리는 정주영의 삶을 이런 학문적인 분석을 통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그에 대한 저서는 대부분 칭송 일색으로 이른바 ‘정비어천가’를 부르고 있다. ‘그는 타고났다’ ‘그는 넘사벽이다.’ 심지어 ‘하늘이 낸 인물이다’ 식이니 그에 대한 객관적 이해는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인가 싶다. 물론 그러한 칭송적 서적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정주영에 대한 관심이 커져야 그를 연구할 필요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멈춘다면 우리는 그에게서 현재와 미래를 위한 소중한 가르침을 끌어내기 어렵다. 그냥 “옛날에 이런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는 전설로 끝날 수 있다. 역사가 된 그에게 우리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E.H. 카의 명언을 적용하여 그의 과거를 오늘날의 상황에 그리고 미래에 소환하여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의 업적은 ‘갑툭튀’가 아니라 개인적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니 그런 것을 전제로 이해되어야 모든 것이 다른 오늘날에도 적용하여 우리의 미래를 바꿀 재료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아산복지재단이 개최한 ‘이 땅에 태어나서’ 독후감 공모를 위해 정주영에게 접근하였다가 마치 보물섬을 발견한 것과 같은 감동을 받았다. 그것은 김우중에 대한 공부를 했을 때와도 달랐다. 김우중은 글로벌경영으로 대우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었지만 그래 봐야 기업인이었다. 물론 그 가치를 과소평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스케일과 깊이에서 정주영을 능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박정희 사후 정주영은 우리 민족을 제대로 이끌고자 한 거의 유일한 지도자였을지 모른다. 원래는 감투를 싫어하던 그가 ‘우거지국 먹고 살다가’ ‘맨 몸으로 저승에 갈’ 각오로 즉 ‘사즉생 생즉사’의 결의로 출사표를 던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김우중이 정권과의 협력으로 큰 사업가라면 정주영은 정권과는 거리를 두고 모든 것을 이룬 지도자였다. 그가 정경유착이나 반기업정서를 극도로 혐오한 것은 그의 삶이 사리사욕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부유한 노동자’로 부를 정도로 소박한 삶을 살았지만 사회에 필요한 곳에는 아낌없이 사재를 터는 모습은 그러한 정주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정주영의 또 다른 모습은 사상가 철학자의 모습이다. 그는 기업인으로서는 드물게 강연과 저술 등에 힘쓰며 살았다. “나같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도 성공할 수 있다는 모델이 된다면 기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또한 사상을 전파하는데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학문적 기반이 없음에도 그의 사상은 웬만한 철학자나 사상가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체계적이고 섬세하다. 게다가 노동자의 권리에도 긍정적일 정도로 좌파적인 색채마저 어느 정도 인정된다. 한 마디로 유연하고 실용적인 사상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사상가 정주영은 이론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반영한 생생한 이야기를 전하는 점에서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고 있다.
우리가 만일 그저 성공한 기업가 정주영만을 바라본다는 너무나 많은 보배를 잃게 될 것이다. 사업가 정주영은 사회적 지도자 나아가 민족과 국가의 지도자 그리고 사상가 철학자의 얼굴을 가지게 되는 진화를 평생 거듭하였다. 우리가 그를 알면 알수록 보다 많은 얼굴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결과물들은 사업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8. 정주영은 국제용이다. 일본엔 시부사와! 한국엔 정주영! 미국에는 스티브 잡스?
필자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의 삶을 더 깊이 자세히 파악하고 이해하여 정주영을 세계적인인물로 부각시키고 싶다. 일본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라는 위대한 기업인 있다. 필자는 그의 전기를 최근에 출판하였다. 정주영에게서 시부사와의 모습이 보인다. 사업을 애국의 수단으로 시작하여 메이지 시대(1868-1912)에 500개의 기업을 세운 시부사와는 정주영처럼 업그레이드 되어 마침내 민족과 국가의 지도자로 우뚝 솟게 된다. 오늘날 일본에서 경제인의 지위가 높은 것은 시부사와를 필두로 많은 위대한 경제인들의 활약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주영을 시부사와처럼 위대한 인물로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제2, 3의 정주영을 배출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오늘같이 민족과 국가의 미래가 불투명한 시대에는 더욱 그런 지도자의 출현이 요망되고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란다. 박정희와 정주영에 이어 이 나라를 이끌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 지금 정주영이 그리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기분일지 모른다. ‘이 봐! 해 봤어? 하는 그의 말처럼 우리는 그가 살아온 길에서 많은 가르침을 얻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하늘이 내린’ 정주영이 아니라 ‘이 땅에 태어나서’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자 평생을 바친 ‘이 땅’의 정주영이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필자의 작은 시도가 그런 계기가 될 수 있다면 큰 영광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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